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제 3부—안식일 신학 제15장—기독교의 현대 안식일 신학
 필라델피아의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의 존 메레이(John Murray)는 자신의「안식일의 제도」(The Sabbath Institution)에서 “넷째 계명 안에 구현된 원칙의 영원성 곧 하나님이 반복되는 제칠일에 부여한 신성성”을 확립하는 일에 관심을 나타냈다. 머레이에게 있어서 일요일 준수는 그 날이 하나님의 제도이냐 아니냐에 따라 설 수도 있고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다. 편의주의는 “결코 율법을 재가할 수가 없으며 그것으로는 사람의 양심을 묶을 수 없다”는 것이다.28 (269.4)
 그는 창세기 2장의 안식일을 인간의 타락하기 이전에 제정된 창조의 명령으로 단언하고 분명한 소리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죄는 창조의 명령들을 철폐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구속(救聽)은 창조의 계명들의 의무와 실천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는다.”29 (270.1)
 머레이는 넷째 계명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넷째 계명은 그것이 다른 아홉 계명들과 다른 범주에 속한다는 논지를 성립시키기 위하여 가장 결정적인 증거를 요구하고 있다. 넷째 계명이 하나님이 그 손가락으로 돌판에 기록한 십계명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계명이 셋째나 다섯째나 일곱째나 열째의 계명과 동등한 자리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마가복음 2:27, 28에서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 말씀도 안식일의 폐기를 주장하는 말씀이 아니고 오히려 안식일 제도가 포함하고 있는 것을 사람에게 인치시는 말씀이라고 주장 하였다. 즉 “우리들의 주님 자신이 안식일의 영속적인 타당성을 확인하셨다”는 것이다.30 (270.2)
 그러나 머레이는 안식일을 주간의 제칠일부터 분리시켜 “안식일”을 주간의 첫째 날로 옮김으로써 일요일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 인정한다. 안식일이 창조의 제도로서 창조의 완성을 기념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는 “기독교의 시대에 있어서 안식일은 주의 날이며 따라서 창조의 일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일의 완성을 기념하는 날이다”라고 주장하였다.31 여기에서는 성경의 주장과 전적으로 무관한 부당한 대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즉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가 창조주로서 그 자신이 창조하신 완전한 창조의 선한 기념일을 파괴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머레이 자신이 “죄가 창조의 명령을 폐기하지 않으며 구원이 창조의 명령들의 의무와 실천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는다”고 말했던 주장 자체와도 서로 모순이 된다. (270.3)
 허버트 떠블유. 리차드슨(Herbert W. Richardson)은 일요일을 “성령에 의하여 만물을 거룩하게 하며 세상을 신성하게 하려는 미국의 이상”을 위한 안식일 성례의 날로 높이고자 노력했다. 리차드슨은 안식일 계명이 다른 아홉 계명과 같지 않고 후에 그리스도께서 폐하신 예식적인 그림자의 명령에 불과하다는 전통적인 주장을 배격하였다. 그는 그같은 주장을 “반(反) 유대적인 논쟁”에 동기를 둔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기본적으로는 청교도들의 입장위에 서서 넷째 계명이 보편적인 도덕적 율법을 구성하고 있다고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창세기 2장의 창조론적인 해석을신명기 5장의 구속론적인 해석 보다 우위에 두었다.32 (270.4)
 해롤드 린드젤(Harold Lindsell)은 “주의 날과 천연적인 자원”이라는 그의 글에서 일요일과 안식일 신학에 대해 다소 이례적인 변화를 시도하였다. 그는 일요일을 성경의 안식일과 단순하게 일치 시키면서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에게도 표면적인 안식일 준수를”강요하기 위한 사회적인 안식일 입법을 추진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가 그렇게 해야 할 이유로 내세우는 것은 오직 교회만이 무엇이 세상을 위해 좋은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은 하나님의 자연적인 계시인 자연 법칙에 통찰을 주며 안식일과 관련해서는 모든 사람이 “7일 중 한 날을 휴식의 날로 만든 하나님의 자연법칙”을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하였다.33 (270.5)
 린드젤은 이같은 철학적인 추상에 기초하여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비록 다른 이유들 때문에라도 그날(주의 날)을 지키게 하기 위하여” “아무런 종교적인 관련 없이 주의 날을 적절히 사용하게 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모든 비 기독교인들을 강압하는 법률을 국가가 제정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34 (271.1)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와 상관없이 안식일을 지키면서도 과연 안식일을 “적절히” 지킨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렇게 안식일 계명을 외면적으로만 순응하게하는 것은 세속화의 한 형태가 아닌가? 1976년 11월 5일자「크리스차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의 사설을 통하여 린드젤은 놀랍게도 국가의 에너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토요일을 안식의 날로 떼어놓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이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자백도 들어있다. “유대인들과 그 밖의 안식일 준수자들은 이러한 결정으로 많이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도들과 카톨릭 교도들에게도 신학적으로 별 어려움이 없다. 우리의 주님께서 주간의 첫째 날에 부활하셨다는 사실 이외에는 성경에서 우리에게 토요일보다 일요일을 더 거룩한 날로 지키도록 요구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35 (271.2)
