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나타난 구원 제 4 장 시편의 신학적 구조
 야훼를 세상의 창조주로 아는 이스라엘의 신앙은 열방 제국의 구원자요 심판자이신 그분의 업적을 모두 찬양하는 근거가 된다(시 50, 74, 83, 95편). 오직 창조주만이 구원과 심판의 능력을 지니셨으므로 “열방의 모든 신들은 우상” 이며 결국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만다. (85.3)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宣播)할지어다”
(시 96:2)
(86.1)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시 96: 4, 5)
(86.2)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시 96:9)
(86.3)
 소위 자연 시(nature psalms)에서는 이스라엘의 시인이 천연계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행위와 지탱하시는 능력의 빛 가운데서 보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일상 하는 것처럼 막연히 가 내린다. 이 온다. 천둥 이 친다 등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다. (86.4)
 시편 29편에서는 뇌성을 발하시는 것이 영광의 하나님이요 삼나무를 부러뜨리고 번개를 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목소리이다. 시편 104편은 천연계의 법칙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탱하시는 능력과 행동화된 간섭을 강조하고 있다. (86.5)
“저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저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시 104:13, 14)
(86.6)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 나오나이다”
(시 104:20)
(87.1)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
(시 104:24)
(87.2)
 이것이 원시적인 낡아빠진 시대의 생각일까? 이 모든 것이, 천연계의 법칙은 자동적으로 규제되어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피조물을 유지시키기 위한 통로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고지하는 오늘을 위한 시기 적절한 기별인가? 시편은 범신론이나 무신론, 자연신론이나 물질주의와 반대로 자신의 피조물 위에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초월 능력을 일시에 가르쳐 준다. 이 창조를 인 정하는 것이 신뢰받은 존재요.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고 하나님 대신 지상을 통치하도록 위임받은 자로서의 자신을 아는 것이다(시 8편). 신약은 창조주요 주관하시는 자이신 그분의 본체와 성품, 그리고 인간을 그의 고귀한 근원과 소명으로 회복시키시는 그분의 계획을 보다 확실히 드러내 준다(히 1:1~3). (87.3)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그들의 철학
 위대한 역사 시편(77, 78, 105, 106, 107, 136편)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과거를 하나님의 평가하시는 빛 가운데서 보기 시작했다. 이 노래들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기적같은 기원과 하나님이 과거에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셨던 방법을 상기시켜 주며 또한 당신의 백성들의 마음속에 이방 세계로의 독특한 선교 사명을 회복시켜 주도록 의도 되었다. 구약의 나머지 부분들은 시편에 대한 풍요한 주석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한다. 애가와 감사의 찬미에서 이스라엘은 그 구원의 역사와 이 노래들과의 분리할 수 없는 관계를 입증해 준다. 애통과 찬미는 결코 당대의 역사 사건의 실체와 분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많은 시편에 붙여진 표제—비록 나중에 첨가되긴 했지만—또한 그들의 기본 문맥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고려되어야만 한다. 크라우스(H. J. Kraus)는 “이 모든 표제 붙은 시들은 이스라엘 역사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는 가운데 읽혀지고 이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특별히 “다윗의 시” 들은 다윗의 생애에 올바른 역사 사건과 관련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는 그의 통치 기간 중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구원의 왕이신 “위대한 다윗” 을 대표했었다. (88.1)
 어떤 학자는 몇몇 표제에서 유래한 역사 재구성의 목록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88.2)
시편 30편은 성전 봉헌과 재봉헌을 경축하는 연례 축제시 불리어지도록 지정되었다. 92편은 안식일 예배 시 사용되었다. 100편은 우리가 예레미야 33장 11절 “여호와의 집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 하심이 영원함이로다”에서 보듯이 감사의 예물이 수 반되었다. 38편70편레위기 24장 7절에서 읽듯이 “기념물로 화제를 삼도록” 정해졌다. 120편부터 134편 까지의 열 다섯 편의 시는 여호와의 집으로 올라가면서 부르도록 지정되었다. 4
(89.1)
 화잇 부인은 몇몇 역사 시에 담긴 의미에 감동을 받고 이렇게 기록하였다. (89.2)
 시편 105편106편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경험은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특별히 배워야 할 경고의 가르침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이 시들이 최소한 일 주일에 한 번씩은 읽혀지도록 권한다.5 (89.3)
 이와 같은 충고는 고린도 교회에게 애굽에서 약속의 땅 까지의 이스라엘의 방랑 생활을 거울 삼도록 강권했을 때의 바울의 교훈과 일치한다. (89.4)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1). (89.5)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는 기독교에 하나의 경고의 모본이 되어야만 한다. 이스라엘이 죄에 빠지고 하나님을 배반했듯이 오늘날의 조직된 교회가 하나님의 계시된 권위의 말씀으로부터 돌아선다면 그도 죄에 빠져 배교하게 될 것이다. (90.1)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