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2 부 안식일과 거룩 제 10 장  안식일 계명과 우상숭배
 구원의 산으로 도망하는 행위는 성소를 정결케 하는 행위이다. 언약을 새롭게 하는 행위이다. 안식일 개혁운동은 성소에서 우상을 치워내고 하나님을 제자리로 모시는 성소 정결 운동이다. 이것이 다니엘 8장 14절이 암시하는 성소 정결 사업이다. 예수님의 사업이고 우리가 동참하는 사업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시작하시고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사업이다. 하늘 지성소에서 응하고 땅에 사는 사람들의 심령에서 응하는 사업이다. (248.3)
 예수님께서 지상 봉사기간 중에 가장 감정적인 모습을 내보인 사건도 성소 정결의 모습이셨다.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들을 쫓아내고 둘러엎는”(막 11:15-17) 일에서였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들러 엎으시며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지 아니하시었던 것이다”(막 11:15, 16). (249.1)
 여기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성소를 더럽힌 우상들은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이며, “돈 바꾸는 자들의 탁상”이며,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들이다. 역사적으로 성소를 정결케 하는 운동은 자주 교회의 거룩한 공간과 직책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쫓아내고 “돈 바꾸는 자들의 탁상”“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들”을 둘러엎는 일이었다. 요시아왕의 성소 정결 운동이 그랬고, 17세기 영국 청교도들의 성소 정결 운동이 그랬다. 19세기 재림운동의 성소 정결 사업이 그랬다. “기록된바 만인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와 직책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기”(막 11:17) 때문이다. 그 자리와 그 직책에 하나님의 언약궤와 하나님의 보좌와 하나님의 제단과 하나님을 모셔 놓아야 하고,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집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무나 강도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249.2)
 그리고 하나님의 성소의 정결 운동은 언제나 안식일 언약의 재건운동이었다. 회개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바로 세우고 그 언약에 헌신을 다짐하는 운동이었다. 하나님이 미워하고 가증히 여기는 우상을 내쫓고 둘러엎어 하나님을 창조주와 아버지와 신랑의 자리로 모시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부이며 아들이며 딸이며 백성인 이스라엘이 우상을 좇아 광야를 배회하던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신부의 자리로,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돌아가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 운동이 19세기 재림 운동이다. 19세기 재림 신자들의 성소 정결 운동이다. 19세기 재림 신자들의 안식일 재건 운동이다. (249.3)
 그러나 역사적인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은 번번이 하나님과의 거룩한 안식일 언약에 충실하지도 못했고, 회개하여 우상을 내쫓는 성소 정결 운동에 헌신하지도 못했다. 아!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처녀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고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것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진노하시는 날에 그 발등상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애 2:1).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 하였으므로 불결한 자같이 되니 전에 높이던 모든 자가 그 적신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저가 탄식하며 물러가도다. 저의 더러움이 그 치마에 있으나 결국을 생각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게 낮아져도 위로할 자가 없도다”(애 1:8, 9). “본래는 열국 중의 크던 자가 과부같이 되었고”(사 11:1) 하나님의 존귀한 아들이 “아비 없는 고아같이 되었도다”(애 5:4).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다”(애 1:2). “처녀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 . 궁박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생각함이여. . . 대적의 손에 빠지나 돕는 자 없고 대적은 보고 그 황량함을 비웃는도다”(애 1:6, 7). (2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