 미합중국의 주일 연맹(Lord’s Day Alliance of the United States)의「썬데이」(Sunday)지의 편집인인 제임스 피 웨스베리(James P. Wesberry)는 다음과 같은 말로 또 하나의 흥미있는 변화를 제안하고 있다. “예수님은 옛 안식일을 폐하시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그 안식일을 확장하고 귀하게 만드셨다. 그리고 그 안식일을 주일 안에 합병시키셨다.” 그리하여 “옛 유대의 안식일은 예수님과 함께 무덤에 매장되었으며 예수님이 부활 할때 그 안식일은 새로운 특성을 갖추게 되었다.”36 “그것(옛 안식일)은 변모됨으로써 영속하게 되었다.”37 (271.3)
 웨스베리는 이처럼 교체된 안식일, 즉 그리스도에 의하여 주일인 일요일로 “변모된” 안식일을 옹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음과 같이 솔직히 인정하였다. “예수님 쪽에서 그와 같은 변화를 자신의 권위로 인정하셨다는 기록이나 사도들 측에서 그같이 주장했다는 기록은 없다.”38 (271.4)
 안식일이 철폐되었다고 주장하는 복음주의 신학. 현대 복음주의 신학의 애호를 받고 있는바 근본적으로 안식일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학파의 안식일 신학은 17세기에 화란에서 이루어졌던 안식일 논쟁에서 화란의 신학교수 요한네스 코체유스(Johannes Coccejus)가 주장했던 것이다. 그의 입장은 제칠일 안식일이 창조 시대의 명령이 아니라 모세가 제정한 예식 계명이며 그리스도에 의하여 폐기되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요일 준수도 순전히 교회가 제정한 제도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주님의 날로서의 일요일의 근원과 권위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여 일요일 준수자들을 충격으로 몰아세웠다. 그는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고 해서 안식하는 것이 도덕적이라면 하나님이 안식하신 날에 안식하는 것도 도덕적일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기념을 주간의 다른 날로 옮긴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고 제정하신 것을 옮기는 것이다. 제칠일을 지키는 것이 예식적인 것이라면 그렇다면 어찌하여 7일 중 한 날을 지키는 것은 도덕적인 것이 되어야하는가?”39 (271.5)
 개혁 교회 복음주의 신학의(The Reformed Evangelical) 구약 신학자인 제이. 엘. 쿠울리(J. L. Koole)는 안식일을 창조 시대의 명령으로 인정하게될 때에 따르게 되는 불가피한 신학적 결론을 강조하였다. 그가 지적하는 사항을 다음과 같이 요약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모세의 율법이 생기기 이전에 여섯째 계명이 이미 구속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금도 살인이 허용되지 않고 있는 것과 똑같이 만약 안식일 계명도 모세의 율법이 제정되기 이전에 이미 시행되고 있었다면 현재의 우리에게 넷째 계명의 안식일을 배척할 자유도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40 다시 말하면, 만약 안식일이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 낙원에서 제정된 것이 사실이라면 지금의 그리스도인들도 창조의 안식일을 준수할 의무 아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272.1)
 쿠울리는 오래된 개혁교회의 전통과 청교도의 전통은 물론, 쿠이퍼(Kuyper), 기이싱크(Geesink), 바빙크(Bavink) 같은 신학자들의 관점을 배척하고 독자들에게 안식일을 창조 시대의 제도로 받아들이기 이전에 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그리고 시종일관 할 수 있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고 촉구하였다. 쿠울리는 주저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일요일을 넷째 계명이 요구하는 새로운 안식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안의 성격상 그 안식일을 마땅히 토요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이 낙원에서 제정되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쿠울리는 안식일이 창조 시대에 제정되었다는 것도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272.2)
 쿠울리는 기본적으로 예니의 입장을 쫓았다. 그는 창세기 2:2, 3을 단순히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천상적인 실재에 관한 모세의 환상으로 이해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안식일로 하나님의 안식의 상징과 표징을 삼았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안식일은 인간의 안식과 하나님의 안식의 진정한 만남인 성례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에게 안식일 안식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 속에 이미 나타난 은혜의 안식의 표징이며 또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해방의 기념이었으며(신 5:15), 따라서 구원의 표징이기도 했다. (272.3)
