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복음서들이 모두 유다의 배반을 보도하지만, 그들 중 어떤 복음서도 그런 행동의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것에 관해서 많은 이유들이 제시되어 왔지만 말이다. 어떤 성경 학도들은 유다가 예수께서 반대자들을 파멸시키시고 그토록 많은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있는 그 왕국을 설립하기 위해 그의 비범한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실 수 없는 입장에 빠뜨리기를 원했다고 추측해 왔다. 두 번째 견해는 유다가 예수에게 환멸을 느꼈다고 본다. 이런 방향의 생각에 따르면, 그 환멸은 예수께서 로마 나라를 타도하실 군사적 메시야가 아니라 평화의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한데서 비롯되었다. 그처럼 반역은 예수를 제거하는 데 목적이 있는 행동이었다. 세 번째 견해에 따르면 유다는 예수를 실패자로 보았다. 그처럼 유다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를 배반했다. (307.3)
 신약에서 유다의 배반의 이유로 언급된 유일한 동기는 돈이다. 신약이,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던 그 여성의 이야기(6-13절)를 가야바와 유대인의 지도자들의 좌절어린 음모의 이야기와 그들을 도우려는 유다의 자원의 이야기 사이에 놓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14-16절). (307.4)
 제4복음서는 이 점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요한복음은 유다는 “낭비된” 향유의 가치(300데나리온, 1년분 봉급)로 인하여 그 기름부음에 특별히 유감이 많았으며, 그가 가지고 다닌, 제자들의 공동 전대(轉貸)에서 돈을 훔치고 있었다(요 12:4-6)고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처럼 유다는 기름부음에서 개인적 손실을 보았다. (308.1)
 그러나 이기심만으로는 유다의 180도 돌아섬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특별히, 그가 여전히 으뜸가는 (그리고 추정컨대 부유한) 지도자가 될 현세적 메시야 양국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고로, 유다의 배반에 대한 최선의 설명은 기름부음 때의 “낭비된” 돈은 예수께서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을 대적하여 행동하도록 강요할 그의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데 있어서 단순히 자극제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처럼, 유다의 전망에 따르면 천천히 움직이는 예수께서는 그의 왕국을 설립하는 데 있어서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유다의 반역의 이면(裏面)에 있는 모든 가능한 추정들 가운데, 이것이 모든 사실에 제일 부합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계획이 잘못되어 가자 왜 그가 자살했는지도 설명해 준다(27:1-5). (308.2)
 마태는 의도적으로 그 기름부음의 이야기를 가야바와 유다의 음모들 사이에 끼워 놓은 것처럼 보인다. 비록 그가 그렇게 하기 위해 그 연대기적 배경에서 그 사건을 떼내야 했지만 말이다. (요 12:1-12를 보라. 그 구절은 기름부음의 때를 “유월절 엿새 전” 그리고 승리의 입성 바로 “이튿날”로 놓고 있다.) (308.3)
 그러나 그 이야기는 단순히 유다의 행동들을 설명하는 것을 돕기 위해 첫째 복음서에 포함된 것이 아니다. 그와는 달리, 마리아가 기름을 부은 것은 그 나름의 기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예수께 대한 마리아의 감사를 상징하는 엄청난 헌신의 기별이다. 그 이야기의 직접적인 문맥 내에서 예수께 대한 유대인의 지도자들과 유다의 반응과는 크게 대조되게, 마리아는 그녀에게 개인적으로 너무도 많은 것을 해 주신 분, 그녀의 오빠(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신 분(요 11:1-44)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표현한다.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께 대한 적극적인 반응의 행동이었다. (308.4)
 그 외에도, 기름을 붓는 것은 상징적으로 풍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결국, 메시야의 의미 자체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다. 왕들이 구약에서 기름부음을 받았듯이(예컨대, 왕하 9:6을 보라), 마리아도 예수에게 기름을 부었다. (309.1)
 아마도 기름부음의 이야기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마리아의 행위가 그의 장사(葬事)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12절의 설명이다. 이 진술은 다시 한번 예수께서 그의 상황을 통제하고 계신다는 것을 지적해 준다. 결국, 관습적으로 신체들은 그것이 죽기 전에는 장사를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다. 기름부음은 전통적으로, 죄수들을 제외하고는, 산 사람들이 아닌, 시체들에게만 행해졌다. 그처럼 마리아의 행위에 대한 예수의 해석은 그의 죽음이, 몸에 대한 적절한 예식 없이 묻히게 될, 죄수의 그것이 될 것이라고 (올바르게)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309.2)
 옛 상징에 대한 새로운 의미
 마태복음 26:17-30은 그의 제자들과의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제시한다. 그것이 유월절 음식이긴 하지만, 예수와 제자들은 정규적인 유월절 음식을 먹는 날 전 날에 그것을 먹는다(요 13:1; 18:28; 19:14). 그처럼, 정규적인 유월절 식사는 그 해 금요일 저녁에 있었지만,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그것을 목요일 저녁에 경축했다. 예수의 경우에 이것은 불가피했다. 왜냐하면 그는 금요일 저녁때쯤에는 자신이 죽어 있을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309.3)
