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성소 (재림교회 신학의 심장) 제 4 장 하늘 성소를 개념화함
 많은 이들이 비유적인 표현 및 상징들의 의미와 해석에 걸려 넘어졌다. 예컨대 “이는 내 살이다”, “이는 내 피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두고 수백 년 동안 맹렬한 신학적 마찰이 있어왔다. 오늘날에도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예수님의 이 진술들이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를 가리키며, 말하자면 그것을 사제가 만들었고 성찬 예식을 하는 동안 신실한 자들은 그것을 받는다고 믿고 있다.11) (79.2)
 우리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얼마나 더딘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고했을 때, 그분은 그들이 잘못 생각한 것처럼 떡이 아니라 가르침을 언급하고 있었다.(마 16: 11, 12). 그분이 “나는 포도나무요”(요 15장)라고 말했을 때, 그는 실제 식물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또한 양의 문(요 10:7), 선한 목자(11절), 모퉁이 돌(엡 2:20; 벧전 2:6), 확실한 터(고전 3:11), 만세 반석(마 16:18; 고전 10:4), 신실하고 참된 증인 (계 1:5), 대언자(요일 2:1), 하나님의 말씀(계 19:13)도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아름다운 영상(映像)들은 모두 우리의 놀라우신 구속주의 비길 데 없는 매력과 다방면의 기능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 (79.3)
 여기서 나의 바람은 성경의 비유와 상징들의 풍부한 의미를 깨달아 그것들이 묘사하는 실체와 혼동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80.1)
 유형(有形)의 실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님
 어떤 것을 상징적이며 비(非)실제적인 것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그 이면에 만질 수 있는 실체가 있음을 부인한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필리핀에 있을 때, 매년 여러 번의 태풍이 그곳을 휩쓸곤 했다. 태풍이 수도로 접근할 때마다, 우리는 라디오 아나운서가 “마닐라에 폭풍 경계 경보 1호(또는 2호, 3호)가 발령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곤 했다. (80.2)
 내가 알기로는, 어느 누구도 심지어 어린이라도 폭풍의 신호를 찾으러 나가지 않았다. 아마도 라디오가 있기 전, 사람이 사는 공동체가 소규모였을 때에는 중심 지역에 게시된 모종의 가시적인 신호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모든 이들은, 폭풍 경보가 내려졌다는 말이 위험이 도사린 폭풍이 다가오고 있으니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는 것을 알리는 방법임을 이해한다. (80.3)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실제적이며 유형적인 측면에서 염려할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여, 폭풍 경보 3호(가장 심각한 경보)가 내려졌는데도 자기 가족을 데리고 배를 타기 위해 마닐라 항구로 나간다면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가! (80.4)
 성경의 비유와 상징들 배후에도 유형의 실체가 존재한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이 그의 날개로 우리를 덮을 것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가 하나님이 새처럼 날개가 있다고 말한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햇병아리가 어미의 날개 아래서 보호받는 것을 생각하고는 핵심을 포착한다(참조 눅 13:34). (81.1)
 또한 시편 기자는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이 극적으로 구원받은 것을 회상하면서 의미가 풍부하고 생동감 있는 상징, 특히 그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생생한 상징에 연거푸 호소한다.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악어의 머리를 파쇄하시고 그것을 사막에 거하는 자에게 식물로 주셨으며”(시 74:13, 14).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것은 실제적이고 눈에 보이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지만, 시편 기자가 그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이미 지들은 상징적이며 비실제적인 것이다. (81.2)
