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요한복음 제V부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주심 (18-20) 제 15 장 예수의 부활과 재출현 (20)
 본문의 세부 사항
 그 주간의 첫날 새벽, 동트기 전에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으로 가서 출입구를 막은 큰 돌이 옮겨진 것을 보았다(요 20:1). 부활하신 예수께서 단단한 물체를 통과하실 수 있었으므로(19, 26절), 출입구의 돌은 예수께서 무덤에서 나오시게 하려고 굴려놓은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들어가 그가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Life Application Bible, 1925). 스스로 확인도 해 보지 않은 채, 마리아는 바로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13:23), 즉 요한(20:2)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부활이라는 단어는 생각지 못했고, 대제사장에 의해 예수의 시체에 또다시 모욕이 가해진 것으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337.1)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무덤을 향해 경주했으나 베드로가 형편없이 뒤떨어졌다(3, 4절). 그러나 그 다른 제자는 베드로가 도착할 때까지 들어가지 않고 있어서, 베드로가 먼저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5-8절). 베드로는 행동에 있어서 보다 활동적이고 담대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사랑받던 제자는 보다 뛰어난 사색가임이 드러났다. 이 사건에 의하면, 그 사랑받던 제자는 부활을 믿은 첫 번째 사람이었는데, 이는 그가 그 일을 기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모든 상황을 종합해서 판단했고 또한 증거가 더해졌기 때문이다(Jameisen, Fausset, and Brown, 1076; 화잇, 시대의 소망, 789). 그 당시 그들 중에는 성경 말씀에 따라 부활을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9절). (337.2)
 제자들은 무덤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았으나, 마리아는 울며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10, 11절). 그녀가 몸을 구부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예수의 시체가 뉘었던 곳에 두 명의 천사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11, 12절). 그들이 그녀에게 왜 울고 있는지를 묻자,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였는데, 그것은 부활에 관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의 시신이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무리에 의해 도난당했다는 것이었다(13절). 이 순간 그녀는 자기 뒤에 누군가가 서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돌아서서 예수를 보았지만, 무덤 주변의 정원을 지키는 동산지기로 여겼다(14, 15절). 매우 의외라는 말투로 예수께서는 천사가 한 질문과 같은 말을 반복하셨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337.3)
 그러나 예수께서는 더 이상 자신을 감출 수가 없으셨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녀에게 알게 하셔야 했다. 그가 단순히 “마리아야!”라고 하시자, 그녀는 곧 그인 줄 알았다(16절). 마리아의 행동은 우리에게 시대의 소망, 297의 인용구를 상기시켜 준다: “의심으로 당황하고 연약함으로 지쳐 있고, 믿음이 약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붙들 수 없는 영혼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볼 수 있는 한 친구가 그리스도 대신 와서 그들의 떨리는 믿음을 그리스도께 동여매는 연결 고리가 될 수 있다.” (338.1)
 그리스도인 제2 세대에게 이 짧은 장면 속의 기별은 강력한 것이다. 마리아가 예수의 개인적인 임재 속에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눈물로 앞을 막아 그녀가 말하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예수의 개인적인 임재는 그녀가 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때까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제2 세대에게 예수와의 연결 고리는 요한복음의 말씀으로 이르러온다. 이 복음서의 말씀을 통하여 믿음은 실제적인 것이 되고 눈물은 닦이게 된다. (338.2)
 17절“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겠노라”는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 삶의 정수는 예수의 육신적인 임재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아버지의 오른편으로 올라가실 때 성령으로 가능케 된 그 관계를 바라보는 것에 달려 있다. 성령을 통하여 복음서의 말씀은 그의 육신적인 임재를 통하여 이르러오는 생명을 제공한다. 마리아는 제자들과 그 기별을 나누고자 달려갔다(18절). (338.3)
 17절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매우 귀중한 칭호를 사용하신다. 그는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제4 복음에서 예수께서 자신과 제자들을 그와 같이 친밀한 용어로 결합시키시는 최초이면서 유일한 순간이다. 앞에서 그는 그들을 “종”(13:16)이라 불렀고, 그 이후에 “제자”(13:35)라 하셨다. 그 후에 그는 그들을 “친구”(15:15)라고 부르셨다. 그러나 이제, 그가 도움이 필요할 때 그를 버린 그들의 엄청난 불신에도 불구하고(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비교할 때, 요한은 이 사실을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 예수께서는 정감어린 보다 친밀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들을 “형제,” 즉 그의 아버지의 같은 동료 자녀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Jameison, Fausset, and Brown, 1076)! (339.1)