 때 이른 유월절 식사는 최후의 만찬 식사의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차려 있는데 반하여, 왜 그 만찬 때 어린양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는지를 설명해 준다. 유월절 어린양들은 예수께서도 또한 죽으셨던 바로 그 시간인 금요일 오후에 성전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 시점(時點, timing)이 중요한데, 이는 바울이 표현하듯이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희생당하신 유월절 어린양”(고전 5:7, 「필립스역」)이시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전통도 예수께서 “유월절 저녁”(Sanhedrin, 43a)에 처형되었다고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그가 정규적인 유월절 식사 이전에 죽으실 것을 아시고 하루 일찍 특별한 식사를 마련하신다. (309.4)
 그 목요일 저녁, 예수께서는 처음으로 그의 측근들 중 하나가 그를 배반할 것이라고 지적하신다(21절). 이 시간 이전에도, 그는 자신이 죽으실 것이라고 지적하셨지만, 그는 결코 그 사건에 제자들 중 한 사람을 결부시키지 않으셨다. (310.1)
 그 말씀은 열두 제자에게 큰 정신적 쇼크를 주었다. 22절은 그들이 “심히 근심하여”(「제임스왕역」), “크게 고민하여”(「새영어성경」) 혹은 “깊이 근심하였다”(「새미국표준성경」)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 헬라어가 어떻게 번역되든지 간에 그것은 격정, 심지어 충격을 가리킨다. (310.2)
 그 계시는 제자들을 자기 의심을 하게 되는 지경까지 흔들어 놓는다. 각자 차례로 “주여, 내니이까?”(“주님, 확실히 저는 아니지요?”-영역본들)라고 묻는다. 그들이 그 질문을 말로 표현하는 그 방법 자체는 그들이 부정적인 답변을 기대하고 있음을 가리킨다는 점을 주목하라(22절). (310.3)
 유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그의 궤적(軌跡)들을 은폐해 왔음에 틀림없는 사실을 보면 대단히 흥미롭다. 결국, 아무도 “그것이 유다입니까?”라고 묻지 않는다. (310.4)
 그러나 유다는 알고 있다. 방심하여 경계를 늦추고 있었던 그는 즉시 예수께 “그가 그니이까?”라고 묻는 일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참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곧 정신이 돌아와 만일 그가 그 질문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가 그 범인으로 확인되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도 “랍비여, 내니이까?”(25절)라고 말한다. 유다는 예수를 다른 제자들이 하듯이 “주여”라고 칭하지 않고 “랍비”—어떤 유대인 교사들에게도 적절한 응대(應待)의 용어이자 첫 복음서에서 다른 제자들이 전혀 사용하지 않은 응대의 형태(유다가 그 용어를 사용한 다른 예를 보려면 26:49를 보라)—로 칭한다. (310.5)
 예수께서는 다른 제자들의 질문들에는 답변하시지 않지만, 유다에게 그가 실로 배반자가 될 것을 그가 알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신다(25절). 이 시점에서 유다는 그가 발각된 것을 안다. 그는 또한 그가 자신의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신속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되리라는 것도 안다. “사단이 유다에게로 들어간” 것은 바로 이때쯤이라고 요한은 우리에게 말한다. 예수께서는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을 신속히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유다는 그의 계획을 행동에 옮기기 위해 “나갔다”(요 13:27-30). (311.1)
 그러고 나서 마태는 예수께서 한 옛 상징에 대해서 새 의미를 제시하는 것을 기록한다. 유월절 식사의 옛적 의미는 하나님께서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그의 백성을 구출해 내신 데 중심을 두고 있었다(출 12:1-30). 새 의미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죄로부터의 하나님의 구출과 관계가 있다. 그 새 식사는 그와 같이 옛 것보다 더욱 큰 구출을 상징한다. (311.2)
 예수께서 떡을 떼시고 그것을 그의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26:26)고 말씀하신다. 그는 그의 취지를 왜곡시킴 없이 “너희를 위하여 깨뜨려질” [내 몸]이라고 쉽게 덧붙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눅 22:19; 고전 11:24 참고). 그 다음에 그는 잔을 가지시고 그것이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7, 28절)고 가리키신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구약의 언약들이 피로 말미암아 비준되었던 것과 같이, 예레미야 31:31-34에 예언된 새 언약도 그러할 것이다. (311.3)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을 위해 돌아가실 것이다. 그와 같이 그의 죽음은 대속적 죽음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는 십자가까지 우리의 죄를 지셨고, 우리 대신 돌아가셨다. 그는 우리의 것인 정죄를 취하셔서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그의 것인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하셨다(고후 5:21; 벧전 2:22; 히 9:28; 갈 3:13; 사 53:5, 6, 11). 그는 우리의 대속물로서 돌아가실 것이다. 그의 피는 “[우리의]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28절) 부어질 것이다. (3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