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I 부 왕의 선포 (4:17-16:20) 6. 왕에 대한 반응들 (11:1-13:58)
 예수의 논증은 12:6-8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거기서 그는 자신이 성전과 그 봉사보다 더 크다고 주장하시며, 그같이 하여(3-5절에서 입증된 바대로) 안식일보다 더 큰 분이라고 주장하신다(6절). 사실상, 그는 안식일의 주이다(8절). 안식일은 주의 날이다. 그리고 그는 그 날이 어떻게 지켜져야 마땅한지 아신다. 그 지식에 비추어,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자비”(호 6:6을 인용한 것임)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개발해 낸 인간적 규칙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오경(五經)에서 그가 명령하신 예전들의 정확성보다도 더 낫다고 잘라 말씀하신다(12:7). (160.2)
 자비가 예전적인 정밀성보다 더 우월하다는 이유에서, 제자들이 밀 이삭을 먹는 것은 허용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의 요점을 명명백백히 하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비난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안식일에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다(13절). 랍비들은 인간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을 경우에는 안식일에도 치료를 허용하였지만(호 8:6), 한편 마른 손은 거의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이 아니었다. 예수의 요점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12절)는 것이다. 마가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라고 예수의 말씀을 인용하여 안식일과 여타 모든 다른 거룩한 율법을 균형진 시각에서 보게 만든다. (160.3)
 율법이 인간적 참작과 자비보다 더 위에 놓여지는 것이 모든 율법주의의 특징이다. 그러나 산상설교에서처럼,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율법의 영적인 본질들을 보도록 도우시고자, 그것이 올바르게 이해되려면 아가페(사랑)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이 보도록 도와주고자 하신다. (161.1)
 불행히도 유대인들은 율법을 참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 결과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 기초가 아가페(agapē)에 있다고 지적하실 때 그들은 “어떻게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였다(12:14). (161.2)
 그것이 율법주의의 역설(逆說)이다. 하나님과 그의 율법을 사랑한다는 소문이 자자한 율법주의자들은 그들의 특정 신학적 해석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에 대하여 노하게 된다. 너무도 노하게 된 나머지 그들은 서슴없이 그들의 대적자들을 살해하거나 그들의 명망을 무참히 짓밟아 버린다. 예수에 따르면 이런 분노는 실제적으로 살인과 다름없다(5:21-26). (161.3)
 오랫동안 교인 생활을 해본 사람은 누구나 바리새주의의 정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견해의 차이를 놓고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고 비평하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20세기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건재하다. 실로, 대부분의 교회들 내에는 바리새인들의 파견대가 있다. 더욱 더 나쁜 것은, 의심하지 않는 교회와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하지 않는 세상에 그 정신을 강요하려고 애쓰는 바리새인이 바로 우리 자신들 내부에 있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비가 제사보다 낫고 아가페(agapē)가 하나님의 율법의 핵심이라는 것을 날마다 기억할 필요가 있다. (161.4)
 마태는 12:22의 바알세불 이야기에서 바리새인들과 예수의 갈등 문제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12장의 안식일 쟁론과 그 후의 투쟁들 사이에 그는 자신의 구약 인용 가운데 가장 긴 인용구(18-21절)를 끼워 넣고 있다. 그는 유대인들이 메시야적 예언으로 보아온 이사야 42:1-4를 인용한다. 마태는 이사야서에서 이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여러 가지 목적을 달성한다. 첫째, 그는 예수의 신원을, 예언된 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메시야적 종으로 증명해 준다(18절). 그 종에 대한 그러한 사랑의 표현은 마태의 독자들의 마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는 그의 표현을 생각나게 해준다. 그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 표현을 두 번 되풀이한다. 한번은 예수의 침례 때(3:17)에, 다른 한번은 그가 변형(變形)되셨을 때이다(17:5). 예수의 유일 무이한 신원과 정체는 마태복음의 표면에서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161.5)
 이사야서 인용이 가져다주는 두 번째 공헌은 그 구절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 아래서 활동하고 계시다고 확인해 주는 것이다(18절). 이것은 예수께서 “귀신의 왕”(24절)의 영향 아래서 활동하시고 계시다고 바리새인이 비난하고 있는 12:22-37의 사건들을 위하여 준비시킨다. (162.1)
 셋째, 이사야서 인용은 메시야적 사명의 전세계적인 측면을 두 번이나 강화시킨다.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리고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21절). 마태는 그의 주제들을 깊이 각인시킬 기회를 거의 잃어버리지 않는다. 유대인들의 메시야 배척과 이방인들의 받아들임 사이의 긴장은 첫 복음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마태는 그의 유대인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며, 그들이 예수께 긍정적으로 반응하기를 몹시 원하고 있지만, 그는 거듭거듭 유대인 자신의 성경으로부터,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범위 밖에 있지 않으며, 그는 유대 백성들 밖에서부터도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일으키실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3:9). (162.2)
 마태가 유대인들이 예수께 긍정적으로 반응하기를 갈망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정반대의 경우가 너무도 흔히 사실이라는 것을 보도하지 않을 수 없다. 12:24에서 그는 바리새인들의 예수 배척이라는 그 장의 주제로 돌아간다. (162.3)