 그날 저녁 제자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제거할 경우를 대비하여 문을 잠그고 모였다. 사랑받는 제자와 막달라 마리아 모두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직도 예수께서 살아나신 것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어찌 되었든지 간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두 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말씀하셨다(19, 21절). 그런 후에 그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었는데, 이것은 원래의 창조(창 2:7)를 상기시켜 주었으며, 또한 성령을 내보내시는 것에 대한 상징, 즉 아마도 50일 후에 있게 될 오순절의 경험을 미리 맛보이는 것이었다(20:22). (339.2)
 이때 제자들이 가진 두려움은 다시 한번 지상에서 예수의 육신적 임재가 제자들을 의심과 혼돈 속에서 전혀 지켜주지 못함을 재인식시켜 주고 있다. 반면에 성령의 임재는 제자들이 세상을 향한 예수의 용서의 사역의 지위까지 이르게 할 것이다(23절). 이 절은 제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용서할 수도 있고, 용서를 거둘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의 경우처럼 그들의 복음 선포가 빛과 어두움, 생명과 사망, 용서와 심판을 모두 가져온다는 것을 의미한다(3:16-21; 참고 고후 2:15, 16). (339.3)
 도마는 부활의 저녁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24절). 도마가 그곳에 없었던 것이 그의 자의적인 낙담으로 인한 것인지는 문단 자체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에게 다른 일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의 증언에만 기초하여 부활의 실재성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문단에서 “내가 보지 않고는”이라는 말과 강력한 이중 부정(헬라어에서)인 “나는 절대로 믿지 않겠노라”(저자의 번역)라는 말은 극도로 확고한 불신을 가리키는 것이다(25절). (340.1)
 한 주가 지난 후에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데, 이 때에는 도마도 참석했다. 다시 문이 잠겨 있었고, 예수께서 또 나타나셔서 전과 같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6절)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후에 그는 도마에게 가서 25절에서 도마가 한 말을 좀더 확대하여 반복하시면서 자신의 몸을 검사하여 그의 의심을 불식시키도록 촉구하였다(27절). (340.2)
 도마의 자신 만만함은 공허한 것임이 드러났다. 그는 실제로 못 자국에 손을 집어넣거나 예수의 옆구리의 상처를 만져볼 필요가 없었다. 단순히 예수를 본 것만도 신약 전체에서 예수의 신성에 대한 가장 장엄한 확증들 중의 하나를 이끌어내기에 충분하였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 이 구절은, 말씀이 영원부터 하나님으로 존재하시고, 또한 하나님과 함께 계시지만, 자기를 낮추어 육신이 되셨다고 한 이 복음서의 서언(1:1, 2, 14)에 대한 적합한 짝을 제공한다. (340.3)
 도마의 진술(20:28)은 이 복음서의 기독론의 절정을 이룬다. 예수께서는 도마가 그 일에 대해 과장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대신에 그는 그의 믿음을 굳게 하라고 명하시고, 예수의 육신적 임재를 경험하지 않고도 도마와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될 자들(제2 세대)에 대한 축복을 약속하셨다(29절). “의심쟁이 도마”(“Doubting Thomas”)는, 복음서에서 물리적인 표징들과 경이로운 경험에 저들의 신앙을 의존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한다. 더 위대한 체험이 다른 이들의 증언, 즉 이 복음서의 살아있는 말씀(Word)을 통하여 믿게 될 세대에게 약속되어 있다. (340.4)
 사실 요한복음이 기록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30절은 원문에서 “그러므로”로 시작된다. 이 복음서의 목적은 도마의 사건과 연관되어 나타나게 되어 있다. 육신의 예수는 이 복음서에 기록된 것 이외에도 다른 많은 “표징들”을 행하였겠지만, 이 복음서는 예수의 부활한 몸을 검사하지 않고도 도마가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만드는 “충분한 예증”(Jameison, Fausset, and Brown, 1077)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와 같은 믿음에 이르게 된 제2 세대의 사람들은 그의 이름으로 생명, 곧 풍성한 생명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31절). (341.1)
 요한복음의 목적은, 독자들이 예수는 메시야(유대인의 칭호)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방인의 칭호)임을 인정하게 하여, 포괄적인 선교(comprehensive mission)를 실현하는 것이다(31절). 제2 세대는 인종, 성, 문화, 혹은 지리적 위치에 의하여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는다. 이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예수의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인 자들은 모두 그가 제공하는 생명을 받을 수 있다. (341.2)
 문단의 주요 주제
 제자들이 더디 맏음
 이 장의 기본적인 주제는 놀라운 실제적인 증거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더디 믿는 예수의 제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첫째, 베드로와 요한은 그 증거를 와서 보고, 요한은 믿었지만, 베드로에게는 영향을 끼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1-9절). 그런 후에 마리아는 주저하다가 예수와 개인적으로 실제적인 만남을 가진 후에야 인정하게 되었다(10-18절). 그녀와 요한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목자 없는 양처럼 잠근 문 뒤에서 함께 떼지어 모여 있었다(19-23절). 마침내 도마가 믿는 일을 주저하게 된다(24-29절). (341.3)
 이 장 전체는 제2 세대를 향한 하나의 큰 칭찬인 것처럼 보이는데, 이 세대는 첫 세대보다 매우 열등하다고 느끼지만, 첫 세대 중에서도 오직 사랑받는 제자만이 할 수 있던 것—예수와 개인적인 접촉 없이 온전히 믿게 됨—을 성취한 사람들이다. 이 복음서의 기자를 제외하고 첫 세대는 다른 사람의 증거의 기별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2 세대는 이미 이것 이상의 것을 행하였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죽음 후에 믿음을 지키는 데 있어 그들은 최초의 제자들의 신앙을 뛰어넘을 것이다. 특별한 축복이 그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29절). (3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