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7장 9~14절은 하늘의 어떤 새 장소에 보좌들을 설치하여 그 하나에 하나님이 좌정하시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4, 5장은 이미 그 보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로 시작되고 있다. (168.6)
 다니엘 7장 9~14절은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도착하는 극적인 묘사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4, 5장에서는 요한이, 어린 양이 그 곳에 있음을 갑작스럽게 알아차리고 있다. (168.7)
 다니엘 7장 9~14절에서는 인자가 나타나시기 전에 이미 책들이 펼쳐 있다. 그런데, 이와는 크게 대조를 이루어 요한계시록 4, 5장에서는 작은 책이 철저하게 인봉된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일곱 인으로 인봉된 채 어린 양이 인을 떼기를 기다리고 있다. 일곱 인 부분의 나머지(계 6:1~8:1)는 계속해서 어린 양이 인들을 떼는 활동들을 묘사하고 있다. (168.8)
 다니엘 7장의 책들을 개봉한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 없다. 단지 그 책들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뿐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4, 5장에서는 전체 우주 안에서 책의 인을 뗄 수 있는 피조물은 단 하나도 없고 오직 어린 양만이 그 인들을 뗄 수 있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168.9)
 다니엘 7장 9~14절은 의심할 바 없이 심판의 장면이다. 다니엘 7장 10, 22, 26절이 이점을 명백히 해주고 있다. (168.10)
 그러나, 이와는 달리 요한계시록 4, 5장은 심판의 장면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다. (169.1)
 따라서 우리는 다니엘 7장 9~14절요한계시록 4, 5장이 동일의 사건을 묘사하고 있지 않고 둘은 별개의 사건이라고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169.2)
 하나님의 보좌는 고정된 것인가 이동이 가능한 것인가?
 차이점들이 이렇듯 명백한데도 어찌하여 저명한 주석가들이 그 두 사건을 하나로 묶으려 하는 것일까? 그 대표적인 주석가 중 한 사람의 다음과 같은 대답이 그들의 주장을 대변하고 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소의 장소는 지성소이다.”11 다시 말해서, 많은 주석가들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 성소 내의 장소는 유일한 보좌이며 그 곳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지상 성소의 지성소에 해당하는 곳이라는 잘못된 주장을 해왔던 것이다.* 그들은 요한계시록 4, 5장이 하늘의 보좌에 좌정하신 하나님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그 장면은 틀림없이 하늘 지성소의 장면이라고 부당한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 지성소를 다루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곳이라 할 수 있는 레위기 16장에서는 성소의 둘째 칸이 단순히 “성소”로 불리고 있다. 성소의 두 칸에 대한 명칭은 여러 가지가 있다. 민수기 18장 10절에서는 모세가 첫째 칸을 지성소로 일컫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보좌를 지나치게 “지성소”라는 명칭과 연관시킬 필요는 없다.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는 어디나 거룩하다(성소이다). 광야의 불타는 떨기나무도 성소이다(출 3:2~5).
