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제단으로의 부르심 제6부 위험에 처한 관계 제34장 대속죄일 심판은 용서를 재확인한다
 만약 그분이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그분의 정부는 실패한 위선적 광대극이 될 것이다. (297.5)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완전하신 분이신가? 아니면 희뿌연 연기가 덮힌 거울로 우리를 속이려는 분인가? 우리는 반드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298.1)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용서해주셨지 때문에 공의롭지 못함에 대한 책임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셨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지불해야 할 것이 없다. (298.2)
 “전체를 위한 부분” 법칙에 의해 이스라엘의 성소가 오염되기도 하며 정결하게 되기도 한다는 사실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소에도 유사한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늘 성소에서 죄악이 들어오고 나가는 이동은 이 땅의 제의 제도가 가진 한계와 관계없이 영적인 거래를 통해 이루어진다. (298.3)
 우리는 신체적으로 우리의 손을 그리스도의 머리에 안수하지 않고 기도를 통해 이 일을 하지만 그분은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신다(사 53). (298.4)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실제적으로 자신의 피를 하늘 성전 안에 적용하기 위하여 자신의 피를 그릇에 담아서 승천하신 것이 아니지만 그분의 보혈은 용서와 도덕적 정결을 제공해 준다. (298.5)
 고대의 제사장들이 번제단을 정결케 하였던 것처럼(레 16:18~19),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남겨두셨던 자신의 피 묻은 십자가를 깨끗케 하기 위해 다시 내려오실 필요는 없다. 그분의 십자가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그분 자신의 본성 가운데 그대로 하늘로 가져가신 것이다. 그분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으로 하늘 성전에 서 계신 것이다(계 5:6). (298.6)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용서하는 행위는 심판 때에 옹호되어져야 하지만 실제로 나무로 만들어진 십자가는 그 과정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299.1)
 이제 우리는 명백한 모순에 직면했다. 로마서 3:25~26은 예수께서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게 하실 때에 그분의 희생으로 이미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는 증거를 제공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니엘 8:14은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의 때까지 하나님의 완전한 의로움이 입증되지 아니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299.2)
 여기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실 때에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2:8과 비교해 보라. 우리는 믿음을 통해 받는 은혜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나 용서함을 받은 후에 믿음을 저버리는 자를 구원하실 수 없으시다(참고 골 1:21~23).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계속해서 용서받은 자로 간주해 주실 때에 그분은 공의로우시다.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함을 통해 계속해서 믿음을 가질수 있도록 해주신다(참고 롬 5:1). (299.3)
 다니엘 7~8장의 심판은 사람들의 믿음에 근거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참 백성임을 확인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마음을 읽을 수 있으시기 때문에(참고 시 139:23; 눅 7:39~40) 피조물들이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고 확신한다 하더라도 심판은 반드시 피조물들이 목격할 있는 믿음의 증거가 사용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심판에서는 진정한 믿음의 유무를 보여주는 행위의(전 12:14) 기록들을(단 7:10) 고려한다. 중요한 것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용서와 하나님과의 충성된 관계를 받아들였는지와 계속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하는 것이다. (299.4)
 다른 피조물들은 우리 인간들이 죄에서 완전히 성공적으로 회복되는 것에 엄청난 기대를 걸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입증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이 더 이상 “자가복제(自家複製)하는 도덕적 바이러스”의 역할을 계속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을 다른 피조물들에게 증명할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죄인들로서 매우 위험하다. 만약 죄를 완전히 치유하지 않으신 채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불멸의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온 우주에 풀어놓으신다면 어떻겠는가? 만약 의사가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을 거리로 내어 보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의 타락하지 않은 피조물들이 안심하려면 우리 인간들이 완전히 치료되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300.1)
 심판은 “누가 죄를 지었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다. 모두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롬 3:23) 그러한 관점에서 사람을 구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대신 심판은 “누가 용서 받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용서받은 사람들에게 심판은 그들의 확신을 빼앗아 가기 위함이 아니라 재확인하는 것이다. 심판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위한 것이다(단 7:22). (300.2)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과 그분을 향한 충성을 유지함으로 지속적으로 용서를 받아들여야 할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간음으로 잡혀온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는 일만 달란트라는 엄청난 금액의 빚을 탕감 받았지만 밖에 나가서 보잘것 없는 백 데나리온을 내놓도록 동료 종의 목을 잡았다. (300.3)
 불의한 자는 그가 받은 용서의 결과로써 용서를 베푸는 사람이 되지 못했기에 받았던 용서도 잃어버렸으며, 결국 산더미 같은 빚이 눈사태처럼 되돌아 왔다(마 18:23~34). (301.1)
 도덕적인 삶의 변화가 따르지 않고 남의 유익을 위하여 재생산하지 못하는 용서는 무용지물이 된다.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값없이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301.2)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바꾸도록 내버려지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의 화평을 선물로 주심으로(롬 5:1) 하나님의 율법의 기초인 그분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 속에 부어지는 것이다(롬 5:5; 참고 마 22:36-40). 진정으로 성장하는 순종은 그리스도의 피로 산 은혜의 선물이며 믿음을 통해 받게 되는 것이다. (301.3)
 우리의 삶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의 성소를 정결케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그분의 보혈이 공의가 함께하는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것이다. (301.4)
 단지 드고아의 여인이 자신을 위하여 심판을 소망했던 것처럼, 다윗이 하나님께 공의를 부르짖었던 것처럼(시 26:1; 35:24), 우리는 구원으로서의 심판을 고대할 수 있다. 우리는 드고아의 여인과는 다르게 용서 받은 것에 대한 책임을 감수하겠다는 제안을 할 필요가 없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구원이 “돈 없이 값없이”(사 55:1) 주어졌다.우리는 자비의 대가를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3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