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사무엘 상∙하 제 Ⅱ 부 사무엘과 사울: 여호와께서 주시고 여호와께서 가져가심 (삼상 8-15) 제 4 장 여호와께서 사울로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심 (삼상 13-15)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이 가로되 ‘번제와 화목 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8, 9절).
(117.3)
 번제가 끝나자마자 사무엘이 도착하여서 질문을 던진다: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11절). 성경은 사울이 그의 내적 갈등을 묘사하게 한다: (117.4)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11, 12절).
(117.5)
 이 사람은 이탈하여 도망하는 비겁쟁이가 아니었다. 이 사람은 맹목적으로 전투에 뛰어드는 성급한 전쟁의 영웅이 아니었다. 이 사람은 여호와의 축복을 구하는 신앙적인 사람이었다. 주의 사자가 약속한 때에 나타나지 않아서 괴로웠던 것이다. (117.6)
 사무엘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황당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13절)라고 그는 말하였다. 하나님의 “명령”을 범함으로 사울은 그의 왕국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은 이미 후계자를 정하셨다. 그리고 사무엘은 떠났다. 대화도 없었고, 논쟁도 없었다—15장의 거절 장면과는 대조적이다. 여기서 성경은 단순히 사무엘은 떠났고, 사울은 그때까지도 그와 함께 남아 있는 군사들의 수를 세어 보니 “600명 가량”이었다고 기록한다(15절). (118.1)
 이제 사울의 죄의 성격을 조사해보자: 무슨 “명령”을 그가 범했는가? 어떤 이들은 주장하기를 그가 일반적 명령, 아마도 레위인이 아닌 자가 제사를 드릴 수 없다는 명령을 어겼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사울이 어떤 제사법을, 그것도 모르고 범했다고 주장한다. 사무엘의 기다리라는 명령은 사울이 그런 실수를 하지 못하도록 보호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13장의 내용을 그런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다. 사실상 다음 장은 사울이 합당한 제사 방법의 보호자이며,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다고 (그 사실을 좋게) 보고한다(14:33-35). 성경의 다른 곳에서 다윗의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봉사한 것을 알 수 있다(삼하 8:18; 히브리어 성경, 「새국제역」 주 참조).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단 위에 1,000 번제를 드렸을 때에(왕상 3:4),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것에 대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시겠다는 약속의 상을 주신 것처럼 말한다(5절). (118.2)
 사울의 죄에 대한 더 그럴싸한 설명은, 그것은 일반적인 명령이 아니라 사무엘이 기다리라고 한 명령에 대한 구체적인 어김이라는 것이다: (118.3)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너의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을 기다리라”(10:8).
(118.4)
 사울이 그의 아버지 집에서 살던 젊은이였던 10:8과 다 장성한 아들을 둔 아버지로 나오는 13:8-14의 시간적 격차 때문에 칠일을 기다리라는 명령이 두 번 이상 내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예를 들어, Baldwin, 91). 그러나 연대적 문제를 어떻게 풀든지 간에 이 두 구절 사이의 연결은 너무 분명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어떤 해석가들은 사울에게 완전한 알리바이(alibi)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무엘은 정한 시간에 오지 않았다. 사무엘의 잘못이지 사울의 잘못이 아니다. (118.5)
 하나님과 그의 사자에 관하여 그런 의문을 갖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전례가 있다. 하나님의 길을 결국 수용하는 것은 도중의 의문들을 배제하지 않는가. 아브라함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공의”를 행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공포와 함께 반응하였고, 하나님께 그렇게 말씀드렸다(창 18:23-25).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겠다는 위협적인 심판 선언에 관하여 모세가 담대히 맞선 것 또한 주목할 만한 것이다(출 32:9-14). 모세의 경우에 여호와께서 “후회하셨다”(“repented,” 「제임스왕역」), 혹은 “마음을 바꾸셨다”(“changed his mind,” 「새개정표준역」).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은 헛일이 아니다! (119.1)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한, 여기서 말하는 정죄가 마지막 말이므로, 분명히 저자는 우리가 사울에게 잘못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를 원했던 것이다. 아직도 이 이야기의 석연치 않음을 풀어줄 몇 가지 요인들(어떤 것은 모순으로 보임)을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119.2)
 1.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의 유용성은 개인적 선함이나 의보다는 하나님의 부름에 우선 기초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름이 “정의”를 무도하게 짓밟은 것의 가장 두드러진 예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반 거짓말에서 시작된 바로와 아비멜렉의 순진한 실수를 벌하셨기 때문이다(창 12:17; 20:2, 17, 18). 왕권에 관하여 말하자면 요나단은 사울이나 다윗보다 도덕적으로 더 탁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결코 왕으로 일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다윗은 용서받은 죄인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욕정과 살인에 있어서 그 도가 사울보다 지나쳤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택하신 것은 다윗의 계보였다. (119.3)