 쿠울리는 출애굽기 20:8-11에 나타난 넷째 계명 안에 있는 안식일의 기초를 무시하고 안식일을 철저히 이스라엘이 이집트로 구원받은 은혜의 기념일(신 5:15)로만 간주하였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여행하던 기간에 처음으로 제정되었다(출애굽기 16장)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과 이스라엘의 출애굽 구원을 비교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내신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이스라엘을 구원해내신 하나님의 행위보다 더 위대하다고 결론했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일요일이 안식일보다 더 우선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일요일은 안식일이 아니며 안식일이 될 수 없으며 또 넷째 계명의 성취도 아니라는 것이다. (272.4)
 화란에 있는 개혁교회의 목사인 피. 비셀(P. Visser)도 쿠울리의 안식일과 일요일 신학에 기본적으로 일치하는 주장을 내놓았고 또다른 학자인 알. 제이. 반데르빈(R. J. Vanderveen)은 모든 일요일 신학의 정당성까지 부정하였다.41 (273.1)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은 비록 복음주의 신학자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이들에 대한 그의 영향이 지대한 만큼 예수와 안식일에 대한 그의 주석적인 논평의 일부를 여기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쿨만은 그의「신약 성경의 기독론」(The Christology of the New Testament)에서 예수님이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하신 마가복음 2:28의 말씀이 예수께서 사람을 안식일의 준수로부터 해방해주기 위해 오셨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쿨만은 마가복음 2:27, 28 뒤에 있는 “바르나샤”(barnasha)라는 아람어 표현에 기초하여 예수께서 일반적인 의미의 인간이 이제 안식일의 주인이 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선언했었을 가능성을 인정했다. 마가가 분명히 이해했듯이 예수님이 “인자(사람의 아들)”란 표현을 배타적으로 자기 자신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했을 경우에는 예수께서 그가 모든 안식일 준수를 폐기하기 위하여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왔음을 선언하셨다는 것이다. 쿨만은 이것과 똑같은 의도가 요한복음 5:17“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하신 말씀에 좀더 분명하게 표현되었다고 보았다. 즉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기독론적 근거를 제공하셨다”는 것이다.42 (273.2)
 사실상 그는 요한복음 5:17에서 예수께서 “이제까지”라 하신 말씀은 “공동체의 안식의 새 날, 즉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인 헤메라 투 쿠리우”(ήμερα του Κυριου, 주의 날)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까지 말했다. 그는 요한 계시록 1:10에 나오는 “주의 날”을 간단하게 일요일과 동일시하여 아무런 역사적 증거도 없이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즉 “사실상 그의 시대에 요한계시록 1:10에서 쿠리아케 헤메라(Κμριακή ήμερα:주의 날)로 불려진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은 이미 기독교회에서 전반적으로 기념되고 있었다”고 하였다.43 (273.3)
 그러나 쿨만은 바르트 처럼 일요일의 기념이 기본적으로 넷째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요한복음 5:17에서 “이제까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의 안식일 계명에 대한 “불순종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하였다.44 (273.4)
 캘리포니아의 파사디나에 위치하고 있는 풀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의 조직 신학 교수인 폴 케이. 즈위트(Paul K. Jewett)는 그의「주의 날: 기독교 예배일에 대한 신학적 안내」(The Lord’s Day:A Theological Guide to the Christian Day of Worship)에서 전면적인 안식일 신학을 발표하였다. 즈위트는 기본적으로 로르도르프(Rodorf), 예니(Jenni), 쿨만(Cullmann)의 입장을 발전시켰으나 다소 그것을 수정하여 자신의 해석으로 내놓았다. 그는 말하기를 안식일은 출애굽기 16장에서 모세와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따라서 안식일은 창조 시대의 제도가 아니라 “유대의 안식일”일 뿐이라 하였다. “독실한 유대인이었던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켰으며” 따라서 그는 “안식일제도 자체는 배척하지 않았고 단지 안식일 준수에 관련된 장로들의 전통을 배척하였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즈위트가 이러한 주장으로 부터 이끌어낸 결론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이같은 태도는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스승이 그들에게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도록 요구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논평하기도 하였다. “예수님 자신의 권위나 가르침이 없이 단지 부활의 사실만으로 (안식일을 일요일로 바꾸는) 이러한 변화가 가능하였다고 믿기는 어렵다.”45 (27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