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언약신학 제 1 장 하나님의 언약의 목적
 바울의 이러한 선언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대조와 대체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를 부인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이 약속을 대체한다는 사상과는 달리 율법은 약속에 “더한 것”이라고 보았다. 비록 시내 언약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를 더하였지만, 그것은 오직 구원의 계획을 선명히 하기 위함이었다. 구속 역사는 구속의 더 큰 계획을 펼치는 점진적 계시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은 본질상 하나임을 깨달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제와 오늘과 영원토록 동일한 같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6.2)
 하나님이 맺으신 아담과의 언약(창 2:2-3, 15-17, 3:15), 아브라함 과의 언약(창 12장, 15장, 17장),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과의 언약(출 19-34장), 다윗 언약(삼하 7장)은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새 언약”(렘 31장; 겔 36장)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될 단 하나의 구속의 은혜 언약의 연속적인 국면으로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나니”(고후 1:20)라고 지적한다. (6.3)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에 대한 바울의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구약의 근본적 통일성을 의미 한다. 이러한 신학적 통일성은 에베소서 1:4(“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딤후 1:9; 벧전 1:20; 계 13:8과 비교)에 진술된 바와 같이 창세전에 이루어진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의 영원한 언약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6.4)
 타락 전에 하나님께서 낙원에서 인류와 맺은 언약은 근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타락 이후의 하나님의 언약은 낙원에서의 원 언약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사 11장 참조). 우리는 예수로부터 “창조 시에” 어떠하였는지, 즉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7.1)
 모세의 창조 기사의 신뢰성을 받아들인 그리스도는 창세기 1장2장에서 인용하셨다(마 19:4-5, 8; 막 10:6-8). 그는 구속의 역사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언약에 내재하는 목적을 이해할 수 있는 “열 쇠” 즉 하나님의 창조 언약을 우리의 손에 주셨다. 예수의 복음의 구속적 목적은 백성들을 그들의 원 언약 관계로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녀들이 다시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전 권능”(미 4:8; 6:8 참조)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7.2)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남자와 여자가 모두 “하나님의 형상”(창 1:27)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특별히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 의미에 대해 숙고해 왔다. 이 구절은 사람의 인격의 특별한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과 맺고 있는 인간의 독특한 관계를 증명하는 신학적 용어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저자는 후에 부자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같은 구절을 사용하였다.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대로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고”(창 5:3). (7.3)
 셋이 그의 아버지 아담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것처럼 아담은 그의 하늘 아버지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그는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사랑의 교통을 하며, 하나님을 그의 품성과 영감과 지혜의 모본으로 따라가도록 창조되었다. 이 관계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제칠일에 쉬신 목적을 말씀하시고 교훈하셨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사역을 완성하시고 그 자신의 쉼과 기쁨으로 들어가셨음을 의미한다. (7.4)
 간단히 말해, 하나님께서는 마치 선한 아빠가 그의 아들과 딸들에게 친밀하게 말하듯이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들의 과업, 즉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말씀을 주셨다. (8.1)
