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주장들이 안식일의 과거에 대한 랍비들의 관점이라면 안식일의 미래에 대해서는 랍비들이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랍비들의 글에서 안식일은 시간 안에 있는 영원의 섬이며 장래에 다가올 새 세계의 미리 맛 봄으로 나타나고 있다. 타밋 7:4는 레위인들이 안식일에 성전에서 부르는 시편의 노래인 시편 92편은 다가 올 새 시대를 위한 노래이며 전체가 안식일이고 영원한 생명 안에서 누리는 안식인 그 날을 위한 노래라고 선언한다.3 (70.3)
 이러한 관념과 밀접히 관련된 사상이 시편 90편 4절에서 추론된 우주적 주간에 관한 고대의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이 지구의 6천년의 역사 끝에 황폐의 일천년이 있을 것이며 이것은 노예가 해방되고 땅이 휴경되는 해방의 안식년에 부합한다(출 21:2; 23:11). 적어도 신구약 중간시대의 위경에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개념은 시편 92편 산헤드린 97a, b에 있는 종말론적인 안식일의 사상에도 연결되고 있다. 랍비 엘리에제르의 피르케 (Pirke) 제19장은 그 교리를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진술하였다. “거룩하신 분, 복 받으시는 분께서는 일곱 천년(Olamin)을 창조하시고 그 중에서 일곱 번째 천년만을 선택하셨다. 여섯 천년들은 전쟁과 평화가 오고 가는 시대이다. 그러나 일곱 번째의 천년은 오로지 안식일이며 영원한 생명 안에서의 쉼이다.”4 (70.4)
 종말론적인 안식일의 교리와 어느 정도 평형을 이루고 있는 사상은 잃어버림을 당한 지옥의 영혼들에게도 안식일에는 형벌이 유예된다는 사상이다. 안식일이 시작되자마자 지옥의 영혼들을 책임진 두마(Duma)라는 이름의 천사가 지옥의 영혼들에게 외친다. “지옥으로부터 나오라.” 그러면 영혼들이 풀려나고 안식일에는 재판을 받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송별하는 예배를 마치면 두마 천사가 다시 크게 외쳐 이르기를 “죽음과 혼돈의 그늘진 집으로 다시 들어가라”고 한다(Pesikta Rabbati 23:8). (70.5)
 랍비들이 하나님의 안식일 활동을 설명하기 위하여 소집되었다. 랍비 아키바(Akiba)를 순교시킨 로마의 총독 틴네우스 루푸스(Tinneus Rufus)가 아키바에게 이렇게 말했다.‘만약 너희들이 주장하는 대로라면 복 받으신 거룩한 분은 안식일을 존중하여 그 날에 바람도 일으키지 않고 비도 내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아키바가 부르짖었다: ‘그대여 어리석도다!’ ‘그것은 사람이 물건을 4규빗의 간격 만큼 옮기는 것이다’(Gen. R. 11:5; Pesikta Rabbati 23:8). 여기서 아키바는 에룹(Erub)의 규칙을 언급하고 있었다. 에룹의 규칙에 따르면 사람은 자기의 집에서는 모든 물건들을 옮길 수 있고 공공 장소에서는 4규빗의 거리만큼 옮길 수 있었다. 그런데 전체 우주는 하나님의 집안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안식일에 자신의 집 같은 우주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71.1)
 또 다른 예증에서는 세 명의 다른 랍비들이 로마를 방문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계명을 지키신다고 가르쳤을 때 그들의 반대자들을 침묵시킨 장면이 묘사되었다. 그 자리에 마침 한 종파적인 신앙인이 참석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랍비들이 자리를 떠날 때 그 랍비들에게 쫓아가 다음과 같이 조롱하였다. 당신들의 말은 거짓될 뿐이요. 하나님은 말씀하신 일을 이루신다고 당신들이 말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왜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소? 랍비들이 대답했다. ‘가련하도다. 사람은 안식일에도 자기 집 뜰에서는 물건을 나를 수있도록 허락받지 않았는가?’ 이에 그 사람이 ‘그렇소’ 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듣고 그들이 다음과 같이 그에게 말했다. ‘높은 곳이나 낮은 곳이 모두 하나님의 뜰이다. 그래서 이르기를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라고 하였다. 만약 사람이 자기의 키 만큼의 거리로 물건을 옮긴다면 그가 범죄하는 것인가?’ 그 사람이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였다. 그러자 그들이 말했다. ‘기록하였으되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고 하였다’(Ex. R. 30:9). (71.2)
