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제 2부—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과 일요일 제7장—초대 기독교와 일요일 준수의 기원1
 그러나 유세비우스의 설명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진술의 모순성과 부정확성을 어렵지 않게 지적할 수가 있다. 예컨데 유세비우스는 서슴없이 부활절 일요일을 사도적 전통이라고 고집하면서도 니산월 14일의 유월절을 “옛 전통”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비록 그 날짜는 다르지만 14일 교도들까지도 기념하고 있는 유월절을 분명히 “부활의 신비”라고 정의하고 있다.32 그는 당시 유월절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절기로 지켜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시대 착오적인 진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유세비우스의 이러한 진술은 그가 로마의 감독 빅토르의 요구로 198년에 소집되었던 팔레스틴 총회에서 결의된 “교회법”을 요약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교회법에는 “주님의 부활의 신비”가 다른 날 말고 오직 주일인 일요일에만 기념되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추측에 기초하여 “부활의 신비”가 이전에는 일요일이 아닌 다른 날에 기념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으니 대단히 잘못된 추측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앞에서 보았듯이 부활절 일요일과 14일 교도의 전통에 대한 최초의 언급들은 하나같이 유월절이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날로 기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데 테르툴리아누스(160-225)는 “주님의 유월절”“주님의 수난”이라고 표현하고 있다.33 이것이 당시의 지배적인 관점이었다는 것은 오리게네스(Origenes)가 초대교회가 유월절의 뜻을 “고난”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는 현상을 논박하기 위해서 “건너다”란 뜻의 히브리어 단어 페사(pesha)의 어원학적 의미에 호소한 사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34 (142.1)
 유세비우스의 편견은 14일 교도의 유월절 기원을 다룰 때 더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그는 폴리크라테스와 이레나이우스의 중요한 두 서한을 소개하면서 매번 14일 교도의 전통을 “사도적 전통”이 아니라 “오래된 관습”“고대의 관습”으로 소개하였다.35 그는 “사도적 전통”이라는 표현을 부활절 일요일을 지칭할 때만 차별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유세비우스가 두 번씩이나 인용했던 앞의 문서들 자체가 부활절 일요일의 사도적 기원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 반면 오히려 14일 교도의 유월절 제도가 사도들에 의해 기원한 제도라고 주장하고 있다.36 (142.2)
 부활절 일요일의 사도적 기원을 옹호하고 있는 유세비우스는 부활절 일요일의 사도적 기원에 보탬이 될 만하다고 생각되는 문서라면 무엇이든지 인용하였다. 그런데 유세비우스가 부활절 일요일을 주장하기 위해서 인용하고 있는 이레나이우스의 서한은 부활절 일요일이 사도시대에 기원했다고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일요일 예배가 2세기 초반에 기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서한에서 이레나이우스는 로마 감독 빅토르를 향하여 로마의 감독들 중에 부활절 일요일을 지키면서도 니산 14일을 유월절로 지키는 소아시아의 교회들과 화목하게 지냈던 “아니케투스”(Anicetus), 피우스(Pius), 히기누스(Hyginus), 텔레포루스(Telephorus), 식스투스(Sixtus) 같은 전임자들을 본받으라고 호소하였다. 이레나이우스는 식스투스(116-126)를 니산 14일 유월절을 지키지 않은 최초의 로마 감독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 언급을 토대로 하여 부활절 일요일이 로마에서 기념되기 시작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37 (142.3)
 식스투스 시대에 즈음해서 부활절 일요일이 로마교회에서 기원했다는 추측은 부활절 논쟁이 예루살렘으로부터 “할례받은 감독들이 추방당한 때 이후에 일어났다”고 한 에피파니우스(Epiphanius)의 주장에서도 확인되고 있다.38 이같은 추방령은 AD 135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제2차 유대 반란을 분쇄한 다음에 내린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황제는 유대의 관습과 종교의식에 대해 가혹한 탄압 정책을 채택했다. 로마의 감독 식스투스는 이같은 탄압 조치를 벗어나기 위하여 매주의 안식일과 매년의 유월절과 같은 특징적인 유대교 절기를 매주의 일요일과 매년의 부활절 일요일로 교체시키는 절차를 밟았을 것이다. 몇 년후 유대계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을 대신하여 예루살렘교회를 지도하게 된 희랍계의 새로운 지도자들이 부활절 일요일을 예루살렘교회에 도입하려 했을 때 이러한 변화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예루살렘 교인들은 이러한 시도에 대해 강력히 저항하였다. (143.1)
