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창조와 구속과 소망의 축제) 8. 희망의 기쁨 (Charles Scriven)
 * Walla Walla College 신학교수.

 저서: The Demons have it (Southern Publishing Assciaton, 1976), Jubliee of the World:The Sabbath as a Day of Gladness, 1978. (75.1)
그런즉 안식일 안식(안식할 때)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 4:9)
(75.2)
 한 고대 전설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말씀하시기를 “나의 자녀들아 만약 너희가 율법을 받고 나의 계명을 지키면 나는 나의 소유 중에서 가장 귀중한 것을 영원히 너희에게 주리라”고 하셨다. (75.3)
 이스라엘은 묻기를 “그 귀중하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였다. (75.4)
 “내세이다” (75.5)
 그러면 “이 세상에서 내세의 본보기를 보여주십시오” 라고 이스라엘이 요청하였다. (75.6)
 “안식일이 내세의 본보기이다”1 (75.7)
 이 유대 전설은 안식일을 미래의 미리 맛봄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이 엄청난 희망의 진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은 하나님과 더불어 평안히 교제를 나누는 날을 대표했다. 그날은 축복과 평화의 날, 축제와 희년의 날이었다. 만약 우리가 지금의 안식일이 내세의 미리 맛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 앞에 놓인 것으로 말미암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고대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는 안식과 축복과 평화를 가득 싣고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75.8)
 앞의 전설은 고대 유대 문화에서 나왔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 문헌에서도 안식일에 대하여 같은 사상이 피력되어 있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신약 성경 히브리서의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 역사상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히 1:3)으로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선언을 자신의 주제로 삼고 있다. 이 기자는 히브리서에서 안식일을 미래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그는 기록하기를 “그러므로 안식할 때(안식일 안식, a sabbath rest)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히 4:9)고 하였다. 그는 독자들에게 말하기를 내세가 어떠할지는 오늘날 당신들이 안식일에서 경험하는 세계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76.1)
 예수님의 기별은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더불어 초창기 신도들에게 “기대된 경이, 황홀한 기쁨, 활기찬 신뢰”2 의 정서를 주었다. 초기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끝없는 평화의 도래에 대한 희망이요 믿음이었다. 히브리서는 안식일이 어떻게 내세를 가리키는 지를 인정하고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일의 절정에서 하나님 자신의 안식을 그가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로 더불어 나누셨고 이로써 인류에 대한 자신의 친교와 우리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에 연결시키려는 결의를 선포하셨다. 그때 이후로 안식일은 이 약속을 온 우주에 알리는 신호로 역할해 왔으며 매 안식일은 신자들에게 희망을 쌓아 왔다. (76.2)
 다시 한번 우리는 어째서 안식일이 기쁨의 선물이며, 어째서 그날이 우리의 심령을 기쁘게 하는 휴일이 되는지를 보게 된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우리의 희망을 쌓아 올림으로써 그것 없이는 우리의 삶으로 경험할 수 없는, 그것 없이는 문자 그대로 죽게 되는 어떤 무엇을 강화시킨다. (76.3)
 그러나 희망이란 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 비엔나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 빅토르 프랑클(Viktor Frankl)은 독일의 한 집단 수용소에서 희망이란 것이 그토록 중요하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어느날 동료 포로 한 사람이 비밀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가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한 음성이 있어 약속하기를 무엇이든지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대답해 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 집단 수용소가 해방되겠느냐고 질문하자 겨우 몇 주일을 앞에 둔 3월 30일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수용소의 참혹한 상황 속에서 그 사람은 그 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3월 30일이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전적으로 확신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막상 그날이 이르러 포로들이 들은 독일 뉴스는 이전과 다른 것이 없었다. 그 사람은 덜컥 병에 걸렸다. 최후의 날이 지나 그의 모든 희망이 부서진 그 다음날인 3월 31일에 그 사람은 죽었다. 신체적인 원인은 발진티푸스였다. 그러나 프랑클 의사는 감염에 대한 그 사람의 저항력을 떨어뜨린 것은 갑작스런 희망의 상실과 극심한 실망감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와 유사한 다른 여러 경험들과 이 경험을 묶어 생각할 때 그는 우리가 인생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게 될 때 인생을 잃기 시작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3 (76.4)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안식일이 생명을 증진시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매 안식일은 우리가 미래로부터 기대할 것을 더 많이(더 적게가 아니고)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 안식일은 우리의 전체 사람이 약속의 빛 안에 서 있다는 것을 증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미래 지향적인 관점과 미래 지향적인 행위를 갖게 하고 있다. 안식일은 우리를 집단 수용소에 있던 그 사람이 겪었던 쓰라린 낙망 감으로부터, 사실상 신체를 병들어 죽게 했던 그 절망감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한다. (77.1)
