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이 그 점을 이해하기는 하였으나 단지 부분적으로만 이해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예수를 민족주의적 왕으로 호칭했다. 오시는 이(요 12:13)의 혼합은 앞서 이 복음서에 이미 나타난 것이다(6:14, 15). 하지만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의 왕권은 분명히 영적인 것이었다(6:35, 63). 요한복음 12장에서 이 복음서의 저자는 다시 유대인의 기대를 바로잡고 있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왕이시고, 기름부음을 받으셨고(7절), 왕관을 받으실 것이다(19:2). 그러나 그분은 민족주의적 기대를 이룰 왕은 아니었다. 그의 왕권은 우주적인 것이다(11:52; 12:19, 20, 32). (254.4)
 예수의 왕권의 우주적인 성격은 15절에서 스가랴 9장을 인용하는 것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스가랴 9장의 메시야 왕은 영적인 사명을 가질 뿐만 아니라(슥 9:9-“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그분은 이방인에게 평화를 선언하시고(참고 요 12:20), 그분의 통치는 땅 끝까지 이른다(슥 9:10). 그분의 우주적 영적 통치의 기초는 “언약의 피”이다(슥 9:11; 참고 습 3:9, 10, 16, 19). 그러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까지는 제자들이 이러한 일들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요 12:16). 다시 한번 제2 세대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고려되고 있다.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능해진 예수의 임재는 예수께서 제자들 사이에 몸소 임재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주어진 이해보다는 더 큰 이해를 가져다준다(요 14-16). (255.1)
 개선(凱旋)의 입성으로 우리는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이적에 대한 세 가지의 큰 반응을 볼 수 있었다. 이 이적은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기를 원하도록 만들었는데, 이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11:45-53). 그 이적은 마리아로 하여금 감사와 자기 희생적인 사랑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12:1-8). 동시에 이 이적은 그 무리로 하여금 예수를 그들 자신의 민족주의적 기대를 충족하는 데 사용하도록 고무하였다(9-19절; 참고 6:2, 14, 15). (255.2)
 그러므로 나사로를 일으킨 것은 예수에 대한 각기 다른 세 가지 반응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 중의 둘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세 가지 반응 중에 마리아의 것이 이 복음서의 저자가 독자들에게 예수의 이적적인 표적들에 대한 위대한 반응의 모델로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반면에 군중들은 변덕스러웠다. 요한복음 12:34에 의하면, 그들은 예수에 대하여 또 다른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곧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묵인하게 될 것이었다. (255.3)
 이 장면에 헬라인들이 도착한 것(20절)은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라는 19절의 판결을 확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3:16; 참고 20:30, 31)라고 약속된 자들의 더 많은 열매들을 보게 된다. 모든 이방 세계가 복음에 활짝 열리고 있다(4:42; 7:35; 10:16; 11:52; 12:32; 화잇, 시대의 소망, 622). 나사로를 일으킨 것은 이방인들의 관심도 끌었다! (256.1)
 이 황금의 순간은 분명히 예수께 개인적으로 일종의 신호로 작용하였다. 왜냐하면 헬라인들의 도착에서 그분은 자신의 “때”가 도래한 것을 인식하셨기 때문이다(23절). 제4 복음에서 예수께서 영광스럽게 되는 때는 그의 부활과 승천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자아 희생적인 고난과 죽음에서도 나타난다(24절; 13:32; 17:1, 5). (256.2)
 예수의 때에 대한 단 하나의 타당한 반응은 그분을 믿고 고난 중에서도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반응이다(12:25, 26). 예수의 종은 현재의 생명을 참으로 영원한 생명과 기꺼이 바꿀 것이다(25절).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자기 중심적임을 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이익, 안전, 그리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으로 가득 찬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제공하시는 생명의 충만함을 체험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삶의 통제권을 그리스도께 넘기는 것은 진정한 충만함에 이르는 길이다. 자기 중심성을 포기하고 자신의 삶을 예수의 통제에 맡기는 자들은 언제나 예수께서 계신 곳에 거하기를 추구할 것이다(26절). (256.3)