 하나님의 안식일 활동을 위한 또 하나의 설명은 성전에서는 안식일에도 일하는 것이 허용되었으며 하나님에게는 전체 우주가 그의 성전이 된다는 것이다. “너희에게는 그 날이 거룩한 날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 날은 속된 날과 같은 날이다”(Mek Shabbata 2).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17절에서 “왜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말씀을 이같은 배경에 비추어 본다면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신성을 주장한 것이었다. (71.3)
 할라카(Halakah)에 나타난 안식일
 이제까지 우리는 안식일에 대한 유대인들의 믿음(학가다)을 살펴보았다. 이제는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규칙들(할라카)에 대하여 살펴보려 한다. 할라카에 대해서는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게 낯설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할라카의 그 힘겨운 계율주의에 대해서는 복음서들을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랍비들의 율법이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그 이전 시대의 유대교 분파들이 견지했던 더 엄격했던 할라카보다 훨씬 더 완화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다소 놀라게 될 것이다. 안식일 관습의 좀더 엄격한 여러 규칙들은 “희년서”“사독 문서”“사해사본”같은 그 전 시대의 비 랍비적인 문서들에서 뿐만 아니라 에세네파, 사마리아 종파, 팔라사파(Falashas)들의 기록된 관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5 (71.4)
 랍비들의 관습은 앞서의 더 엄격한 규칙들을 완화시킨 것이다. 랍비의 관습들은 이미 있던 더 엄격한 규칙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거나 또는 앞선 규칙들에 대해 예외 규정들을 만들거나 전반적으로 우회시키는 규정들을 추가함으로써 본래의 엄격성을 완화시켰다. 이러한 경향을 알려주는 여러 가지 실례들이 있다. 이른바 “옛”(Older) 할라카는 예레미야 17:22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집안으로나 밖으로 물건을 옮기지 못하도록 금했다. 그러나 미쉬나의 사바트(Shabbat) 1:1은 이를 우회적으로 해석해서 사람이 물건을 주고 받는 식으로는 안식일에도 물건을 집밖으로 옮길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사마리아파와 팔라사파와 카라이트(Karaites)파 사람들은 출애굽기 16:29절을 매우 엄격히 해석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사람들이 자기의 거처에서 나오지 못하게 금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안식일에 합법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정했다. 사도행전 1:12절에 언급된 대로 그들이 정한 “안식일에 가기에 알맞는” 거리는 2000규빗이다. 진실로 미쉬나에는 이동의 자유를 더 확대 시키기 위하여 예외 규정들을 함께 연결시킬 수 있도록 법률적인 의제(擬制)들을 묘사하고 있는 전체 논저들인 에루빈(Erubin)이 포함되어 있다. (72.1)
 몇몇 경우에 있어서 랍비들의 규칙들은 이전에 발생했던 종파들의 규칙들을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랍비들의 이같은 무시는 인간 생활의 불편을 줄이려하는 인도주의적 방향성을 견지하고 있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이미 이러한 완화의 추세가 형성되어 있었다. “사독 문서”의 안식일 규칙들에는 다음과 같은 규칙이 있었다. “안식일에는 누구도 동물의 출산을 도와주어서는 안되다. 그리고 만일 도랑이나 구덩이에 빠졌을 때 안식일에 그것을 끌어 올려서는 안된다. 그리고 만일 어떤 사람이 물이 있는 곳이나 어두운 곳에 떨어졌을 때 사다리나 줄이나 도구를 사용해서 그를 끌어 올려서는 안 된다”(13:22, 23, 26). 이같은 규칙은 예수님의 시대에 이미 바리새인들에 의해 거부되었고 번복되어 있었다. 우리는 누가복음 14:5절에서 이같은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러한 안식일 규칙들은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미 랍비들의 원칙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72.2)
 다음의 두가지 사례들은 한층 더 인상적이다. 희년서 50장 8절은 안식일에 “자기 아내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는 자는 누구든지” 안식일을 더럽히는 것이며 “죽여야 한다”고 했다. 사마리아파와 팔라사파와 카라이트 파의 원칙들도 같았다. 그러나 랍비들은 금요일 밤의 부부 관계를 격려했다.6 끝으로 사마리아 파, 에세네파, 팔라사파에서는 “안식일에는 너희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라”출애굽기 35:3절을 기초로하여 안식일에 전면적으로 불을 금지시켰다. 그리하여 이 종파들의 사람들은 금요일 밤을 어둠 속에서 보냈다. 그러나 랍비들은 이 금지 규정을 안식일에 불을 켜거나 끄는 것에 한정시켰다. 만약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램프 불이 켜져 있었다면 그대로 두어 불타게 할 수가 있었다. 사실상, 안식일의 램프 불을 켜는 것은 모든 가정에서 적극적인 의무의 하나로 간주되었다.7 (72.3)
