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꼭 마찬가지로, 인간의 힘이 치료하지 못하는 병에 대해서 인간 기계의 메이커인 창조주 하나님께 간다는 것은 극히 합리적이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이 있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기계 수리나 공장에서 고치지 못하는 그 기계의 메이커에 가지고 가도 고치지 못한다고 고집하면 안믿는 사람이다. (256.2)
 그러나, 메이커에서 아무런 수리비도 받지 않을테니 가지고 오라고 한다면, 그래도 필요없다고 거절을 할 것인가. 그야말로 밑져야 본전이니 가보자고 할 것인다. 오늘도 이 순간에도 인간 메이커인 조물주 하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마 11:28) 고 부드러운 초청을 보내고 계신다. (256.3)
 로마의 “피타고라스”는 말했다. “사람의 병이란 스스로가 자기 몸에 끌어들인 것이다. 제일 가까운 곳에 가장 좋은 길이 있음을 모르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사람을 창조하신 메이키를 찾는 일은 가장 좋은 일이 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7). 이렇게 말씀하셨은즉, 그분을 제쳐 놓고 왜 고생을 자청하는가?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8). 그분은 과연 불가능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주저하는가? (257.1)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 이 없느니라”(눅 1:37) 하신 실례들을 성경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257.2)
 나인 성의 과부의 독자가 죽어서, 장례 행렬이 막 지나가고 있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눅 7:13-14). (257.3)
 이와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관 속에 있는 죽은 송장을 불러 일으키셨다. 암흑의 왕 마귀는 그 관 속에 갇혔던 죽은 독자를 영영 가둬 둘 수가 없었고 말씀 앞에 굴복하여, 드디어 청년은 살아난 것이다. (257.4)
 또 한번은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난 무남 독녀 외딸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님께 살려 주시기를 간구하여 가는 도중에 죽었다는 소식이 왔다. (257.5)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 모든 사람이 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곰 일어나거늘” (눅 8:50, 52, 54, 55). (258.1)
 이와같이, 불가능이 없으신 주님의 말씀 앞에, 사망은 더이상 죽은 영혼을 자기의 세력하에 머무르게 할 수가 없었다. 인간을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하나님은 씩어 형체조차 거의 없어진 나사로를 무덤속에서부터 불러내셨다. (258.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놓아 다니게하라 하시니라” (요 11 25, 35, 38-44). (258.3)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불가능이 없으신 능력이요 생명이다. 그러므로, 그 말은 절대적이요, 무덤도 그 말씀 앞에서는 다만 떨 뿐이다. (259.1)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무덤)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7-18). 친히 말씀하셨으니, 그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또한, 왜 그분의 무한한 능력을 믿지 않겠는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259.2)
 믿음이야말로, 유한한 힘 밖에 갖고 있지 않는 인간의 손이 불가능이 없으신 절대적인 무한하신 하나님의 손을 붙드는 것이다. 이 믿음을 가지고 인간 기계의 메이커이신 창조주 하나님께 나가느냐 안 나가느냐는 질병이 낫고 못 낫는 갈림길이다. (259.3)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마 9:35). 이제는 비록 땅에는계시지 않으나, 환자에 대한 동정과 돌보심은 전과 다름이 없으시다. 그분이 지상에 계실 때도 수많은 환자들중에서 그에게 가까이 나가서 믿음으로 치료받기를 애원한 사람들만이 치료를 받고 완전히 건강을 되찾았다. (259.4)
 그분이 땅에 계실 때에는 시간과 장소의 제한을 받으셨으나 이제는 하늘에 계셔서 그런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으시고 항상 자비의 손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친히 다음과 같은 보증의 말씀을 약속하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 하리라”(요 6:37). (259.5)
 그런데,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만일, 주저한다면 자기의 병 고치기를 천연시키는 일이나 다름이 없다. 그렇게도 시달리던 병마에서 해방되고 싶지 않은가.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 (260.1)
 이제라도 믿음으로 그분께 나가라. 그 엣날 예루살렘 가까이 있던 베데스다 못가에 드러누워서 실낱 같은 가날픈 희망을 품고 순간 순간 애타게도 기다리던 38년된 병자에게 꿈같은 치유의 환희가 병마에서 완전 건강으로, 삶의 새로운 출발을 하게 하지 않았는가. (260.2)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6). 이 부드러운 초청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이 음성이야말로 얼마나 오랫동안 듣기를 원하던 말씀인가. 그렇다면, 병 낫기를 일구 월심 고대하고 바랐던 그대가 어찌 그 초청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겠는가. (260.3)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2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