 우리가 따르게 되고 함께 거하게 될 그 예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이 문단의 문맥은 예수가 십자가의 길에서 발견될 수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23, 24, 27-33절). 우리가 십자가의 길에서 그를 따를 때, 그분이 계신 곳에 우리도 있게 된다. 그분은 그분의 백성이 특별히 고난받고, 짓밟히고, 연약하고, 죄인이고, 버림받은 자가 되는 곳에서 발견될 것이다(4:7-42; 5:1-15; 9:34-38; 마 25:34-46). 우리의 영광의 때는 우리 자신이 속세의 현장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자아 희생의 제물로 드릴 때일 것이다. 요한복음은 13:1-17에서 믿는 자의 십자가의 길을 예증하고 있다. 우리가 타인(他人)의 “발을 씻음”으로 그들을 섬길 때, 우리는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를 따르게 된다. 우리는 타인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 속에서 그분을 발견한다. (256.4)
 요한복음 12:27“요한의 겟세마네”라 불릴 수 있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예수께서는 근심에 차서 아버지께 이 “때”를 면하게 해 달라고 요청해야 할지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사건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많은 주요 사건들에 대한 제4 복음의 관계와 흡사하다. 요한은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일은 기록하지 않았으나 그것의 본질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발견된다(6:15, 31; 7:3). 감람산 위에서의 종말론적 설교는 없지만 그 설교의 본질은 요한계시록에서 볼 수 있다! 예수께서 배반과 심문을 당하시기 바로 전에 겟세마네에서의 고뇌의 경험은 나타나지 않으나(참고 18:1-11), 겟세마네 경험의 모든 요소들이 요한복음 12:20-36에 담겨 있다. 그 때가 이르러왔다(23절; 비교 막 14:41). 예수의 영혼은 깊은 근심에 빠져 있었다(12:27; 참고 막 14:41). 그분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의 때를 피할 방도를 찾고자 생각했다(12:27; 막 14:35, 36). (257.1)
 여기서 무엇이 예수를 고뇌하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헬라인들의 방문이었다(20절). 이 문단은 광야에서 사단이 한 시험들 중의 하나—고난과 죽음에 의하지 않고 사단의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그의 우주적인 왕권을 성취하라는 시험(마 4:8-10; 눅 4:5-8)—를 재연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께서는 헬라인들에게서 그를 임박한 십자가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사단의 혼란 작전을 보셨다. 헬라인들의 방문은 “당신은 죽지 않고도 세계의 모든 나라들을 가질 수 있소. 그냥 여러 나라에 가서 환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들을 일으키고, 그들에게 설교하시오.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당신의 백성이 될 것이오”라고 제안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세상 임금에게 한 예수의 대답은 “아니오”였다. 그의 길은 십자가에서 판단될 것이었다(요 12:31). 예수를 들어올리는 것은 사단을 던져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만인과 만물을 예수께로 이끄는 것은 표적이나 기사가 아니라 바로 십자가임이 마침내 입증될 것이다(32, 33절). (257.2)
 예수의 고뇌에 찬 기도에 대한 하늘의 응답은 그에게 이중의 영광을 보증하는 것이었다(28절). 아버지께서는 과거에 예수의 모든 봉사를 영광스럽게 하셨고(17:4), 다시금 십자가 위에서 예수를 영광스럽게 하려 하신다(12:23, 24, 32, 33). 이 확증은 제자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30절). 그들은 진정한 영광의 길은 이적과 인간적 찬사의 길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의 길에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께서 십자가의 길을 인정하셨음을 알 필요가 있었다. 어느 날 그들도 역시 너무 가혹하여 자주 죽음에 이르게 할 반대와 고난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258.1)
 어떤 종류의 심판이 십자가 위에서 일어날 것인가(31, 32절)? 이것이 결정적이며 중대한 진술로 의도된 것이라는 사실은 31절에 한 쌍의 “이제”라는 말 속에 나타나 있다(「개역한글판」에는 “이제”라는 말이 단 한 번 나타난다—역자 주). 이 심판은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심판이 될 것이었다. 사단은 폐위(廢位)되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결과로 즉위(卽位)하게 되실 것이었다(참고 계 5:5-12). 십자가에서 세상의 모든 죄는 그리스도의 육신 속에 정죄되고 처벌을 받았다(롬 8:3; 벧전 2:24).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은 자들에게 사단의 방식들은 기만하는 능력을 영원히 빼앗길 것이다. 하나님의 자기 희생적인 사랑의 방식은 그것들의 자리를 대신해서 영원히 높임을 받을 것이다. (258.2)
 군중들은 당혹해했다. 이런 메시야도 있는가(요 12:34)? 구약에 기초해서 그들은 메시야는 결코 죽지 않을 것으로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시 110:4; 사 9:7). 도대체 고난과 죽임을 당하는 메시야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영원한 메시야의 교리는 그들이 다른 성경 구절들에서 읽고 희망한 것과 매우 다른 종류의 메시야를 암시하는 이사야 53:5-9과 같은 말씀을 무시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고, 수호하려는 교리가 아무리 고귀한 것이라 할지라도 성경을 선택적으로 뽑아 읽는 것은 위험하다. (258.3)