 랍비들의 규칙들이 많아진 것은 그들이 율법들의 순종을 더 용이하도록 하기 위해서 기존 규정에 반대되는 경우를 설명하고 예외 규정들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73.1)
 안식일의 쉼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인정된 행동들
 안식일의 금지 규정에 대한 랍비들의 기본적인 인식은 안식일에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고의적인 행동을 안식일에 금지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마땅히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온 행동들도 상황별로 허용이 되었다. 안식일의 안식보다 우선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행동들은 대부분 예식적인 의무와 군사적인 행위와 생명을 구조하는 일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73.2)
 안식일보다 더 우선시되었던 예식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할례였다. 할례는 일반적으로 생후 8일만에 행해졌다. 랍비 갈릴리 사람 요세(R. Jose the Galilean)는 말하기를 “할례는 대단하다. 왜냐하면 할례는 너무나 중요해서 그것을 더럽힌 죄는 사멸로 처벌받는 안식일 규정에 대해서도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Mek. Amalek 3). 만약 생후 8일째 되는 날이 안식일과 겹치게 되면 안식일에 할례에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것은 합법적인 일이었다. 물론 이러한 경우를 위한 랍비 아키바(Akiba)의 규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규칙에 의하면 “안식일 전야에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안식일을 짓밟지 않는다. 그러나 안식일 전야에(예식적인 목적으로) 할 수 없는 활동은 안식일을 짓밟는다”(Shab. 19;1). 그러나 안식일의 할례가 합법적인 것이 되려면 아기가 정확히 안식일의 전날에 출생하여 8일째 되는 날이 안식일에 겹쳐야만 하였다. 만약에 아이가 금요일 해질 무렵에 태어나서 날 수의 계산이 복잡하게 될 때는 열흘째 날이 될 수도 있는 일요일까지 할례를 연기하였다(Shab 19:5). (73.3)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5절에서 지적하셨듯이 성전의 예식과 관련된 일들은 안식일에도 합법적으로 이행되었다. 심지어는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도 랍비들은 성전 봉사에 관한 규칙들을 주의 깊게 계속 보존하고 더 다듬기까지 하였다. 그들은 언젠가 성전이 회복되고 성전봉사가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을 계속적으로 간직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회중의 제사들은 안식일과 부정함에 대한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제사는 안식일이나 부정함의 율법들을 범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대 제사장의 구운 과자와 대 속죄일에 드리는 황소”는 예외이다. “그것들은 정한 시간에 드려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Temurah 2:1). 아키바의 규칙에 따르면 대 제사장의 구운 과자(레 6:21)는 안식일에 만들어진다 해도 합법적이지만 레위기 23:17의 떡 두 개와 진설 떡들은 안식일에 만들 수 없었다(Menahoth 11:2-3).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만약에 모세의 율법이 특정한 예식을 달력에 고정시켜 놓았다면 비록 그 날짜가 안식일과 겹쳐진다 할지라도 그 날에 예식을 지켰다. 유월절 전에 누룩있는 모든 떡을 치우고 태우는 일, 유월절 어린양을 잡는 일(그러나 굽지는 않았다), 그리고 레위기 23:10, 11절에 따라 유월절의 둘째날에 바칠 보리 한 오멜을 수확하는 일이 모두 이러한 행위들에 포함되었다(Pesahim 3:6; 6:1-6; Menahoth 10:1-3, 9). (73.4)