 부활절 일요일의 엄밀한 기원 연대는 아직도 확실치 않지만 부활절 일요일의 발생지가 로마교회라는 사실은 학자들로부터 널리 수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로마의 부활절”이라는 이름까지 발생하였다.39 로마교회가 부활절 일요일의 진원지라는 사실은 모든 감독들에게 보낸 니케아 총회의 공한과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인 서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 문서들에서 로마교회는 부활절 일요일을 정착시키고 신장시키는 첫 번째의 본보기로 제시되고 있다. 로마교회의 역사적 위상 못지 않게 로마교회가 부활절 일요일 준수를 위해 노력해온 그 역할 때문이었을 것이다. (143.2)
 부활절 일요일의 파급. 무엇이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니산월 14일의 유월절을 버리고 부활절 일요일을 채택하게 하였는가? 안식일을 포기하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과 그들의 종교적 관습으로부터 분리하여 나오기 위해 채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가피한 조처였는가? 많은 학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14일 유월절을 포기하고 부활절 일요일을 채택한 중요한 요인으로서 유대인과 유대교로부터 갈라서려는 그들의 의도를 꼽는다. 그리스도인들의 “반 유대적인 감정”은 170년경에 멜리토가 남긴 유월절 설교에서도 잘나타나고 있다. 이 설교는 다음과 같이 “유대인들에 의한 그리스도의 살해”란 관점에서 유월절을 해석하고 있다. 유대인들 “너희는 이 사람을 큰 절기의 때에 죽였다. 하나님이 살해 되었다. 이스라엘의 왕이 이스라엘의 오른손에 죽임을 당했다. 오 무서운 살인이여 유례없는 불의여.”40 이와 비슷한 반(反) 유대적 적대감은 3세기 초반에 나온 12사도의 교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12사도의 교훈은 “우리 형제들(즉 유대인들)이 불순종하여∙∙∙ 그 백성들이 그 날에 우리의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자살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절 금요일과 토요일에 금식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41 (143.3)
 이 문서들과 그 밖의 다른 문서들은 14일 유월절과 부활절 일요일의 신학에 다같이 반(反)유대적 감정이 개입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상 처음부터 14일 유월절 전통과 부활절 일요일의 전통 사이에는 별다른 신학적 차이를 찾아볼 수 없다. 이 두 전통 모두에서 유월절의 준수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금식과 축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의 유월절 논쟁은 유월절의 신학적인 의미를 둘러싼 것이 아니라 금식 기간의 길이와 축제의 날짜에 관한 것이었다. 이 두 전통은 다같이 반(反) 유대적 적대 감정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기독교 역사의 초기에는 각기 다른 두 전통의 지지자들 사이에 원만한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유대인 유월절의 다음 날인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킨 그리스도인들이 니산월 14일에 유월절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유대인들과의 단절과 차별화를 이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요인이 부활절 일요일 신앙의 확산에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144.1)
 2세기 후반에 이르러 부활절 일요일의 전통이 확산되자 14일 유월절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과 부활절 일요일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었던 우호적인 관계도 끝나게 되었다. 14일 교도들은 유대인의 날짜에 따라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였기 때문에 유월절을 지키는 방식에 있어서도 유대적인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용이하였다. 히에라폴리스의 감독아폴리나리스(Appollinaris)는 160년경에 남긴 증언에서 일부 14일 교도들이 자신들의 “무지로 말미암아 주님이 14일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양을 먹었고 그 큰 무교절의 날(니산15일)에 수난을 당했다는 주장으로 교회 안에 분란을 일으켰다”고 하였다.42 이 급진적인 14일 교도들은 유대인들이 지키는 날짜에 유대인들이 지키는 방법으로 즉 니산월 14일에 유월절 양을 먹음으로써 구약의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14일 교도들은 주장하기를 그리스도인은 14일 유월절에 마땅히 유대인의 유월절 연회를 기념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해야 한다고 하였다.43 (144.2)