 2. 위기의 때에 하나님의 요구와 심판은 자주 엄하고, 심지어 가혹하기도 하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왕이었다. 매우 중요한 전환기 때에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였다. 참지 못하는 것과 불순종은 치명적인 결점이었다. 유사하게 “사소하게” 보이는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관계된 “문제성 있는” 많은 이야기들은 공동체의 안녕이 위태로운 시점에 나타난다: 안식일에 나무를 한 사람을 돌로 쳐죽인 이야기(민 15:32-36);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일(민 20:9-12); 아간(수 7:24-26); 웃사(삼하 6:6,7; 대상 13:9, 10);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행 5:1-10). (119.4)
 두 경우에 있어서 적당하게 보이는 알리바이(사무엘의 지각과 웃사의 요동하는 소들)가 공동체의 더 큰 필요에 의해 짓밟혔다. 그러나 성경이 그 알리바이를 언급함으로 우리는 그 이야기들을 이해하기가 더욱 곤란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웃사(삼하 6:7) 한 사람의 죽음이 벧세메스에서 고의적으로 궤 속을 들여보다가 죽은 수십 명(혹은 수천 명!)의 죽음보다 더 문제성이 있다고 본다. (120.1)
 3. 권위주의적 지도 체제 시대에 하나님은 합리적인 순종보다는 엄격한(맹목적인) 순종을 더 기대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구약에서는 그의 사자와 논쟁하기보다는 하나님과 논쟁하는 것이 더 쉽다. 예를 들어 나단은 성전을 짓겠다는 다윗의 계획을 승인하였으나 하나님의 충고를 듣고 태도를 바꾸었다(삼하 7). 그러나 두 경우 모두 다윗은 순종해야 했다. 그러나 지혜 문학서(욥기, 잠언, 전도서)에서처럼 선지자와 제사장이 없을 때에는 예언자나, 제사장의 지도를 받지 못하였고 훈련된 지성이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욥은 침묵한 우주 속에 홀로 서서 그의 창조주와 구속주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공고히 한 사람의 대표자가 되었다. (120.2)
 공동 지도 체제가 인정된 신약 시대에 사도들은 서로 간에 토론을 벌일 수 있었고(행 15), 바울은 베드로의 “면전에서” 반대할 수 있었다(갈 2:11). (120.3)
 그러나 사울에게는 그런 자유가 없었다. 그는 그에게 기름 부은 선지자를 순종해야 하였다.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켜 7일을 기다린 것으로 넉넉하지 않았다. 선지자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그의 실수이며 그의 죄였다. (120.4)
 4. 사건의 순서. 사울의 보다 더 난폭하고 비난받을 어떤 행동들이 사무엘상 13장의 거절 전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를 버리신 것은 현 본문이 뜻하는 것처럼 그의 통치의 초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닐 수 있다. 사무엘상의 다른 부분에서 나온 증거는 그 연대가 항상 정확한 것이 아니라는 암시를 준다. 그런 결론을 위한 더 뚜렷한 증거는 다윗이 사울에게 소개되는 장면과 관계하여 나온다. 16:18에서 수금 타는 자 다윗은 “호기(豪氣)와 무용(武勇)이 있는 자”라고 사울에게 소개되었고 사울의 “병기 든 자” 중의 하나가 된다(21절). 사울은 다윗이 그와 함께 머물기를 허락해 주기를 이새에게 구했다(22절). 그러나 바로 뒤에 나오는 골리앗의 이야기 속에서 사울은 다윗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전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소년이 뉘 아들이냐?”라고 그는 아브넬에게 묻는다. 그런데 아브넬도 그를 모른다.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끌고 나타났을 때 비로소 사울은 다윗에게 직접 물었고,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사무엘상 16장17장의 관계에 대한 다른 각도의 해석이 이 책의 제5장에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인상은 어쩐지 일의 순서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120.5)
 사울의 이야기의 다른 부분들도 역시 순서가 맞지 않을 수 있을까? 제13장의 사울을 버림은 9-11장의 사울을 선택함과 기름부음 후에 바로 연결되어 있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9-11장에서 그는 그의 아버지의 집에 살며, 아내도 가족도 없는 청년이다. 그러나 13장(첫 절의 불명확한 순서와 함께)의 그를 버림에 대한 서술은 성년이 된 무사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있는 사울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거절의 두 이야기들 속에서 사무엘은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택하신 것을 이미 이루어진 사실처럼 말하고 있다(13:14; 15:28). 하지만 그 선택에 관한 공개적인 표현은 15장까지 기록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사무엘은 합당한 사람을 찾기 전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찔림과 질책을 필요로 했다. 요컨대, 사울의 생애의 주요 사건들이 순서대로 알려졌더라면 13장의 거절은 더 쉽게 이해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비록 사무엘의 출현이 사울을 지명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할지라도 저자에게는 사울을 버린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여기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이 긴 설명은 그가 한 것이 아니고 내가 한 것이다! (121.1)
 5. 최종적 거절이 아니라 조건적 거절? 비록 많은 주석가들이 13장은 사울의 가계의 왕통이 끝남을 뜻하고, 15장은 개인적 통치의 끝남을 뜻한다고 말할지라도 버림의 이야기가 두 번 나오는 것은 아직도 곤란한 문제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블레셋을 대항하여 싸우는(14장) 사울 안에서, 그를 통하여 계속 역사하신 사실은 첫째의 거절은 바뀔 수 있는 것임을 시사한다. 비록 성경이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15장은 사울에게 두 번째 기회인 것이다. 성경은 겉보기에는 최종적 심판 같지만 나중에 보면 조건적인 것이었던 예들을 제공하고 있는데, 니느웨를 쳐서 예언한 요나의 예언(욘 3:4, 10)과 예루살렘에 대한 미가의 예언(렘 26:18, 19; 미 3:12)이 그렇다. (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