맥스웰의 요한계시록 연구 요한계시록 2, 3 — 그리스도께서 일곱 교회에 편지하심 1. 그리스도께서 그을음 투성인 교회를 돌보심
 그러나, 그분이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소개하셨을 때는 전혀 다른 의도를 갖고 계셨다. 만약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그들을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가 있다는 뜻이 숨어 있었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재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더 상세한 논의는 관련 문제와 해답 난을 참고하라) (114.1)
 그리스도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병증을 그들이 쉽사리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처방하셨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늘의 상인으로 자처하시고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절실히 필요되는 상품, 그런데도 정작 본인들은 그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품을 제시하셨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14.2)
 자신을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자신을 진정한 부(富)의 원천으로 제시하 셨다. 온갖 눈병의 치료제를 갖고 있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밖에 없는 효과적인 안약을 제시하셨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있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의 흰 두루마기를 제시하셨다. (114.3)
 “흰옷”요한계시록 19장 7절에서 언급된 어린 양의 신부가 입고 나오는 깨끗한 세 마포와 같은 것이다. 거기에서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정의되었다. 그러면 그들의 옳은 행실은 어디서 오는가?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여호와 우리의 의” 이기 때문이다(렘 23:6).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있음을 대속하고 우리의 동기를 바꾸고 우리를 격려하고 도우실 때 우리가 선량하게도 되고 선한 일을 할 수도 있다. (114.4)
 안약은 우리가 잘못을 저지른 후에 우리의 양심을 괴롭게하고 자신의 허물을 바로 보게 해주는 성령을 말한다(요 16:8~10). 우리는 눈에 바르는 연고를 성령의 상징으로 생 각해도 좋을 것이다. (114.5)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가치있는 것은 신앙과 사랑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금(金)으로 비유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돈 주고 살 수 있을까? 믿음, 사랑, 의, 성령을 돈 주고 살 수 있을까? (114.6)
 이사야 55장 1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셨다. 그러나, 누가복음 14장 33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114.7)
 그리스도의 최대의 선물은 자유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최대의 대가를 요구한다. 돈 으로도, 수표로도 신용 카드로도 자유를 살 수 없다. 오직 우리의 마음을 모두 바쳐야 가능하다. (114.8)
 보상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약속된 보상에는 책망의 뜻이 함축되어 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라 하셨다. 이는 그분이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에 들어와 계시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누구든지∙∙∙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 어가겠다”고 하셨다. (114.9)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좋은 의복과 금과 안약은 모두 무료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우편으로 송달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전해 받는 것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들을 억지로 주시는 것은 아니다. 그분은 우리가 잠자는 동안에 우리들의 집으로 몰래 들어와 이것들을 두고 가지는 않으신다. 우리는 마땅히 깨어 일어나야 한다. 우리에게 입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문을 열고 그분의 흰옷을 받고 그분을 안으로 모셔들여야 한다. (114.10)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바라고 욕망하는 동안에 생명을 잃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 도인이 되기로 결단해야 한다. 우리는 불평하는 정신이 솟아날 때 믿음을 지키기로, 가혹한 마음이 생길 때 사랑을 실천하기로, 아무것도 하기 싫고 비열해질 때 선행을 하기로 선 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유일의 가능한 방법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생한 개인적 관계를 통해 실행하기로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문을 열고 그분을 안으로 모셔들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가족이 되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안으로 모셔야 한다. (115.1)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수도관에 있는 물처럼 “미지근하였다.” 최악이라고 할 수는 없 었지만 결코 최선의 상태는 아니었다. 그리스도에게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전적으로 헌신적인 것은 아니었다. 손톱도 들어가지 않는 구두쇠는 아니었으나 훈훈할 만큼 너그러운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구제하는 일에 열성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115.2)
 차지도 덥지도 않았다. 예수께서 탄식하시기를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하셨다. 왜 우리에게 뜨겁기를 원하셨을까? 뜨거워야 우리가 열심으로 선한 일을 행하고, 처음 사랑에 충실하고, 찬양과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슨 까닭으로 우리가 차가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가? 차갑게 되어야 잘못된 것을 인식하고 불편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115.3)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15.4)
 이는 심한 말씀이다. 그러나, 마지막 말씀은 아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그리스도는 우리를 다시 세우기 위하여 책망하시는 것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는 것과같이 하리라”. (115.5)
 라오디게아주의는 교회를 괴롭히는 무서운 질병 중에서도 가장 못된 병이다. 뜨뜻 미 지근함, 어리석음, 맥빠짐 등이 그 질병이다. 그러나, 이 병도 치료가 될 수 있다. 지 금이라도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활 속으로 완전히 모시어 들이기만 한다면 그가 우리를 그의 삶 속으로 맞이하여 영생을 얻게 할 것이다. 그분은 그을음 투성이인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하늘의 “별과같이 영원토록 비취”게 만들 것이다(단 12:3). (1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