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증 5. 구원에 대한 바울의 확증
 구원의 두 가지 개념에 대한 이 철저한 대조는 하나님의 가납하심에 대한 우리의 확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분의 택하심과 선택하는 사랑이 우리의 구원을 보장한다. 바울은 끊임없이 이렇게 강조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그는 “율법의 행위”를 공로를 구하는 행위로 규정하고 “율법 행위에 속한” 모든 자들은 “저주 아래”(갈 3:10) 두었다. 다른 역본들에는 이렇게 되어있다: “율법을 준수하는 데 의존하는 모든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NIV) 혹은 “율법의 행위에 의존하는 모든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NRSV). (78.3)
 바울은 율법 자체를 저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런 일은 절대 없다! 그는 율법이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 것(롬 7:12 참조 갈 3:21)으로 묘사했다. 아니, 그는 두 가지 상호 배타적인 칭의의 개념, 두 가지 구원의 방법, 곧 율법 준수나 혹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의 개념을 분명히 하길 원했다. 그는 이것을 이런 말로 요약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따라서 바울은 율법을 은혜와 대조시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율법 준수를 통해 칭의를 얻으려는 시도와 그런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허락을 대조시켰다. (78.4)
 바울은 구원을 향한 두 길이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부인했다. 인간은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즉 회개한 죄인에게 전가된 예수의 의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통해서—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다: 즉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롬 3:22)인 것이다. 이 복음은 바울의 전반적인 신학과 경건, 그리고 후에는 루터의 신학과 경건을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하나님께 자신들이 가납되기 위해 자신들의 노력에 기대를 걸었던 많은 그리스로인들의 생각과 신앙을 지금도 여전히 자유케 하고 있다. (79.1)
 다음에 나오는 자서전적 구절은 칭의가 영원한 구원의 유일한 확증이라는 바울의 강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탁월한 중요성을 띤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선행을 신뢰하거나 자기가 성취한 것들의 공로에서 안전을 찾지 않았다는 사실을 빌립보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79.2)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7-9).
(79.3)
 바울은 이 구원하는 진리를 구약의 두 역사적인 실례, 곧 아브라함과 다윗(참조 롬 4:1-8)의 경우로 예증했다. 이 두 히브리 신자들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칭의의 선물을 받았다(참조 창 15:6; 시 32:1, 2). 바울은 기독교와 히브리 신앙의 본질적인 연속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이 본문들에 호소했다.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이다. (80.1)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화
 “율법과 상관없이”(apart from law) 얻는 칭의에 대한 강조 때문에 바울은 무법주의 복음을 가르친다는 비방을 받았다(참조 롬 3:8; 6:1, 15). 그의 대적들은 악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었다는 그의 기별이 단지 죄를 더욱 조장했을 뿐이었다고 주장했다(롬 4:5; 갈 2:17). 그러한 이의는 바울이 틀에 박히고 철저히 법률적(율법적)인 칭의의 교리를 가르쳤다고 가정할 때에만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17-20에 나타난 바울의 대답은 복음에 대한 그러한 해석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갈 2:17)고 말했다. (80.2)
 바울은 예수에 대한 믿음이 예수와 함께 하는 영혼의 변화시키는 연합을 의미한다고 설명함으로써 거짓 고소를 논박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따라서 바울은 내재하는 그리스도의 변화시키는 능력(참조 엡 3:17)을 지적함으로써 율법폐기론의 도전에 응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회개한 죄인에게 단순히 그의 의를 전가하거나 혹은 의롭다고 간주하지 않고, 그것을 나누어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의가 용서받은 신자의 영혼과 생애 속으로 들어간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이것은 칭의와 성화사이에 유기적이고 살아있는 연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믿음과 사랑 사이에 윤리적 원동력을 확립한다. (80.3)
 바울은 이 관계를 로마서 5-8장에서 발전시켰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어떤 특정한 열매들—하나님으로 더불어 누리는 화평, 하나님과의 친교,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는 소망의 즐거움—을 통하여 그것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먼저 설명했다(참조 롬 5:1, 2). 그리고 그는 신자의 생애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능력을 지적했다: 성령이 하나님의 사랑과 영생에 대한 개인적 확증으로써 마음속으로 들어가셨다(롬 5:5).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6, 17, 강조 첨가). 예수를 믿는 개개인은 자신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특유한 확증을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받았다. 이 확증은 우리의 성화된 생애나 혹은 우리의 어떤 공로에 의존하지 않고 전적으로 예수 안에서 얻는 하나님의 칭의의 선물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답례로서 논쟁이 아닌 감사와 그분의 영원하신 자비를 찬양하는 경배를 기대하신다. (81.1)
 바울은 우리의 칭의로 인한 재확신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준다: (82.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1, 2, 33, 34, 강조 첨가).