 그 다음 번 배척 이야기는 바엘세불 이야기이다(12:22-37). 그 이야기는 예수께서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치실 때 시작된다. 유대인 지도자들을 소스라치게 놀라게 한 것은 백성들이 그 이적에 너무도 열광한 나머지 혹시 예수가 “다윗의 자손”(23절) 즉 메시야가 아닐까 하고 큰 소리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162.4)
 좌절에 빠진 바리새인들은 그 기적의 실재를 부인할 도리가 없었지만,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께로서 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는 있다. 그들의 해법은 예수께서 “귀신의 왕”(24절)과 결탁되어 있다는 것이다. (162.5)
 예수께서는 만일 그가 마귀의 힘을 빌어서 치료를 하고 계셨다면, 그렇다면 사단의 왕국은 분열될 것이며 멸망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심으로써 즉시 공세를 취하셨다(25-28절). 그와는 반대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마귀의 가장 큰 원수라고 주장하신다. 그는 자신을, 강한 자의 집을 늑탈하기 위하여 그를 결박하는 도적에 비유하신다(29절). 달리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출하시기 위해 “이 세상 신”(요 12:31; 14:30; 16:11)의 영토를 침공하셨다. (163.1)
 바알세불 이야기에서의 대결의 절정은 12:30-32에서 온다.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선과 악의 큰 투쟁에서 중립(中立)이란 있을 수 없다고 그의 청중들에게 경고하실 뿐 아니라 그는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일을 마귀에게 돌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했다고 말씀하신다(31절). 백성들이 아들을 대적하는 말을 하고도 여전히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 기술적으로 사실인 반면에, 만일 그들이 예수가 메시야라는 성령의 깨우치심 아래 있는 상황에서 그렇게 한다면 용서를 받을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과 심령에서 성령의 자극과 깨우치심을 배척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도록 이끌고 계시는 성령의 사역에 더 이상 반응할 수 없는, 강퍅하게 된 양심을 갖게 될 것이다(딤전 4:2; 딛 1:15). 이런 배척자들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접근하실 수 있는 범위 너머에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접근하실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어 버리면 그들은 희망이 없다. 그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이다. (163.2)
 예민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혹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이 아닌지 염려한다. 그들이 염려한다는 사실 바로 그 자체는 그들이 여전히 성령의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고 그에게 반응하기를 갈망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프레더릭 브루너(Frederick Bruner)는 다음과 같이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하고 있다: “성령을 거역하는 죄의 정신은 염려함이 없는 철석같이 굳어버림이다. 그것은 불신앙이요, 회개하기를 꺼리는 것이다.... 그것은 부주의한 행동들이 아니라 강퍅해진 상태이다”(Bruner, 1:462). (163.3)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백성들의 참된 상태는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로 알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신다(12:33-37). 이런 진리는 그들의 입술로, 예수의 행동들이 하나님에게서가 아닌, 마귀에 의해 유발된 것이라는 견해를 최근 제시한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는 큰 흉조(凶兆)이다. 만일 그들이 이런 노선을 계속 걷는다면, 그들은 결국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할 것이라고 12:22-37은 암시한다. (164.1)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이의 바알세불 대결에 뒤이어 즉시 그들이 “표적”(38절)을 요구하는 이야기가 뒤따른다. 그 문맥을 고려치 않고 읽는다면, 독자들은 이것이 진심어린 요구라는 인상을 받기가 쉽다. 그러나 8장에서 12장은 바리새인들이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가리켜 준다. 그들은 많은 기적들을 보았으면서도 그것들을 예수께서 마귀와 협동한 결과로 이루어진 것으로 치부해 버렸다(12:24). (164.2)
 그 결과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39절)로 부르심으로써 다시 공세를 취하신다. 그들은 오로지 한 가지 표적—물고기 속에서 3일을 지냈던 요나의 표적—만을 얻을 것이다.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예수께서는 “밤낮 사흘을 땅 속”(40절)에서 보내실 것이다. 이 말씀의 요점은 예수께서 단 3일 동안만 땅 속에서 지내실 것이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후일 이 진술들을 상기해낼 것이다. 이것은 그의 부활에 대한 예수의 첫 번째 예언이다. (164.3)
 이 대결의 이 시점에서,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두 가지 측면에서 유대인들을 경고하신다. 첫째, 11:20-24를 회고하시면서, 그는 니느웨와 스바 여왕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배우기를 바라셨던 교훈들을 배웠지만, 유대인들은 배우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고 논하신다(12:41, 42). 둘째, 예수께서는 부정적인 종교는 충분치 못하다고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다. 율법에 대한 그들의 접근에서 그들이 확인해 낸 온갖 악들로부터 떠나있다손 치더라도 동시에 그들이 그들의 생애를 그 왕국의 긍정적인 원칙들로 가득 채우지 않는 한 그것들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 외에도, 그 구절의 문맥에서 볼 때, 바리새인들은 예수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대하여 회개하고 그들의 생애를 그가 제공하시려고 하시는 것으로 채워야 할 필요가 있다. 심지어 바리새인들도 구주와, 자비에 기초된 긍정적인 종교를 필요로 한다(43-45절). (164.4)
 그러나 예수께서는 약간 방향을 바꾸시면서, 그와 그의 왕국의 원리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것을 그렇게 쉽게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자기 자신의 생애는 천국의 원리들을 생애에 실천하고 가르치는 일은 배척을 당하도록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왔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그와 같은 것이다. (16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