(169.3)
 하나님의 하늘 보좌가 오직 하늘의 지성소에 한정하여 위치한다는 주장은 하나님이 구약 시대에 지성소에만 국한하여 임재하신 것이 아니라 때로는 성소에도 임재하셨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출 33:9; 겔 9:3). 뿐만 아니라 성소의 진설병 상의 상징적인 목적도 간과하고 있다. (169.4)
 기원 후 1세기에 기록된 히브리서 8장 1, 2절은 예수님이 이미 하늘 성소의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계시는 모습을 명료하게 묘사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4, 5장 역시 기원 후, 1세기에 기록된 것인데 똑같이 어린 양을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다. (169.5)
 그런데, 다니엘 7장 9~14절은 1260년/일의 끝(즉 1798년 이후), 곧 보좌들이 새 장소에 설치될 때, 아버지 하나님이 새 보좌들이 있는 곳으로 옮겨 오셔서 그 하나에 좌정하시고 수많은 다른 생물들이 그 곳으로 하나님께 합류하는 사건을 예언하고 있다. 책들이 펼쳐지고 심판이 개정된 후 인자가 이 새 장소로 옮겨와서 아버지 하나님 곁에 좌정하서는 것이었다. (169.6)
 따라서 다음과 같은 간단하고 논리적인 결론이 나오게 된다. 예수님은 기원 후 31년에 승천과 함께 단번에 하나님의 곁으로 가시어 하늘의 보좌에 앉으셨는데 이 자리는 하늘 성전의 넓고 영화스러운 “성소” 칸에 있는 진설병 상의 자리에 해당한다. 요한은 예수님이 이 곳에서 일곱 인을 떼시는 장면을 보았다. 그 다음에는 1260년/일 후에,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2300년/일의 끝인 1844년에 보좌들이 광대하고 영화스러운 하늘 성소의 신성한 다른 장소에 설치되었다. 최후의 심판의 시작이 바야흐로 박두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우주 전체에 알리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는 이 새 장소로 위엄리에 옮아가셨으며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도 그들의 새 보좌를 옮기었고 인자도 그 곳으로 옮아가셨다. 구약 성경의 성막에 있는 지성소에 해당하는 곳은 바로 이 새 장소즉 광대하고 영화로운 하늘 성소의 거룩한 이 두번째 장소 뿐이다. (169.7)
 하나님의 보좌를 이동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던 우라이야 스미드(Uriah Smith)의 견해
 우라이야 스미드는 19세기에 대중적인 인기와 학자적 깊이를 함께 지녔던 주석가인데 하나님의 보좌를 이동 가능한 것으로 생각했으며 요한계시록 4, 5장에 나타난 보좌의 진정한 위치를 밝힌 바 있다. 다음은 그의 글이다. (169.8)
 “하나님이 법궤의 그룹 사이의 장소에 꼼짝없이 고정되어 계시고 그 밖의 어느 장소에서도 그의 백성들과 만나시거나 교통하시지 않으신다는 주장은(성경의) 기록에 위배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막 문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셨기 때문이다(출 29:42, 43; 33:9, 10). 또 엘리의 아들들이 경솔하게 법궤를 싸움터로 메고 갔다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을 때도 하나님은 법궤의 그룹들 사이에 계셨다는 말인가∙∙∙ 지상에서 하나님이 법궤의 그룹 사이에서 그의 종들을 만나시고 교통하셨다고 해도, 그리고 그 때문에 그 곳이 하나님의 거소로 이야기된다해도∙∙∙ 필연적으로(하늘에서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뒤따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상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교통하심에 있어서는 이것이 가장 좋은 절차일지는 모르나 하늘에서도 꼭 그럴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170.1)
 에스겔 1, 10장에서 에스겔이 하나님과 그의 보좌를 본 바에 따르면 하나님의 보좌 자체가 하나의 살아 있는 보좌이며 가장 높은 그룹 천사들에 의해 옹위되고 있다∙∙∙” (170.2)
 “하늘에 있은 하나님의 보좌가 한 장소에 꼼짝없이 고정되어 있다는 것은 증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한 에스겔의 묵시에서는 하나님의 보좌가 외경스러운 생명으로 충만해 있고, 가까이 할 수 없는 위엄이며, 성령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지상의 성막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늘에서도 보좌는 가끔 하나님의 집 문앞에 설치되었다(겔 10:18, 19)∙∙∙” (170.3)
 “우리는 에스겔의 장엄한 묘사를 통해 하나님의 보좌가 생명력과 운동력이 충만해 있음을 보았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붙드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어떤 한 장소에 꼼짝없이 박혀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나, 그가 그룹 사이에 거하심은 그의 보좌 자체가 하늘의 고귀한 존재들에 의해 옹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늘 성소의 아버지의 보좌에서 봉사를 시작하실 때 그 보좌는 하늘 성소의 첫째 칸에 있었음을 나타내 주는 증거를 갖고 있다∙∙∙” (170.4)
 요한계시록 4, 5장의 장면은 그리스도의 하늘 봉사와 더불어 시작되고 있으며 그 때에 하나님의 보좌는 성소의 첫째 칸에 있다.”12 (1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