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요한복음 제III부 예수께서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심 (5-12) 제 10 장 메시야가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줌 (10:22-11:57)
 오빠를 여읜 마리아를 문상하러 와서 슬퍼하는 사람들 사이에 엇갈린 반응이 나타났다. 어떤 이들은 예수를 믿었으나, 다른 이들은 예수의 행위가 당국에게 보고되어야 될 필요가 있는 도발이라고 느꼈다(45, 46절). 사실상 참담한 심정으로 당국자들은 백성들 앞에서의 자신들의 입지를 위하여 예수의 가장 위대한 이적의 의미에 대해 논의하고자 회의를 소집했다(47절). 그들은 두 가지 사실을 두려워했다. 첫째,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염려했다. 그들은 백성들이 그들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게 되고, 그들이 예수께로 나아가서 그들의 일차적인 영적 권위를 그에게서 찾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이 둘째로 두려워한 것은 로마인들이 유대인 지도자들을 힘있는 자리로부터 제거하여 민족의 정치적 자치권을 축소시키는 것이었다(48절). (244.4)
 분명히 그 회의는 공포에 사로잡힌 억측의 지껄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가야바가 그들의 주의를 끄는 데도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49, 50절). 그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오직 예수의 죽음만이 민족을 파멸로부터 구원할 가능성이 있을 만큼 중대하고도 엄숙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순간으로부터 그 의회는 예수를 파멸시키기는 일에 착수했다(53절). (245.1)
 이 의회의 계획을 아시고 예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의 관심을 끄는 방식으로 공공연히 돌아다니지 않으셨다. 그는 유대의 한적한 곳으로 제자들과 함께 물러나셨다(54절). 유월절이 가까워오자 군중들은 그 명절에 예수께서 감히 나타나실 것인지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55, 56절). 통치 협의회는 예수를 체포할 기회를 엿보며 적당한 시간을 기다하고 있었다(57절). 요한복음 11장의 마지막 네 절은 예수의 공중 봉사의 종결을 예고하면서 그의 수난(受難)의 사화(史話)를 향한 문학적인 연결 고리를 제공하고 있다. (245.2)
 문단의 주요 주제
 요한복음의 신랄한 해학(諧謔, humor)
 우리는 요한복음에 의도적으로 이중의 의미를 풍기는 많은 실례들이 있음을 보았다. 이 복음서에는 또한 역설(逆說, irony)이라 불리는 신랄한 해학 형식의 실례들도 많이 있는데, 이는 참된 의도와는 반대되는 말을 말함으로써 상대를 놀리는 것(잘난 척하는 십대 소녀가 대대로 물려받은 옷을 입은 다른 소녀에게 “와, 멋있는 옷이구나! 어디서 이런 옷을 살 수 있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는 한 사람의 기대했던 것들이 별안간에 느닷없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그대의 얼굴을 향하여 연기를 뿜어대는 여송연[呂宋煙]과도 같은 것!)과도 같은 것이다. 이 복음서에서 이와 같은 해학을 사용한 목적은 독자들에게 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견해를 반대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어리석은 것이고, 자신의 희망과 꿈을 무산시키는 것임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246.1)
 요한복음 11:48-52은 종교 당국자들이 예수를 파멸시킴으로써 현생과 내세에서 모두 자신들의 의도를 스스로 낭패시키게 된다는 미묘하고 역설적인 기별을 밝히 드러내고 있다. 유대인 통치 협의회는 나사로의 부활로 공포에 사로잡힌 것이 분명했다(45-48절). 그들은 예수의 하는 일을 중단시키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48절) 갈 것이라고 두려워하였다. 목소리가 큰 능변가인 가야바(“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49절)가 민족이 망하지 않게 하려면, 그 협의회가 예수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무대에 등장했다(50절). (246.2)
 제4 복음의 역설적인 이중의 의미는 48-52절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가야바는 예수에 대해 적대감을 표출하면서 예수의 죽음이 민족의 구원을 초래할 것이라는 예언을 거리낌 없이 말함으로써 사람들의 치하를 받았다(가야바가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음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비록 가야바가 자신이 하는 일을 깨닫지 못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그를 사용하신 것이 분명하다. (246.3)
 요한의 풍자(irony)는 48절에서 거의 난폭하리 만큼 강하게 나타난다. 필사적으로 산헤드린은 만약 그들이 예수를 계속 살려두면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게 되고, 그러면 로마인들이 와서 도성과 성전을 파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제1세기말의 독자들은 어떻게 알고 있었는가? 유대인들의 통치 협의회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그들이 두려워하던 바로 그 결말을 자초(自招)했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목적은 민족과 성전을 구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세상이 예수를 믿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십자가에 못박은 일의 역설적인 결과는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종교 당국자들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신 것이다. (246.4)
 현대적 의미
 인간의 죄된 마음은 불의를 정당화하는 거의 무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문단에서 우리는 진지한 종교인들이 온유한 교사이신 그리스도를 파멸시키기 위해 그럴 듯하고 확고한 이유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을 본다. 이 교사의 으뜸가는 실수란 단지 자신에 관한 진리를 말한 것뿐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유대인 대학살(Holocaust)이 자행되는 동안에 나치(Nazis)는 그들이 유대인들을 제거한 것에 대해 세상이 그들에게 감사할 날이 이르러올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만국의 봉사자로 행동하고 있었다! (247.1)
 이와 같이 믿기 어려운 자기 기만은 지상 역사의 마지막 날에 충만하고도 최종적인 절정에 이르게 될 것이다(계 13:16, 17). 예수께서도 “때가 이르면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요 16:2)고 말씀하셨다. 예수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와 같은 자기 기만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늘날 (교회 안팎에서) 예수를 거절하는 자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한 것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247.2)
 ■ 말씀을 적용함
 1. 개인이 예수께서 온전히 하나님이심을 믿는 여부가 어떤 실제적 차이점을 보여주는가? 만약 그대가 예수를 단순히 선한 사람, 또는 천사, 또는 최고의 피조물이라고만 생각한다면, 그대의 삶 속에서 요한복음의 의미가 어떤 식으로 감소될 것인가? (248.1)
 2. 그대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대의 요청에 응답하는 일을 지연시키셨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가? 그때 그대는 어떤 느낌을 가졌는가? 그때 그대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관심에 대해 의심을 품어본 적은 없었는가? 그대는 하나님과 그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었는가? 그런 때에 어떤 경험들이 그대의 믿음을 확증시켜 주었는가? (248.2)
 3. 그대는 이 이야기 속의 어느 인물과 비슷한 사람인가?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마리아와 함께 애통하는 자들? 유대인 지도자들? 그대는 예수께서 지금 그를 향한 그대의 태도에 대해 우시거나 기뻐하실 것으로 생각하는가? 그대는 예수께서 그대의 태도에 어떤 변화가 있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하는가? (248.3)
 4. 그대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옳다고 생각한 것을 거부해 본 적이 있는가?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대는 어떻게 자기 기만을 인정하게 되었는가? 매일의 삶 속에 자기 기만을 피할 수 있는 몇 가지 전략을 세워 보라. (248.4)
 ■ 말씀을 연찬함
 1. 성경 지도를 사용하여 예루살렘의 성전 경내 지도를 연구해 보라. 솔로몬 행각의 위치를 확인해 보라.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성전 안뜰의 소리가 들리는 곳에 위치했는가? 그들은 로마 성채 안토니아(Antonia)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2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