(82.2)
 확증에 대한 바울의 신학은 이 모퉁이 돌 위에 놓여 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데,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통치와 제사장적 주권 아래 놓이기 때문이다(참조 골 1:13). 이 위안이 되는 기별은 사도적 복음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82.3)
 칭의는 우리의 그리스도인 노정(路程)에서 단순히 첫 발자국 이상의 역할을 한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위하여 그것을 매일 필요로 한다. 신자들의 끊임없이 계속되는 범죄 행위 때문에 그분의 하늘에서의 중보는 필수적이다. 첫 세기의 마지막에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1, 2). (82.4)
 요한은 신자들이 “죄 없다 하면” 안 된다고 경고했는데, 이는 그렇게 할 경우 자신들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요일 1:8). 우리의 모든 예배가 “인간성의 타락 통로들을 통해” 더러워지기 때문에 심지어 우리의 기도와 찬양도 오직 정결케 하는 예수의 보혈을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가납될 수 있다. 엘렌 화잇은 이렇게 외쳤다: “아, 순종과 회개와 찬송과 감사로 드리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의의 달아오른 불 앞에 놓여져야 한다는 것을 모든 영혼이 깨닫게 될 때가 올 것이다.”4) 우리의 구원의 확증은 하나님의 율법의 완전하게 순종하는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거룩한 삶과 이타적인 삶에도 달려 있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의 호의를 누리며 그분의 계명을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우리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에 대해서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대치물이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실 것인가를 염려하여야 한다. 그대들은 사랑하시는 주님 안에서 받으신 바 되었다.”5) (83.1)
 영생에 대한 우리의 절대적 확실성은 예수를 우리의 대표자와 대속물로 삼으신 하나님의 선택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모든 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 안에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 14, 강조 첨가; 참조 고후 5:5). (83.2)
 따라서 성령의 현재적 선물은 차고 넘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얻도록 계획하신 것—다가오는 영광에 대한 하나님의 맹세 혹은 서약—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위안으로 이것을 더 설명했다: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롬 8:23, 24). 따라서 기도교적 확증은 우리의 현재는 물론 미래의 구원 둘다를 포함한다. 성령의 선물은 영광스런 “구속의 날까지” 마음에 받게 될 하나님의 인이다(엡 4:30). (84.1)
 성화된 생애 없이 우리가 칭의를 얻을 수 없는데, 이는 예수께서 나누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를 영접했다는 것은 칭의, 성화, 그리고 영화를 얻었다는 뜻이다(참조 고전 1:30; 롬 8:29, 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는 뿌리이고 성화와 영화는 열매이다. 엘렌 화잇은 이런 식으로 그 관계를 묘사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의는 입혀 주신 의요, 성화하게 하는 의는 그리스도께서 나눠주시는 의이다. 전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증서이며 후자는 하늘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우리의 적합성이다.”6) (84.2)
 구원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이상
 스가랴 선지자의 이상은 아마도 구원의 과정에 대해 가장 생생한 예증이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부터 막 귀환했다. 스가랴는 성전봉사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한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사자 앞에 서 있는 것을 본다. 사단은 여호수아의 우편에 서서 그를 고소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사단의 고소를 상징한다. (8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