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예물과 속죄하는 제사.”
7:27—죄를 위한 매일의 희생 제물들.
9:9-10“예물과 제사 . . . 먹고 마시는 것 . . . 여러 가지 씻는 것.”
9:12“염소와 송아지의 피.”
9:13“염소와 황소의 피 및 암송아지의 재.”
9:18-21—송아지들의 피로써 첫 언약을 비준함.
10:8—희생 제물, 예물, 번제, 속죄제.
10:11—옛 제도의 매일의 봉사.
10:29“언약의 피.”
11:4—아벨이 드린 희생 제물.
11:28—유월절의 피.
12:24—새 언약의 피.
13:11—대제사장의 희생 제물들.
(207.2)
 이와 같이 우리는 사도가 피와 관련된 구약의 전반적인 의식들에서 쟁론하고 있는 것을 본다. 이것들 중에 대속죄일이 있다. 그리고 그것에 관한 구절들을 적어도 세 곳(9:7, 25; 10:1-3)에서 발견한다. 대제사장 그리고/또는 연례(年例) 의식은 이 본문들이 욤 킵푸르를 의미하는 것으로 명시한다. 내 생각으로는, 여기에서만이 우리는 우리의 친구 타 하기아를 보다 중립적인 말인 “성소(sanctuary)”보다는 “지성소(Most Holy Place)”로 번역해야 한다(13:11이 대속죄일에 대한 네 번째의 암시를 줄 수 있을 것이나 그곳에서의 사도의 생각은, 우리가 이후에 보겠지만, 다른 맥락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다). (207.3)
 그러므로 대속죄일은 많은 의식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였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희생 제도 중 가장 절정이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사도의 요지는 이것이다—그것은 하나님께로의 접근을 제공할 수 없었으며, 죄를 결정적으로 다룰 수 없었다. 희생 제물들에 관한 한, 갈바리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은 그 모든 것들—대속죄일을 포함하여—의 원형을 제공하였다. 예수님은 A.D. 31년에 돌아가셨다—1844년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성소의 대속죄일은 동물을 죽이는 것 이상이 내포되었다. 그것의 중심은 진영으로부터의 죄의 정결과 모든 백성의 새로운 출발을 하게 하는 데 있었다. 재림신도들은, 주께서 친히 선악간의 오랜 쟁투를 결말짓는 일에 착수하신, 곧 1844년에 시작된 하나님의 대속죄일에서 이러한 측면들을 본다. (208.1)
 수년에 걸쳐, 일부 재림신자들은 성소에 관한 우리의 독특한 가르침과 심판에 관하여 본문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히브리서에서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의 노력은 다양한 번역들—「제임스왕역」과 「개정표준역」을 포함하여—에 의하여 도움을 받거나 부추겨졌는데, 그것들은 타 하기아를 일관성이 없게 번역하였고, 심지어는 잘못 번역하였다. 그러나 히브리서에 근거하여 이러한 교리들을 불신하여 온 포드와 여타의 사람들은 다른 측면에서 과오를 저질렀다. (208.2)
 히브리서는 하늘 성소에 관하여 가장 명백한 진술을 한다. 그것은 하늘 성전의 존재와 그곳에서의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봉사를 명료하게 단언한다. 그것에 의하여 히브리서는 우리 주님의 하늘 봉사에 대한 우리의 독특한 이해가 출발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208.3)
 그리고 히브리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9:23에서 하늘 성소가 정결케 되어야 할 필요성을 말한다. 이 본문은 그것을 설명하려고—일반적으로 그것을 잘 설명하여 해결해 주는 것을 의미했다—노력하는 주해자들과 주석가들을 혼란케 하였다. 어떤 이들은 정결케 할 필요가 있는 “하늘의 것들”9:9, 14“양심”과 동일하거나 9:23정결케 되다“취임하다”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논쟁을 벌였다. 양 제안들은 8:1-10:18을 관통하는 전체 토론에 비추어 볼 때 전혀 맞지 않는데, 그 곳에서의 논법은 부정(不淨), 정결, 그리고 그리스도의 하늘 봉사를 분명히 맴돌고 있다. (208.4)
 그러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다니엘 8:14 때문에 이 어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에게는 히브리서 9:23의 진술이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하늘과 땅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땅의 사건들은 우주적 분지(分枝, ramification)가 있어 하늘 자체에 연결된다고 이해한다. 우리가 이해하기로는, 하나님의 죄 문제 취급은 우주의 바로 심장부까지 미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희생—더 좋은 피—는 지상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정결케 되어야 할 모든 것들을 정결케 하고, 완전한 해답을 제공한다. (209.1)