 이 문제는 달력의 날자를 정하는 일로 한 단계 더 완화되는 방향으로 후퇴되었다. 이미 잘 알려진 사실로서 유대력은 태음력이었고 적어도 탄나 시대(Tannaitic Period)에는 태음력 달력의 시작이 엄격한 시간 계산에 의하지 않고 달이 뜨고 지는 것에 대한 목격자의 증언에 의해 결정되었다. 산헤드린은 초생달이 뜬 다음날을 그 달의 초하루로 선포하였다. 그런데 산헤드린 법원은 이같은 결정을 위해 목격자의 증언에 의존하였다. 달력에 절기를 정하려면 달력이 정해져야 하고 그 일을 위해서는 달의 모습을 관찰한 목격자들의 증언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목격자들이 초생달, 특히 니산(NISAN)월이나 티시리(Tishri)월의 초생달의 출현에 대해 법원에 증언하기 위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러한 증언을 하기 위해서는 증언자가 안식일의 제한 거리를 넘을 수도 있었고, 그의 여행을 위하여 어떠한 필요 조치도 취할 수 있었다. 그가 걸을 수 없을 때에는 들것에 의해 실려 올 수도 있었다(Rose ha- Shanah 1:4, 5, 9). (74.1)
 마카베오 시대 이후부터는 안식일에 방어적인 전투행위가 허용되었다.(1 macc 2:29-41; 2 macc 8:25-28). 랍비들은 여호수아와 다윗이 안식일에도 전투를 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Gen.R.70:15). 그들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안식일이 지나 3일이 넘었으면 이방인의 도시를 포위하지 말라. 그러나 일단 포위공격이 시작되었으면 철수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샴마이(Shammai)도 이렇게 말했다.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그 성이 함락될 때까지 포위를 계속해야한다.(Shab.l9a). 이스라엘의 한 성이 이방인들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는 오직 필요불가결의 경우에 한하여 안식일에 정당방위를 위한 전투행위가 허용된다”고 유다 벤 바티라(Judah ben Bathyra)가 가르쳤다(Mek. Sabbata 1). 개인도 안식일에 정당 방위를 위해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방인에게나 도적에게 쫓길 경우에 그가 안식일을 범할 수 있다”(Num.R.23:l). 그러나 군사적인 지휘를 받고 있지 않은 사람이 안식일에 무기를 들고 나가서는 안 된다(Shab.6:4). (74.2)
 자기 방어는 안식일을 범할 수 있는 상황의 세 번째 유형에 속한다:즉 치명적인 위험(Pikkuach Nephesh)의 상황이 그것이다. 원칙적으로 말한다면 사람이 죽고 사는 긴급상황에서는 안식일을 범할 수 있었다(Maimonides, Code, Sabbath 2:1-25). 랍비 이스마엘(Ishmael)은 출애굽기 22:2에 근거하여. 그리고 랍비 엘리아자르(Eleazar)는 할례에 근거하여, 생명을 구해야 하는 의무가 안식일의 율법에 우선한다는 원칙을 이끌어내었다. 그리고 랍비 아키바는 살인범을 처형하는 처벌이 성전 봉사보다 우선한다는 사실에 기존하여 생명의 의무가 안식일의 율법보다 우선한다는 원칙을 주장하였다(Mek. shabbata 1). 살인범의 처형이 성전봉사보다 우선하면 살인범의 처형은 안식일보다도 우선한다. 왜냐하면, 살인범을 처형하는 것은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법이며, 생명을 구하는 것이 생명을 위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랍비 나단(Natan)은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라”출애굽기 31:16“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여 그 한 사람으로 하여금 수많은 안식일들을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안식일을 무시해야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였다(Mek.shabbata 1). (74.3)
 더 논란이 되었던 문제는 A.D 135년의 전쟁이 끝난 다음에 룻다(Lydda)에 있는 한 다락방의 비밀 집회에 현자들이 모여 다수결로 투표하여 결정한 사항이었다. 유대교의 신앙 생활이 법률로 금지됨으로써 많은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는 일로 순교를 당해야 했던 그 시점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의결하였다. “토라의 모든 율법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명령받기를 율법을 ‘범하여 죽지 말라’ 하면 우상숭배. 간음을 포함한 근친상간과 살인 이외의 범죄를 범하여 죽음을 피해도 좋다”는 것이다(Sanhedrin 74a). 랍비 이스마엘은 레위기 18:4(한글 개역성경은 18:5)의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한 말씀에 기초하여 이러한 결정을 옹호하였다(Sanhedrin 74a). 성경의 말씀이 규례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죽으리라고 하지 않고 규례를 행하여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죽기위해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살기위해 지킨다는 것이다. (7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