 그러나 그뿐이 아니다. 안식일은 단념으로 부터 우리를 구출한다. 육신만이 멀쩡한 채로 정신을 죽게하는 여러 가지 것들을 침울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삶에서 우리를 구출한다. 안식일은 우리를 쿠르트 폰네쿠트(Kurt Vannegut)의 한 작품에 등장하는 한 인물의 태도와 같은 것으로 부터 해방시킨다. 이 사람은 친구로부터 전쟁을 반대하는 내용의 책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차라리 빙하를 반대하는 책을 쓰지 그래?하면서 쏘아 붙였다. 우리는 이 사람처럼 비극을 중지시키고 삶의 질을 높이려는 노력은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우리의 모든 마음과 힘을 다해 그러한 과업에 매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축복과 평화가 하나님의 백성을 기다리고 있다고 선포하고 있다. 우리의 개인적인 관계와 공동체의 형편과 심지어 세계의 정세를 개선 시키려는 우리의 노력을 안식일은 정당화하고 있다. 어느 위대한 그리스도인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희망은 우리에게 “가능한 것에 대한 열정”4을 준다. (77.2)
 그렇다면 안식일 희망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안식일 희망은 완전한 경탄과 고마움을 기뻐하고 붙잡을 수 있는 보석 같은 것이다. 희랍문명의 황금시대에서도 안식일 희망을 닮은 것은 찾아 볼 수 없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고대의 정신을 사로잡았던 극작가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에서 자신의 결정으로 말미암아 처음에는 여주인공 안티고네의 자살을 초래하고 그 다음에는 자신의 아들의 자살, 그 다음에는 자기 부인의 자살로 이어지는 한 군주의 비극적인 삶을 묘사하였다. (77.3)
 “아! 어떤 운명이 또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인가?” 하고 비탄에 빠진 이 남자는 울부짖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차라리 죽기를 기도하였다. 죽음이야말로 그에게는 “모든 것 중에 최선의 운명”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창은 그에게 중지하라고 말한다. “그대여 더이상 기도하지 말라. 유한한 인간은 정해진 재앙을 피할 수 없다”.5 (78.1)
 달리 말해서 고대 희랍인들은 나쁘게 될 일들을 셀 수 있다고 생각했다. 로마제국에서도 동일한 감정이 존재했다. 예컨데 기원후 2세기의 로마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전혀 좋은 뉴스를 주지 않았다. “이세상에는 항상 있어왔던 악들보다 더 많거나 더 적은 악들이 존재하는 일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고, 장래에도 없을 것이다”라고 그는 비관적으로 기술하였다. 그리고 그보다 1세기 가량 후대에 살았던 로마의 철학자 플로티누스(Plotinus)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는 인간의 관심사와 그 관심사의 기억이 없어질 때 만사가 최상이다”6 라고 하였다. (78.2)
 만약 우리가 우울한 사람들이 미래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는 지를 이해한다면 기독교의 기쁜 소식이 실로 얼마나 좋은 것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초대 교회의 전도자들은 “이같은 절망적인 이야기는 믿지 말라”는 말을 설득력 있게 하였다. 당신은 사람이 죽을 때 만사가 최상이라는 사상을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사셨으며, 죽으셨으며, 무덤을 부수고 나오셨다. 그리고 우주의 통치자로 다시 살아 계시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들은 당신들에게 전할 새로운 말을 가지게 되었다. 당신은 약속의 빛 안에서 당신의 삶을 살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의 찬바람나는 정신을 내던지고 풍요와 기쁨의 정신으로 옷 입을 수 있다. (78.3)
 히브리서의 기자는 그가 “안식일 안식이 아직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4:9)고 썼을 때 바로 이같은 확신을 전하고자 하였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는 영원한 안식일의 안식과 축복과 평화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다. 사랑과 친교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될 때 그 날이 오는 것이다. (78.4)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제칠일 안식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성경이 정확히 기술하고 있는 아름다움이다. 만약 우리가 일주일의 끝에 기쁨의 희년을 갖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매 주일의 순환이 미래로 향한 우리의 운동 감각을 강화한다. 만약 주간의 6일이 안식일 안식과 평화를 향한 여정이라면 그것은 삶의 모든 것이 쉼과 평화로의 여행이라는 우리의 확신을 고양시킨다. 안식일은 우리가 삶에 대한 우리의 열정을 강화시키면서 어디론가로 가고 있다는 인식을 높여준다. 미래의 평화와 기쁨은 지금 여기에서 대변혁을 일으키는 원리가 되어 우리의 시야를 확대시키고 우리의 생존에 활력과 방향을 주고 있다. (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