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증 5. 구원에 대한 바울의 확증
 바울은 자기 자신의 구원의 경험과 바리새인이라는 배경의 관점에서부터 자신의 복음 기별을 체계화 했다. 세 번에 걸쳐서 그는 핍박자 사울에서 제자 바울로의 자신의 극적인 개심을 묘사했다(행 9; 22; 26장). 이 증언은 기독교의 기초를 놓은 대들보들 중 하나로 남는다. 열심당 바리새인이요 산헤드린 회원으로서 유대 기독교인들을 체포하고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여정에 있던 사람이 구약을 묵상함으로써, 혹은 필사적으로 행위의 의를 쌓음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대신 그의 기독교 신앙은 부활하신 주님과의 개인적 만남으로부터 생겨났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영광스런 존재이심을 보았고, 그에게 개인적으로 묻는 그의 음성을 들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가 “주여 뉘시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대답은 이랬다: “나는 ∙∙∙ 나사렛 예수라”(행 22:7, 8). (73.1)
 이 조우는 다소 사람 사울(Saul of Tarsus)로 하여금 자신의 바리새적 신학과 경건을 재고하도록 했다. 거룩한 메시야로서 예수의 부활이라고 하는 압도적인 실체는 사울에게 메시야적 예언들에 대한 다른 전망을 주었다. “사울은 그에게 말씀하신 분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야요, 이스라엘의 위로와 구속주이신 나사렛 예수이심을 의심하지 않았다.”1) 복음의 진리에 대해 그에게 확신을 준 것은 사도들의 증거가 아니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2). 부활하신 주님과의 역사적 조우는 바울에게 자신의 구원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름 받았음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증을 주었다. 모든 의심은 바로 그 신성한 계시의 순간에 사라졌다. 엘렌 화잇은 이렇게 설명했다: (74.1)
그런데 예수께서 지금 친히 나타나서 계셨으므로 사울은 제자들의 주장이 진실함을 확신하게 되었다. ∙∙∙ 이제 사울은 약속된 메시야가 나사렛 예수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2)
(74.2)
 바울의 변화시키는 복음
 바울의 종교교육은 자신의 사도 서신들의 특별한 부담에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그의 신학의 근본적인 변화는 그로 하여금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율법을 행함으로 말미암는 구원과 대조시키도록 독려했다. (“율법”에 대한 그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인식된 것처럼 하나님의 도덕률까지 포함했다.) 율법 중심적 신학과 경건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구원과 생활방식으로의 변화는 그의 철저한 개심의 핵심을 이루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공로를 구하는 것이 이스라엘 선지자들의 기별을 오해하고 하나님의 율법의 광범위한 주장들을 곡해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의 율법 중심적 신학과 경건에 대한 거부가 하나님의 율법의 손상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는 예수께서 “아버지의 율법을 옹호하시려는 분명한 목적”3)을 위해 오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옛 언약에 대한 랍비들의 이해가 어두웠으며 심지어 이스라엘의 메시야에 의해 드러난 통찰력을 가로막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74.3)
 바울은 자기 당대의 유대인들의 억압된 상태를 모세의 얼굴에서 비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수건을 쓰도록 그에게 요구한 이스라엘 백성의 그것과 비교했다(고후 3:13; 출 34:33). 바울은 이 자아 보존의 정신을 자기 시대에도 여전히 존재한 마음의 둔감함으로 해석했다: (75.1)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후 3:14-16).
(75.2)
 바울은 랍비적 전통(후에 탈무드에서 성문화됨)에 입각하여 성경을 읽는 것은 모든 행위의 의(works-righteousness)와 자기 칭의(self-justification)로부터 메시야적 구원이라고 하는 단지 희미한 견해만을 준다고 계속해서 말했다. 구원에 관해 그가 가진 종전의 이해는 그리스도 예수의 변화시키는 기쁨과 자유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는 이 차이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76.1)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76.2)
 바울은 이제 성령을 통해서 얻는 구원의 기쁨과 부활하신 주님과의 증대되는 친교의 기쁨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자유와 기쁨을 자신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오히려 모든 기독교 신자들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다고 말했다(참조 18절). 이 구절은 바울의 확증의 복음을 전달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식과 은혜 안에서 영원토록 증대되는 성장을 공급하는 복음이다. (76.3)
 그리스도인들이 얻는 빛, 예수에게서부터 비쳐오는 빛은 심령을 밝히고 영혼을 소생시킨다. 바울은 심지어 복음의 능력을 태초에 있었던 하나님의 창조 행위와 비교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만약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하신다면, 그 복음에 대한 지속적인 거절은 초자연적인 마귀의 눈멀게 함의 결과로서 생기는 것이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76.4)
 바울의 논쟁적 진술
 율법 준수를 통한 구원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구원 사이의 근본적 대조를 분명히 하기 위해 바울은 신자가 어떤 율법 준수도 없이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강조했다: (77.1)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예수]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77.2)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0, 21, 28).
(77.3)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5, 16).
(77.4)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77.5)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갈 3:11).
(77.6)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 9).
(78.1)
 바울은 우리의 신중한 주의를 요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모세와 시편들과 선지자들에게 호소했다: 창세기 15:6; 시편 143:2; 하박국 2:4. 구약의 이 세 구절을 바울이 사용한 방법을 자세히 비교해 보면 은혜와 행위의 대조를 더욱 예리하게 강조하는 개인적 어조를 계속 첨가한 것을 알 수 있다: “율법 외에”(롬 3:21);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롬 3:28);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9). (7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