 이 논쟁은 시간과 함께 아시아의 경계 넘어 로마 제국의 다른 지역들에까지 확대되어 갔다. 3세기 초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로마의 히폴리투스는 자신들의 교구에서까지 14일 교도들의 지지자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급진적인 14일 교도들에 대하여 비판하는 글을 썼다.44 180년경에는 로마교회의 장로 블라스투스(Blastus)가 한 분파 집단의 지도자가 되어 14일 교도들의 주장을 옹호하였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주장에 따르면 블라스투스는 부활절을 지키고자 할 때 모세의 율법에 분부된 제 14일 이외의 다른 날에 지켜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45 로마의 감독 빅토르(189-198)는 이처럼 로마교회에 침투하고 있는 14일 교도들을 성공적으로 근절시키기 위해서는 아시아 교회들 안에 강력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14일 유월절 전통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144.3)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빅토르는 아시아의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의 감독들에게까지 교회 총회를 소집하여 그들의 교구에 부활절 일요일의 신앙을 일반화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빅토르의 이와같은 호소는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여러 곳에서 교회 총회가 소집되었고 그 대부분이 로마의 부활절을 지지하는 결정을 채택하였다. 이처럼 이 때에 아시아 지역에서 로마의 부활절을 광법위하게 수용하게 한 배경에는 로마의 감독인 빅토르의 위세가 크게 작용하였지만 그 외에도 최소한 두 가지의 요인들이 작용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145.1)
 첫째로 지적할 수 있는 요인은 당시 아시아에 유대인식의 날짜 계산으로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고 고집할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방식으로 유월절 양을 먹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급진적인 14일 교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 무리들은 아시아에서 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리아교회나 로마교회에서까지도 크게 분란을 야기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여러 감독들은 유월절의 기념일을 유대인의 절기인 니산월 14일로부터 그 다음 날인 일요일로 옮긴다면 그리스도인 신앙이 유대화하는 경향을 효과적으로 방지할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둘째 요인으로는 그리스도의 부활 신학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부활절 일요일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부활절 일요일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실제로 그 사건이 발생한 그 날들에 기념하는 것이 좋다는 인식을 불러일으키게 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요인은 그 당시에 대량으로 나타난 반(反) 유대적 문헌들에 의하여 입증되고 있듯이 그리스도 교회와 유대 회당 사이의 넓어져 가는 간격이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과 그들의 특징적인 절기인 안식일과 유월절로부터 등을 돌리도록 부주겼다는 사실이다. (145.2)
 로마교회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안식일을 저버리고 대신에 일요일을 지키도록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던 사실들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로마교회는 유대인의 유월절을 포기하고 부활절 일요일을 수용하도록 하기 위하여 만월일(The day of full moon)이 항상 춘분 이후에 떨어지도록 하고 부활절 일요일이 유대인들의 유월절과 겹쳐지지 않도록 고안된 새로운 역산법(磨算法)을 도입하였다. 새 역산법이 내포하고 있는 반(反) 유대적 동기는 키프리아누스가 243년에 쓴 유월절의 계산에 대하여란 논문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 논문은 히폴리투스가 222년경에 편찬한 로마의 부활절 일람표에 들어있는 착오들을 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키프리아누스는 늘 새 계산법을 소개할 때마다 논문의 서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의 유월절 계산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우리는 신령한 학문을 사랑하며 그 학문에 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사항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한 때라도 마치 어떤 날이 유월절인지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처럼 유대인들을 쫓아 맹목과 어리석음 가운데서 행하거나 진리로부터 떠나 방황해야 할 필요가 없다.”46 (145.3)
