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성소 (재림교회 신학의 심장) 제 4 장 하늘 성소를 개념화함
 그런데도 공공연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에 하나님께서(노골적으로 표현하면) 하늘의 비어 있는 부지에 한 건물을 세워 예수께서 거기서 봉사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하늘 성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한 개념도 해를 주지는 않겠지만, 나는 그것을 진지하게 영적으로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표상적이고 비실제적인 것을 원형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지시자나 상징을 다루지 않고 실재를 다루고 있다. (84.3)
 나는 하늘 성소를 하나님의 처소, 그분의 정부의 자리, 우주의 중추 지점으로 보기를 좋아한다. 그러기에 그것은 늘 존재해 왔다. (84.4)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그것은 우주적인 반역의 해결과 우주의 안전을 위한 추가적인 기능을 띠게 되었다. 우리가 고대의 제사 제도에 대해 생각할 때 바로 이런 견지에서 그것을 묘사한다. 우리는 죄의 근절을 위한 봉사로 채색된 색안경을 통해 그것을 본다. (84.5)
 하지만 이러한 기능은 단지 구속의 계획이 최종적으로 완성될 때 없어지도록 계획된 일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아마도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21:22의 의미인 것 같다.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하지만 하나님의 정부의 자리 및 그분의 천상적 거소로서의 성소는 영원토록 있을 것이다. (85.1)
 나는 경험과 연세가 많은 신사이며 철학적 신학자인 신학대학원 교수 한 분을 알고 있다. 그분은 학생들에게 영해(靈解, spiritualism)의 위험에 대해 지칠줄 모르고 경고했다. 이것은 사후에 의식이 남아있다는 것을 믿는 신조 체계와 관련 있는 강신술(spiritism)이 아니라 헬라 철학자들, 특히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모두 폄하하는 플라톤의 방식을 따라 하늘의 것들을 비물질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신조 체계를 말한다. 내가 여기서 지금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이해하기에, 내가 제안하는 사항도 그런 신조와는 되도록 멀리 떨어졌다고 생각한다. (85.2)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하늘 성소를 비어 있는 곳으로 형상화 하지 않는다. 어떤 형태인지는 모르지만, 무수한 천사들로 둘러싸인 하나님의 보좌가 거기에 있다. 적어도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최선의 것은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는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가 거기에 계신다는 것이다! 그분이 그곳을 충만하게 채우신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계신다! 그것이면 우리에게 족하다! (85.3)
 참고
 1) Johnsson, In Absolute Confidence, 91.

 2) Dulles, Models of the Church, 20.

 3) Ibid.

 4) 마 21:33~42(집주인과 농부의 비유)과 43절(해석), 마 22:1~13(혼인 잔치의 비유)과 14절(해석), 마 25:1~12(열처녀의 비유)과 13절(해적)을 비교해 보면 같은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5) 예컨대, 단 4:10~17(「새미국표준성경」으로, 큰 나무에 관한 느부갓네살의 꿈을 회고하는 내용이 55 줄임)과 22, 25, 26절(5줄의 해석), 그리고 단 7:2~14(「새미국표 준성경」으로 75줄의 이상)과 17, 18절(약 5줄의 해석)을 비교하라. 단 7장의 나머지 부분에 추가적으로 확대된 해석은 다니엘의 요구로 나타났고(참조 19절), 따라서 선지자의 요구가 없었으면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6) Dulles, 21.

 7) Ibid.

 8) Ellen G. White, in Signs of the Times, June 28, 1899.

 9) _____, 부조와 선지자, 354.

 10) Ibid. 353, 354.

 11). New Catholic Encyclopedia (1967), s. v. “Eucharist,” by W. F. Dewane을 참조하라. 이 논고는, 예수께서 자기가 곧 포도나무라고 확언한 요 15:1 같은 경우를 언급하면서 마 26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의 문자성에 너무 치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기고자는 흥미있는 전환을 하여,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그 말씀들을 문자적인 의미로 하지 않았다면 그것에 따른 은유들은 상당히 혼란을 일으키며 필요 없게 될 것이 명백하다”(602쪽)고 주장한다. 이 논고는, 마지막 만찬이 제의적인 식사였기 때문에 상징이 제외되어야 한다는 개념을 통해 그리스도의 말씀의 문자성을 추론해 낸다(Ibid.).

 12) Walter R. L. Scragg. Such Bright Hopes (Ha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Pub. Assn.. 1987), 40.

 (8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