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부 록 E. 히브리서 4:4-9에 관한 한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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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서 4:4-9, 특히 9절의 사바티스모스(Sabbatismos)에 대해서 논의하지 않고 성경의 안식일 주제를 끝낼 수는 없을 것이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의 한 출판물은 히브리서 4:9 “신약성경에서 제칠일 안식일의 준수를 주장하는 가장 강력한 구절” 이라고 주장했다.1 (329.1)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도들은 안식일 개념에 포함된 상징성이 히브리서 4:4-9에서는 확대되어 세계의 창조를 기념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기념하는 상징으로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이해한다.2 히브리서 4:4-9에 대한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의 이같은 입장은「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성경주석」(Seventh- 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 신중하게 개진되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과 거룩하게 하는 능력의 전부에 대해 증거한다. 그리고 안식일의 준수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재창조의 능력, 또는 개인들의 생활을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다.”3 이 진술은 다음과 같이 부연되고 있다. ‘남아있는 안식’(히 4:9)은 분명히 10절의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는 ‘안식’이다.”4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에서 그의 글이 권위로 인정받고 있는 엘렌 지. 화잇(Ellen G. White)이 히브리서 4:9“안식”“은혜의 안식”이라고 말한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5 근래에 들어와서는 사무엘레 바키오키(Samuele Bacchiochi)가 히 4:4-9에서 “안식일의 구속적인 의미”를 강조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재림의 빛 안에 있는 안식일의 참된 의미”의 문맥에서 제칠일 안식일의 문자적인 준수를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6 (329.2)
 히브리서 4:9~11로 결론지어지는 토의는 히브리서의 좀더 앞쪽에 속하는 부분에서 시작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히 3:1)이라고 높히 칭송한 다음에 유대 민족의 선구자들의 광야 경험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그리고 출애굽의 세대가 약속을 받고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다고 결론했다. 히브리서 4장에서 히브리서의 기자는 출애굽 세대의 경험을 자기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에 연관시켰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안식의 약속을 맡았으나 믿음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광야의 세대처럼 약속의 성취를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329.3)
 윌리암. 지. 존슨(William G. Johnsson)은 이 구절에서 촉발된 문제들을 다음과 같이 제기했다.

   (1)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있는 “안식”은 무엇인가?

   (2) 안식에 들어가는 때는 지금인가 미래인가?

   (3) 이 논쟁에서 안식일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7 (329.4)
 이 구절에서 “안식”으로 사용된 희랍어 명사는 “카타파우시스”(Kata-pausis)이다(히 3:11, 18; 4:1, 3, 5, 10, 11). 이 명사와 관련된 동사 “카타파우오”(KatapauS)도 세차례나 사용되었다(히 4:4, 8, 10). 그런데 유독 히브리서 4:9에서만 “사바티스모스”(Sbbatismos)가 “안식”의 뜻으로 사용되었다(참고로 말한다면 구약성경의 희랍어 역인 70인역 에서는 “카타파우오”창세기 2:2; 출애굽기 34:21; 31:17의 안식일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히브리서에서 “안식”은 네가지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11, 184:3, 5에서는 “안식(카타파우시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 갈려고 나섰던 출애굽 세대들의 경험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그래서 이 “안식”을 우리가 “가나안 안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자적인 가나안의 점유는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위하여 계획한 “안식”의 일부분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나안 땅에서 그들은 제사장 나라가 되었어야 했고 온 세계에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수단이 되었어야했다(출 19:4-6). 히브리서 기자가 “안식”이란 단어를 선택했을 때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이것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여호수아의 시대와 다윗의 시대에 대하여 말할 수 있었다. 그 시대는 가나안 정복이 이루어지고 있던 시대였으며 가나안 정복이 실현되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안식”의 요구에 미치지 못했던 시대들이었다(히 4:6-8). (329.5)
 “안식(카타파우시스)”은 또 히브리서 4:5에서 거의 우연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제칠일 안식일에도 적용이 되었다. 여기서 제칠일 안식일은 하나님의 “안식”이 무엇인가를 나타내려는 실례의 하나로 나타나고 있다. 그 다음에 4:1, 3, 10, 11에서는 “안식(카타파우시스)”이란 낱말이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일들로부터 쉬고 행함으로 구원을 얻어내려는 시도로부터 쉬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강조되고 있는 부분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복종시킬 때 찾아오는 “안식”에 있는 것 같다. 전체 토론은 마태복음 11:28에서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 곧 “내게로 오라, ∙∙∙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신 말씀을 연상시키고 있다. (329.6)
 더 추가한다면 히브리서 4장에서는 “카타파우시스”“사바티스모스”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9절10절의 문맥에서 그렇게 나타나고 있다. 두 단어는 모두 제칠일 안식일이 그 상징이며 부분인 그리스도인의 보증을 특징짓는 경험을 묘사하기 위해 선택되었다.8 이 안식은 랍비들이 그것을 그렇게 묘사했듯이 장차 도래 할 세계의 한 예표로 인식되고 있다(참조. 마카비우스 2세.15:1). (329.7)
 히브리서 4:49에 나타난 히브리서 기자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분명히 가나안 입성이 이것을 성취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즉 히 3:7의 성령)가 그 후에(다윗을 통해서, 또는 다윗의 시대에) 다른 날을 말씀하시지 아니하셨으리라”(히 4:8).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상태는 아직 미래에 속한다. 다윗의 이전 시대부터 다윗의 시대까지 존재했던 그런 “안식”은 미래에 도래할 안식의 상징적인 모습일 뿐이며 히브리서 4장에서 강조되고 있는 안식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한 계획이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안식이다. 이 “안식”은 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도 미래의 것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개인이 영광의 왕국에서 누릴 안식의 충만한 경험을 준비하면서 은혜의 구원의 경험을 통하여 그 “안식”을 지금 여기에서도 누릴 수 있다. (3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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