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이 가까와 가자 장사를 하던 재림 신도들은 점포문을 닫았다. 기술자들도 상점문을 닫아 걸었다. 피고용인들도 직업을 포기했다. 장막 집회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자백하면서 기도를 계속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채무 청산을 도와 주기 위해, 많은 액수의 돈이 모금되었다. 그 돈으로 재림 신문들이 간행되었다. 결국 더 이상 돈이 필요없다는 광고가 발표되었고 기부금을 내러 왔던 사람들이 실망하여 되돌아 갔다. (357.5)
 대망, 출판, 예비, 헌신이 당시의 분위기를 압축한 표현이었다. 절정의 시간은 가까 와지고 있었다. (357.6)
 

그 큰 날이 임박해 오자, 재림을 기다리는 인쇄인들은 이제 더 이상 헌금을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357.7)
 10월 19일에는 재림 신문들도 발행이 중지되었다. 초대형 천막도 걷어서 접었다. 재림 기별을 전하던 연사들도 가족들과 함께 주님을 맞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조쉬아 V. 하임즈는 밀러의 집으로 서둘러 갔다. (358.1)
 이 운동권 밖에 있던 세상 사람들은 불안 속에서 지켜 보고 있었다. 이 운동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던 수천의 사람들도 행여 재림 기별의 경고가 사실로 나타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있었다. (358.2)
 드디어 10월 22일의 아침이 밝았다. 뉴잉글랜드와 뉴욕 주 일대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밀러의 무리들은 크고 작은 무리를 지어 기도와 찬양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하루 종일 긴장 속에서 보냈다. 어느 시각에 주님이 오실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358.3)
 그들은 하루 종일 기다렸다. 정오가 지나가고 또 저녁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밤 시간은 지루하게 지나갔다. 드디어 벽시계는 밤 12시를 때렸다.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다. (358.4)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차알즈 피취(Charles Fitch)는 10월 22일이 이르기 8일 전 월요일에 과로로 숨졌다. 신문은 보도하기를 그 미망인과 유자녀들은 며칠 내에 다시 그 남편과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될 줄로 알고 있었으므로 슬픔 대신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고 했다. (358.5)
 우리는 10월 23일에 “엄마, 왜 아빠가 오시지 않는거야?”하고 졸라대는 차알즈 피취의 어린 자녀들의 음성을 듣는듯 하다. 수천의 가정에서 이와 유사한 질문들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는 어린이들의 사망과 젊은 부모들의 사망이 너무나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10월 22일이 대실망의 날로 역사에 기억되고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358.6)
 그러나 그리스도가 곧 오시리라는 밀러의 신앙은 여전히 철석 같았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또 하나의 시간에 나의 마음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그 날은 오늘, 오늘, 바로 오늘이다. 그가 오실 때까지, 그리고 내 영혼이 갈급하는 그 분을 볼 때까지(계속 오늘이다).”56 (358.7)
 밀러는 1849년에 영면하였다. 그러나 재림 운동은 그의 사망과 더불어 끝나지 않았다. 심판이 곧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잘못된 전제를 떨쳐 버리고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는 첫째 천사의 기별이 둘째 천사와 세째 천사의 기별과 결합되어 일찌기 밀러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정력적으로 그리고 더 광범위하게 전파되고 있다. 이같은 발전에 대해서는 8항의 마지막 부분에서 취급할 것이다. (35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