 14일 유월절을 배척하려는 반(反)유대적 동기는 그 때로부터 거의 1세기가 지난 콘스탄티누스의 니케아 총회의 서한에서도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 서한에서 황제는 촉구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밉쌀스러운 유대인들과 공유하는 것이 하나도 없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고 “모두가 하나같이 단결하여 유대인들의 위증적 범죄 행동에 참가하는 일을 전적으로 피하기 위하여” 로마 교회가 옹호하고 있는 부활절 일요일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여야 한다고 하였다.47 (146.1)
 로마 교회의 특별한 위상이 일요일 주일 제도의 수립에 끼친 영향. AD 2세기의 로마교회는 일요일 주일이나 부활절 일요일 같은 새로운 절기를 세계 교회에 도입하고 정착시킬만한 충분한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는가? 역사적인 자료들에 의하면 당시의 로마교회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엄청난 권위와 영향력을 전체 세계교회에 행사하고 있었다. 아래에 그 몇 가지 역사적 사례를 살펴보겠다. (146.2)
 이그나티우스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서한의 서두에서 로마 교회에 대하여 최대의 경의를 장황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가 다른 교회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사용한 경의의 표현들은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서한의 표현에 비하면 참으로 초라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48 그는 기록하기를 로마교회는 “로마제국의 수부에 위치하며 하나님께 귀중한 교회이고 명예와 축하와 찬양과 성공과 성화의 가치를 가진 교회이며 사랑으로 다스리며 그리스도의 율법을 지키며 아버지의 이름을 지닌 교회”라 하였다.49 (146.3)
 “사랑으로 다스린다”는 문구는 상당히 학구적으로 토론이 되어 왔던 중요한 주제이다. 이그나티우스는 사랑 즉 “아가페”라는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하였는데 그는 아가페의 사랑을 구현하고 있는 기독교 공동체를 지칭하여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50 트랄 교인들(Trallians)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서머나 사람들과 예베소 사람들의 사랑이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하였다(13:1). 따라서 이그나티우스가 로마교회에게 사랑의 지위(율법의 지위가 아니고)가 있다고 주장한 것은 로마교회가 다른 교회들의 안녕과 복지에 대해 주도적인 관심을 가진 교회라는 뜻이었다. 다른 교회들의 복지에 대한 로마교회의 관심에 대해서는 고린도교회의 감독 디오니시우스가 로마의 감독 소테르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51 기독교 역사가 불행하게 된 것은 로마교회의 시작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로마교회의 불행은 그 교회의 초기 역사에서는 사랑의 직책으로 봉사했었던 로마교회가 그 이후의 역사에서 점점 온유와 겸손과 사랑의 정신을 상실하고 대신에 법률적인 주장에 기초를 둔 법률의 머리로 전체 세계교회에게 행세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중세교회의 가짜 이시돌 법령집들(pseudo-Isidorian Decretals)은 로마교회가 교황권의 수장권(popal supremacy)을 옹호하기 위하여 사용한 법률적인 문서들이다. (146.4)
 이그나티우스가 로마교회의 사랑의 직책을 인정한 사실은 그가 자신이 책임지고 있던 안디옥 교회의 고아와 같은 처지를 벗어나기 위하여 로마교회의 도움을 간청한 부분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호소하기를 “여러분들의 기도에서 시리아교회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 교회는 이 사람 대신에 하나님을 그들의 목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러분들의 사랑과 합하여 그 교회를 감찰하실 것입니다”(9:1)라고 하였다. 이그타니우스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있는 그의 안디옥 교회를 위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아시아의 교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그 대신에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이그나티우스 자신이 개인적으로 친분 관계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던 로마교회의 사람들에게 호소한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그나티우스는 로마교회에게 전체 세계교회를 위해 목자 같은 지도자의 역할을 기대했던 것이다. (146.5)