 사실상 이런 현상은 인간 언어의 보편적 및 초시간적(時間的) 요소이기 때문에 성경에 두루 펴져 있다. 사무엘하 22장에서 다윗은 도망자로서의 삶을 회고하고 사울과 다른 대적들로부터 결정적으로 구원 받은 것을 묘사한다. 도망자로서의 그의 경험은 실제적이었고, 그의 구원 역시 그랬다. 하지만 그것들에 대한 그의 묘사는, 매 문장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징적이었다. 예컨대 그는 여호와를,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3절)라고 칭했다. 그는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5, 6절)고 회고한다. 후에 그는 같은 장에서,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 캄캄하도다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 위에 나타나셨도다”(9~11절)라고 말한다. 다윗이 지상의 사건과 실체들을 묘사할 때 상징적 어법을 사용할 필요를 느꼈다면, 그밖에 영감받은 기자들이 천상의 사건과 장면들을 묘사할 때 상징을 덜 사용했으리라고 기대해야만 하는가? 그것들에도 동일한 시적인 자유를 부여하면 안 되는가? (81.3)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구원에 관하여 과연 몇 문장이나 만들 수 있을까? 예수께서 어둠 속에서 니고데모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그에게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라고 말했다. 니고데모는 그 말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또는 일부러 오해하여) 장성한 사람이 다시 모태에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 과학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를 제시하자, 그녀는 곧바로 그분을 논의에 끌어 들여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요 4:11)라고 물었다. 거듭거듭 위대한 교사께서는 상징과 비유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묘사하였다. 예컨대 씨 뿌리기, 알곡과 가라지, 겨자씨, 누룩, 감춰진 보화, 값비싼 진주, 그물 등이다. 몇 해 전에 월터 스크래그(Walter Scragg)는 한 경건 서적에서 신약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매일 관찰하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놀라운 구원을 묘사하기 위해 광범위 하게 사용된 은유와 직유를 산뜻하게 요약하였다. (82.1)
 “그것들은 각기 다른 인간 경험에서 나온다∙∙∙ 칭의라는 말은 법정에서 유래한다. 사면(放免) 역시 법정에서 유래된 말이다. 성화는 한 개인이나 물건을 거룩하게 만드는 과정을 묘사한다. 구속(救讀)은 담보물을 되사는 것처럼 우리를 되사는 것을 말한다. 화목은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서는 사람을 제공해 준다.” (82.2)
 “예수께서는 그분 특유의 풍부한 표현을 지니고 있었다. 그분은 우리에게 회개 곧 돌아서는 것을 요구하셨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 또한 그분은 우리의 마음속에 천국을 두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요청하신다.” (83.1)
 “요한은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들,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들, 세상을 이기는 승리, 흰옷을 입고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것에 대해 말한다.” (83.2)
 “이런식의 표현을 계속 찾을 수 있다. 우리가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이해할수록 이런 목록을 더 많이 찾을 수 있다.”12) (83.3)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필요함
 전반적으로 인간의 언어뿐 아니라 특별히 구원과 관련된 언어도 상징과 비유와 은유로 꽉 차 있다면, 하늘 성소가 논의의 주제로 부각될 때는 왜 과민하게 문자주의를 고집하려는 경향이 생기는가?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있는가? 혹은 일부 무책임한 사람이나 무리가 재림교회의 귀중한 유산이 된 이 기본적인 신조를 파괴할지도 모른다고 염려하는가? 그럴 필요가 없다. 어떤 인간 존재도 이 교리를 무너뜨릴 수 없다. 그것은 성경에 영원히 주어져 있다. (83.4)
 이러한 깊은 개인적 확신을 가지고 나는 하늘 성소와 그것을 묘사하는 언어에 접근한다. 예컨대 내가 하늘의 열린 문이라는 책의 제목을 볼 때 곧바로 내 마음에는 천상의 영역 곧 찬란한 빛이 비치는 조금 열린 문들이 떠오른다. 장엄한 실체에 관한 영상이 마음에 그려져, 온 생애를 밝혀주는 감격과 영감으로 벅차 오른다. (83.5)
 그러므로 내가 보기에 “하늘의 열린 문”은 과학적 및 천문학적 분석이 필요한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숭엄한 어떤 것을 인간의 언어로 포착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그것은 이성적으로 설명하라는 것이 아니라 깊이 명상해 보라는 요청이다. (84.1)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하늘에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는가? 혹은 하늘은 단지 빈 공간이라는 뜻인가? 그런 말이 전혀 아니다. 모든 상징과 비유와 은유의 이면에, 심지어는 에스겔의 특이한 네 생물과 바퀴 속의 바퀴들(겔 1, 2장)의 배후에도 실제적이고 확실한 실체, 힘있는 신학적인 진리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8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