 히브리서 9:23은 하늘의 정결의 때를 개방한 채로 놓아둔다. 우리는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연구에서, 그것이 1844년에 시작되었다고 이해한다. (209.2)
 어떤 사람은 9:23에 대한 설명을 히브리서의 나머지에서 찾으려는 헛수고를 한다. 그것은 많은 주석가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수수께끼요 난제이며,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일과성(一過性)의 주석이다. 그러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에게는 의미로 충만해 있다. 우리가 8:1-10:18에서 보았듯이, 사도는 근본적으로 뒤돌아보고 있다. 그의 시선은 갈바리, 곧 그가 “세상 끝”(9:26)이라 부르는 역사의 그 결정적 순간에 고정되어 있다. 거기에서, 신—인(神人)이신 분이 자신을 드리셨다. 거기에서, 그는 인간의 궁지에 단번에 해답을 준 완전무결한 속죄 제물을 제공하셨다. 거기에서, 그는 결정적인 전투를 이기셨고, 악과의 긴 싸움의 결과를 보증하셨다. (209.3)
 종종 바울은 미래를 바라본다. 그는 아버지 우편—그리스도의 사업이 성공적이었음을 암시하는 영예의 자리—에 앉으시는 아들이 온 우주가 그에게로 되돌아 올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우리에게 일찍이 말한다(1:12-13). 그는 예수께서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실(9:28) 재림의 때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고 미래의 심판에 대하여도 말하고 있다(10:30-31; 12:25-29). 그러나 이 주제들에 대하여 설명은 하지 않는다. 책 전체를 통하여 그의 초점은 미래보다는 과거—갈바리—에 있다. (210.1)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8:1에서 시작한 그리스도의 사업에 관한 신학적 논증의 결론에 도달한다. 특별히 9:11-10:18에서, 생각은 접근되면서 강렬해졌다. 그것은 확실히 가볍게 읽어버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진지하게 찾는 자의 양육(養育)과 즐거움을 위하여 얼마나 놀라운 사상들이 부상하고 있는가! 얼마나 믿기지 않는 개념들이며, 얼마나 확실하며, 그 어떠한 보증인가! (210.2)
 그렇다. 지금도, 우리는 속한다고 사도는 말한다. 지금도, 우리는 우주의 보좌실(throne room)에 접근한다. 지금도, 예수께서는 우리를 죄로부터 정결케 하셨으며, 우리의 무거운 짐을 들어 올리셨으며,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어떤 다른 성전, 어떤 다른 희생 제물, 어떤 행위나, 어떤 신을 바라볼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의 피—오, 그 얼마나 좋은 피인가!—가 우리를 온전케 하였으며, 아버지에게 우리를 새로운 신분으로 주셨으며, 신성한 확신을 우리에게 주셨다. (210.3)
 10:18에서 히브리서의 신학은 그 절정과 결론에 달한다. 그것은 설교의 끝까지 계속될, 위대한 “무엇이?”(WHAT)에서 그 다음에 나오는 “그래서?”(SO WHAT)를 확립하였다. (210.4)
 ■ 말씀을 적용함
 1. 예수께서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라는 가르침을 이해한다는 것은 두려움을 소망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의 사업을 우리의 완전 무결한 희생 제물로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의심을 완전한 확신으로 바꾸는 것이다. 히브리서 9:11-10:18의 어떤 구절들이 특별히 나에게 이러한 소망과 보증을 주는가? (211.2)
 2. 희생 양의 피가 구약 시대의 사람에게는 어떤 의미를 주었을까? 그리스도의 “더 좋은 피”(9:11-14)는 오늘날의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이러한 차이 때문에, 나와 하나님과의 동행이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 이전에 살았던 사람 보다 더 나을 수 있는가? (211.3)
 3. 하늘 성전에 접근한다고 하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만일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다면, 내가 지금 하나님의 면전에 들어가기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 (211.4)
 4. 내가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히브리서 9:11-10:18의 교훈들이 내가 가치 있는 존재이며, 용납되며, 환영됨을 깨닫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211.5)
 5. 죄책감과 불확실성에서 나의 양심이 정결케 되었는가?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히브리서의 이 부분이 그러한 경험을 나에게 얻게 하는 데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가? (2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