 리용의 감독 이레나이우스(Irenaeus)도 그의 이단 반박론에서 이단들을 반박하기 위하여 “저 영광스러운 두 사도 곧 베드로와 바울에 의하여 설립되고 조직된, 그리고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오래되었으며 전체 세계에 알려진” 로마교회에 의하여 특별한 방법으로 보존되어 내려온 사도적 전통에 호소하였다. 왜냐하면 각처에 있는 교회들에 의해서도 사도적 전통이 계속적으로 보존되어 왔으나 “로마교회는 월등한 우월성(potentior principalitas)을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교회들은 로마교회의 전통에 일치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52 이 진술 속에는 분명히 몇 가지 부정확한 사실들이 주장되었다. 로마교회는 예루살렘교회보다 늦게 설립되었으므로 분명히 “가장 오래된”(antiguissi-ma) 교회가 아니었다. 또 로마교회는 바울에 의해 창립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로마교회의 “월등한 우월성”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런 전설적인 주장들이 로마교회에 의해 발전되었던 것이다. (147.1)
 로마교회의 권위에 대한 현저한 본보기의 하나는 로마의 감독 빅토르가 다른 지역의 교회들에게 부활절 일요일의 채택을 강요하기 위하여 취한 조치들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로마의 감독 빅토르는 다른 지방에도 부활절 일요일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해당지역 교회들에게 지방 총회를 소집토록 요구하였다(196년경). 이 때에 이전에 로마의 부활절을 반대했던 아시아 교회의 감독들까지도 빅토르의 요구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로마의 감독 빅토르를 예우했기 때문이었을까? 폴리크라테스(Polycrates)의 “나는 겁주는 말로 겁먹지 않는다”고 한 항의야말로 그 당시 빅토르가 아시아의 감독들에게 로마의 부활절을 수용하도록 압력을 가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53 이것은 아시아 교회의 감독들이 부활절 일요일의 채택을 거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빅토르가 취한 단호한 조치에 의해서 잘 입증되고 있다. 빅토르는 아시아의 감독들에게 “편지들을 보내어 그 곳의 형제들에게 전면적인 파문을 선포했던 것이다.”54 이것은 로마교회의 교리와 조직을 전체 기독교의 전통으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역사적 과정의 시초였다.55 당시 로마교회가 자신의 관습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하기 위하여 취한 징계 조치들의 역사적인 중요성은 그 동안 거의 인식되지 못했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했듯이 감독 빅토르의 조치들은 “신학적인 토론이나 철학적 사색”에 기여했다기 보다는 로마교회의 권력을 강화하고 증가시키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56 로마교회의 영향력이 중세 역사에서 나타나는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 빅토르의 감독재임 기간이었다.57 (147.2)
 위에서 언급한 여러 역사적 증거들은 로마교회가 이미 2세기에 기독교 세계의 광범위한 지역에 부활절 일요일과 매 주간의 일요일 예배 같은 새로운 관습을 보급시킬 정도의 권위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58 기독교 세계가 이같은 새로운 절기들을 채택한 배경에는 두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한쪽에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때까지 지속되왔던바 유대인들과의 친화적인 관계를 단절토록 압박한 로마제국의 반(反) 유대적인 군사, 정치, 문화상의 정책들이 작용하였고 다른 한쪽으로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처음서부터 내재해 있던 적대 관계가 작용하였다. 로마교회는 유대인들과 갈라서는 경험을 동방교회의 교인들보다 먼저 치렀던 교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또 비록 일부 교회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었으나 기독교 세계에 폭넓게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요일과 부활절 일요일을 확산시키는 일에 있어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다. 그리고 일요일 예배의 제도는 2세기 초반에 기독교 세계에 처음으로 도입된 것 같다. 이 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반 유대적인 탄압통치(135년)로 말미암아 가장 특징적인 유대절기라 할 수 있는 유월절과 안식일을 포기하고 자신들을 유대인들로부터 구별시킬 수 있었다. 로마교회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안식일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하여 신학적인 노력과 실천적인 방법을 모두 사용했다. 안식일은 유대인들의 불충을 나타내기 위한 표징으로 유대인들에게 부과된 모세의 율법이라고 악평되었는가 하면 그리스도인은 유대인들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안식일에는 금식하는 일 이외의 어떤 종교행사도 치르지 말아야 한다고 교육받았던 것이다. (14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