 인간은 창조주의 사역, 그의 지고하신 능력, 권위, 그리고 지혜를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의 즐거운 동역자가 되는 특권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창조주만이 인류를 위한 그분의 도덕적 의지와 선악의 기준을 정하실 자격이 있으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들의 조물주의 성품과 도덕적 의지에 일치하여 살도록 창조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순종과 불순종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이 낙원에서 누린 믿음과 책임을 창조 언약 혹은 에덴 언약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명한 권한과 시험이 되는 명령을 주시면서 그 자신과 직접적인 언약 관계에 있도록 하셨다(창 1:28; 2:15-17). (8.2)
 인간은 땅를 경작하고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을 다스리면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들은 도덕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유지해야 하는 과업을 부여받았다. 한 히브리 시는 이 책임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위대한 명예라고 찬사를 표했다.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5). 또 다른 시는 그의 모든 창조 사역에 대한 감사를 표한다. “나의 평생에 야훼께 노래하며 나의 생존한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시 104:33). (8.3)
 인간으로 하여금 이 땅을 다스릴 그의 명예스러운 대리자로 높여주신 창조주의 권한을 위한 이스라엘의 감사는 다함이 없다. 특별히 인간들을 매 주일 하나님과의 새로운 교제 안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은 창조주의 언약의 파트너가 누리는 최고의 경험이다(창 2:2-3). 하나님의 질서 있고 완전한 창조 사역 기사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강력한 동기부여를 한다(시 19:1-6; 104장 참조). (9.1)
 창세기 1장은 이스라엘이 천지의 창조주로서 경배하고 찬양하는 하나님을 향한 송영의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만이 이 인자하시고 도덕적인 창조주를 그들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안다. 창세기 1장은 지구상의 모든 남녀들에게 인간의 기원에 대한 그와 같이 영광스럽고 고상한 관점으로 새로운 자기 이해와 삶의 목적을 갖게 되도록 부르고 있다. 창세기 1장은 모든 사람들을 향한 보편적 호소이다. (9.2)
 안식일: 창조 언약의 예전적 표징
 하나님 없이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모든 것의 척도로 삼음으로 써 스스로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조물주와의 관계가 없이는, 훨씬 더 위험스러워짐에도 불구하고, 짐승의 수준에 머문다. 하나님 없이는 사람들은 자율적으로 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그들은 신령한 의식, 즉 거룩한 조물주에 대한 자신들의 소속감과 책임감을 상실하고 만다. (9.3)
 이와 같은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안식일을 창조 규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 2:2-3). (9.4)
 이 본문은 안식일이 창조 규례, 즉 완전하고 죄 없는 상태에 있는 인간을 위하여 마련된 원 창조의 일부로서 제정되었음을 밝혀 준다. 혹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으므로 모세 시대까지 안식일 준수 명령에 대한 성서적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몇몇 주석 학자들은 하나님의 모본 그 자체가 그의 명령으로서의 권위를 지닌다고 바르게 웅답하였다. (10.1)
 하나님은 첫 안식일을 인간과 함께 지키셨다. 왜냐하면 남자와 여자가 여섯째 날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들은 죄 없는 완전한 상태에서 그들의 조물주의 모본을 닮으라는 초청을 받았다(엡 5:1과 비교).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감추지 않으니 것과 마찬가지로(창 18:7), 그분은 축복된 안식일 쉼의 진리와 인류의 유익을 위한 그 거룩성을 아담에게 감추지 않으셨다. (10.2)
 칼 바르트는 창조의 안식일에 대한 의미심장한 신학을 진술하였다. 그는 “언약의 역사는 진실로 제칠일의 사건 속에 세워졌다”고 하면서, “분명히 의미하는 바는 피조물들, 특별히 사람은 제칠일에 하나님과 함께 쉬었으며 하나님의 자유, 안식 그리고 기쁨을 나누었다는 것이다. 그 때는 심지어 뒤로 미루고 멈추어야 할 어떤 일도 아직 없던 때였다. 그러므로 그 안식일의 자유와 쉼과 기쁨은 피조물 자신의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을 되돌아보는 것이 었다”14고 하였다. 창조 안식일에 대한 이러한 신학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 닮기(imitatio Dei), 즉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모본을 따라가는 신성한 의미로 초청받는다는 것을 뜻한다는 유대 전통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10.3)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서의 인간의 실체는 하나님 닮기(imitation Dei)로의 부르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칼뱅은 이러한 상관관계를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하나님 자신의 모본으로 어떤 사소한 자극도 주어지지 않는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모본을 따르도록 청하고 권하는 것 외에는 순종에 이르게 하기 위해 우리를 부드럽게 꼬이지도 않으시고 더 효과적으로 우리를 유혹하지도 않으시기 때문이다.”15 하나님은 안식일에 교제하기 위하여 자신을 주신다. (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