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쉬운 요한계시록 제5장 교회들에게 보낸 기별 (제2부)
 예수님은 빌라델비아교회에게 자신을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계 3:7)로 제시하신다. “거룩하신 이”는 구약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이다(사 43:15; 57:15; 합 3:3). 신약에서 “거룩하신 이”는 예수님을 지적하는 표현이다(막 1:24; 요 6:69). 예수님은 또한 “진실하신 자”(계 3:14; 19:11)이므로, 교회는 전적으로 그분께 의존 한다. 그분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고,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은 이사야 22:22을 넌지시 가리키는데, 이 구절은 히스기야 왕의 수석 청지기였던 엘리아김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엘리아김에게 왕궁의 열쇠가 주어졌으므로 그는 왕의 전권을 행사하였다(참고 사 22:20~24). 이와 같이 예수님도 하늘 창고에 대한 전권과 재량권을 가진 분으로 자신을 교회에 나타내신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예수님은 그와 같은 위대한 약속들을 그분의 교회에 하실 수 있다. (83.1)
 예수님으로부터 아무런 칭찬도 받지 못한 사데 교회와는 대조적으로, 빌라델비아 교회는 아무런 책망도 받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의 행실을 알고 계셨다. 즉 그들은 그의 말씀을 지켰고 그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다(계 3:8b). 서머나의 신도들과 마찬가지로 빌라델비아 신도들도 유대인들의 반대로 고통을 당했다. 이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그러지 않았고, 실제로 그들은 “사탄의 회당”(the synagogue of Satan, 2:9)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협하는 사탄의 일을 행하고 있었다(계 3:9).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그들의 반대자들을 처리하고 계신다고 그 교회에게 보장하신다. 그들을 해치는 자들이 하나님이 그 교회의 신도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날이 이르러오고 있다. (83.2)
 빌라델비아 교회는 충실하기는 했으나 힘이 없었다. 이 교회는 영적으로 강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어떤 구체적인 죄나 이단적 교리를 지적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사데 교회의 상황과 흡사하게 보였다. 즉 그들 주변의 이교적 환경의 매력이 그들의 영적 생애와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 교회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앞에 기회의 문을 열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예수님은 이 연약한 빌라델비아 교회를 위하여 문을 열어주시면 원수의 모든 세력이 그것을 닫을 수 없을 것이라고 보장하셨다. (83.3)
 그들이 항상 예수님의 인내의 말씀을 그들의 눈앞에 두고 살아왔으므로, 예수님은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 3:10)고 예수님은 약속하셨다. 요한계시록에서 쓰인 땅에 거하는 자들은 악인들을 가리키는 일상적인 표현이다. 악인들에게 임할 시련의 때는 짐승의 표를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부으실 마지막 일곱 재앙과 관련된 것이다(계 15-16). 예수님은 이 시련의 때 동안에 그의 충성된 백성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보호해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84.1)
 예수님은 속히 오신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신도들이 그들이 잡은 것을 굳게 붙잡아 아무도 그들의 승리의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예수님은 권고하신다(계 3:11). 비록 연약할지라도 그들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직도 타고 있는 충성의 불을 밝혀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사탄이나 사람들이 그 충성된 자들을 위해 준비된 면류관을 탈취할 수 없을 것이다. (84.2)
 이기는 자는 새 예루살렘의 성전에 영원한 기둥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그 기둥에 새길 것을 약속하셨다. 지상의 성전에서 기둥들은 안정성과 영구성이 있게 하였다. 신약에서 기둥들은 교회에 대한 상징이다(딤전 3:15). 충성된 자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그분을 섬길 것이다(계 7:15). (84.3)
 빌라델비아 교회의 상황은 18세기와 19세기의 그리스도교의 상황과 일치한다. 이 시대는 개신교의 큰 부흥이 특징을 이룬 시기였다. 여러 종류의 부흥운동을 통해 그리스도의 구속하시는 은혜를 믿는 진정한 믿음이 재생되었고, 그 결과로 그리스도인들 간의 친교와 자아희생의 정신이 회복되었다. 이 시기의 교회는 복음을 온세 상에 전파하려는 진정한 갈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결과,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위대한 복음의 전파가 이루어졌다. (84.4)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낸 기별 (3:14-22)
 일곱 기별 중의 마지막 기별은 라오디게아(Laodicea, 현재 터키의 에스키히사르 [Eskihisar]) 교회에 보내졌으며, 이 도성은 빌라델비아에서 남동쪽으로 약 45마일(76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85.1)
 성경절 : 요한계시록 3:14-22

 (85.2)
 라오디게아(Laodicea) 도성
 라오디게아는 에베소와 시리아를 연결하는 주요 통상 도로상에 있는 뤼쿠스 계곡(Lycus Valley)에 위치해 있었고, 히에라볼리(Hierapolis, 골 4:13)와 골로새(Colossae, 골 1:2) 도성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러한 유리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라오디게아는 고대 소아시아에서 중요한 통상과 재정 중심지들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라오디게아는 대단히 부요했다. 대부분의 부(富)는 의류 생산 사업과 금융 거래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라오디게아는 고품질의 부드럽고 윤기 나는 흑색 양모로 매우 유명했는 데, 이 양모는 다양한 종류의 의복과 양탄자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으며, 이 제품들은 전 세계에 수출되었다. 이러한 상업적 번영을 통하여 이 도성은 금융사업의 대중 심지가 되었고, 그리하여 대량의 금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는 의과대학으로 유명했는데, 이 대학은 라오디게아가 위치한 브루기아 지방의 광 물질 가루(Phyrigian powder)와 올리브유(olive oil)를 배합해서 만든 연고로써 눈병을 치료했기 때문에 고대 세계에 평판이 자자(藉藉)했다. [이 안약은 갈레노스(Claudius Galen, 그리스의 의사, c. 130-200) 시대에 사용하던 것으로서, 어떤 화학적 조합으로 그것을 제조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역자 주] (85.3)
