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Johnsson,
In Absolute Confidence, 91.
2) Dulles,
Models of the Church, 20.
3) Ibid.
4) 마 21:33~42(집주인과 농부의 비유)과 43절(해석), 마 22:1~13(혼인 잔치의 비유)과 14절(해석), 마 25:1~12(열처녀의 비유)과 13절(해적)을 비교해 보면 같은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5) 예컨대, 단 4:10~17(「새미국표준성경」으로, 큰 나무에 관한 느부갓네살의 꿈을 회고하는 내용이 55 줄임)과 22, 25, 26절(5줄의 해석), 그리고 단 7:2~14(「새미국표 준성경」으로 75줄의 이상)과 17, 18절(약 5줄의 해석)을 비교하라. 단 7장의 나머지 부분에 추가적으로 확대된 해석은 다니엘의 요구로 나타났고(참조 19절), 따라서 선지자의 요구가 없었으면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6) Dulles, 21.
7) Ibid.
8) Ellen G. White, in
Signs of the Times, June 28, 1899.
9) _____, 부조와 선지자, 354.
10) Ibid. 353, 354.
11).
New Catholic Encyclopedia (1967), s. v.
“Eucharist,” by W. F. Dewane을 참조하라. 이 논고는, 예수께서 자기가 곧 포도나무라고 확언한 요 15:1 같은 경우를 언급하면서 마 26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의 문자성에 너무 치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기고자는 흥미있는 전환을 하여,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그 말씀들을 문자적인 의미로 하지 않았다면 그것에 따른 은유들은 상당히 혼란을 일으키며 필요 없게 될 것이 명백하다”(602쪽)고 주장한다. 이 논고는, 마지막 만찬이 제의적인 식사였기 때문에 상징이 제외되어야 한다는 개념을 통해 그리스도의 말씀의 문자성을 추론해 낸다(Ibid.).
12) Walter R. L. Scragg.
Such Bright Hopes (Ha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Pub. Assn.. 1987), 40.
(8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