 그들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이 복음서의 기별 속에 담긴 “빛”의 중심성을 재확증하고 있다(참고 1:4, 5, 9). 그들의 모든 사상들은 하늘로부터 예수라는 인물 속에 이르러오는 빛에 굴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곧 그 빛이 사라져 어두움 가운데 남게 되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12:35, 36). 이 최후의 두려운 일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듯,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서 사라지셨다(36절). 이 장면은 예수의 공중 봉사 이야기의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그의 공중 봉사에 대한 간략한 신학적 요약(37-50절)이 있은 후에, 그분은 그 때로부터 제자들에게만 봉사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13-17, 20, 21장). (259.1)
 그 다음 부분(37-43절)은 가나의 혼인 이야기(2:1-11)의 신학적 언어와 9:39-41에서 야기된 예정(豫定) 대(對) 인간의 책임과 관련한 토의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그것을 상세히 토의할 필요가 없다. 이 부분이, 예수께서 허다한 사람들의 면전에서 행하신 불가사의한 표적들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믿기를 거절했는지(37절)를 설명한다는 것으로 만족하자. 한편으로 그들의 불신은 성경을 성취하였다(38-41절).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의도한 일의 실패였다. 그들은 하나님보다는 동료 인간으로부터 칭송과 찬사를 구하기로 선택했다(42, 43절).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인간의 인정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는 자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인식하고, 그분을 따르는 일이 많은 고난과 심지어 죽음을 당하게 한다 할지라도 기꺼이 그분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결국 타인의 칭송은 변덕스럽고 오래 가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인정은 영원한 의미를 지닌다. 바클레이(Barclay)는 은밀한 제자도(secret discipleship)란 말은 용어상 자가당착(自家撞着)이라고 말했다. “은밀성이 제자도를 죽이든지, 제자도가 은밀성을 죽일 것이다”(2:133). (259.2)
 요한복음 12:44-50은 예수의 기별의 관건이 되는 요소들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 것이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것이다(44절). 예수를 본 것이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본 것이다(45절). 그런 후에 예수께서는 35절36절의 요점을 반복하셨다: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어두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고자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46절). (259.3)
 47-48절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심판 신학을 요약하셨다. 심판이 과거든지, 현재든지, 미래든지 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심판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 두 구절은 신명기에 기록된 모세의 최후의 설교(18:18, 19; 31:19, 26; 32:45-47)를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예수께서는 심판을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47절). 그렇지만 현 세상에도 심판이 있는데, 그 심판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그 말씀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48절). 예수의 말씀에 즉각적인 응답을 요구하는 심판은 마지막 날에 있게 될 심판에서 그 완성을 볼 것이다(48절). 현재의 심판과 미래의 심판은 예수의 공중 봉사의 결론부인 이곳에서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고 있다. (260.1)
 문단의 주요 주제
 대표적인 인물들
 요한복음이 일반적인 의미의 비유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므로, 저자는 예수와 그분에게 반응한 사람들의 경험들을 행동화된 비유로 사용함으로써 그 효과를 대신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이 복음서에서는 많은 인물들이 백성의 집단들 또는 예수께 대한 반응의 유형들을 대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는 그들이 실제 인물이긴 하지만 이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인의 유형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마리아는 천성적으로 나약하고 쉽게 실망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놀라운 경지의 사랑과 헌신에 도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상징한다. 반면에 마르다는 보다 실제적인 유형이다. 그녀는 믿음을 분별하고 봉사의 정신을 가진 것이 특색이다. 나사로는 그의 성격이 다소 신비에 싸여 있지만, 질병과 장애를 가졌거나 가족과 사별함으로 부활의 소망에 보다 더 관심을 집중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상징한다. (2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