 이러한 상업적, 재정적, 산업적 번영과 성공으로 라오디게아의 부유한 시민들은 오만한 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AD 60년경에 있은 지진으로 이 도성이 황폐화했을 때,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dius)에 의하면, 그 시민들은 너무나 부유하고 자존심이 강해서 로마제국이 제공하는 원조를 보란 듯이 거절하고, 자신들의 자금으로써 그 도시를 재건하였다고 한다. 이 도성의 이와 같은 오만한 정신은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침투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3:17). (85.4)
 번영과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는 물 공급에 큰 문제가 있었다. 6마일(9.6 킬로미터)이나 되는 수로를 통해 인근에 있는 히에라볼리에서 오는 물을 공급받았고, 또한 산에서 내려오는 찬물의 근원인 골로새에서도 물 공급을 받았다. 히에라볼리의 뜨거운 샘에서 오는 물이든지 골로새의 찬물에서 오는 물이든지, 이 도성에 도달 할 때쯤에는 수로 안에서 모두 미지근한 물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상황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은유적으로 미지근하다는 책망을 받은 배경이 되었다. (85.5)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예수님의 기별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예수님은 세 가지의 명칭, 즉 “아멘, 충성되고 참된 증인,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계 3:14)으로 자신을 소개하신다. 아멘(àmēn)이란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온 것으로 기본적으로 “진실로”(in truth)라는 뜻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진리[아멘]의 하나님”(사 65:16)으로 일컬어지셨다. 모든 것을 분변(分辨)하시는 예수님의 증언은 이 교회의 실제적인 상태를 드러낸다. 무(無)로부터 무엇이든지 창조해 내시는 그분의 능력만이 온전히 헌신하지 않고 미지근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이 교회를 위한 유일한 희망이다. (87.1)
 이 교회가 그와 같이 나쁜 상태에 있었으므로, 예수님은 그들에 대하여 한 가지도 긍정적으로 말씀한 것이 없다. 놀랍게도 그 교회의 신도들은 어떤 특정한 죄나 배교나 이단 교리에 빠졌다는 책망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어떤 교회도 이와 같이 혹독한 견책을 받은 적이 없다. 예수님은 이 교회를 그 도시에 공급되는 물에 비유하셨다. 그 교회의 신도들은 신선한 찬 물도 아니고,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물과 같았으며, 예수님은 그와 같은 물을 그의 입에서 토하여 내치려고 하신다(계 3:16). (87.2)
 번영과 부를 달성하여 자만하고 나태한 이 도시의 분위기를 닮은 이 교회는 미지근하고 나태한 상태에 있었다. 그 교회의 신도들은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처 했다. “나는 실제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내가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가 없으리라”(호 12:8)라고 말한 구약시대의 에브라임과 같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도들은 자신들의 부함을 하나님이 주신 은총으로 생각했다. 가난 했지만 영적으로는 부하던 서머나의 그리스도인들과는 대조적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도들은 재물이 많고 부요했으나, 실제로는 비참했고, 영적으로는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였다(계 3:17). 여기에 사용된 프토코스(ptōchos)라는 그리스어는 그들의 극심한 가난을 의미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태에 눈이 멀어 있었다. 그들은 안약으로 유명한 도시에 살고 있었으나 공교롭게도 그들의 영적 눈은 멀어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속고 있는 교만 때문에 자신들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87.3)
 예수님은 이 교회가 세 가지를 사도록 권고하셨는데, 그 첫째는 불로 연단된 금이다. 베드로의 말씀에 의하면, 불로 연단된 금은 시련 속에서 끝까지 견뎌 이김으로써 입증된 믿음을 상징한다(벧전 1:7). 이렇게 한다면 라오디게아 신도들은 진실로 부요하게 될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은 흰옷을 사서 그들의 비참한 상태를 가리라고 권면하셨다. 옷은 구원의 상징이다(계 3:4-5; 7:9-10, 13-14). 이사야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라(사 61:10)고 외쳤다. 깨끗하고 흰옷을 입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계 3:4; 마 22:11-14). 탕자의 비유에서, 그 방탕한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왔을 때, 그 아버지는 헐벗은 아들을 제일 좋은 옷 으로 입혀 주었다(눅 15:22). 마지막 시대에 아마겟돈(Amageddon) 전쟁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는 동안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옷이 주어질 것이다(계 16:15-16). (88.1)
 셋째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그들 자신의 진정한 영적 상태를 보라고 예수님은 권장하신다(계 4:13). “나의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라고 시편 기자는 기도하였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신도들 을 위해 “지혜와 계시의 영을 저희에게 주시어, 저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그 성도들의 영광의 기업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엡 1:17-18)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라오디게아의 그리스도인들이, 한편으로는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바라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유업(遺業)의 엄청난 부요함을 바라볼 수 있도록 그들의 영적 눈을 띄우기 위하여 성령의 분별하는 능력을 받아야 한다. (8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