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성소 (재림교회 신학의 심장) 제 4 장 하늘 성소를 개념화함
 그러면 우리가 하늘 성소를 어떤 식으로 묘사해야 할까? 이어지는 논의는 앞장에서 이미 놓은 토대를 전제로 하여 거기서 시작한 주제를 좀 더 깊이 탐구한다. 어떤 이들은 하늘 성소를, 모 세가 광야에서 건립한 장막을 닮았으나 모습과 크기는 훨씬 더 웅장한 것 곧 주께서 베푼 장막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쉽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실제 진설병상과 등대 및 분향단을 전부 갖춘 이 독립된 하늘 구조물은 고대의 성막처럼 두 칸 곧 성소와 지성소로 나뉘어 있다. 휘장이 이 두 부분을 나눈다. 물론 내전에 있는 속죄소는 지상 성소에 있는 사본(寫本)보다 훨씬 크고 아름다우며(금속의) 그룹으로 덮여 있으며, 또한 그것에는 두 돌비가 들어 있고, 아마도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72.1)
 애초에 우리가 지금 다루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해 두도록 하자. 여기서 하늘 성소의 실재성 문제는 논의에 들어 있지 않다. 나는 하늘에 성소가 존재하며 지상 성소의 봉사는 하늘의 본을 따랐음을 명확하게 진술하는 성경의 근거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참조 히 8:1, 2; 9:1~12; 계 11:19; 16:1). 사실상 지상 성소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히브리서 8:1, 2이 밝히는 대로 하늘에 실제 성소가 있다. 윌리엄 G. 존슨(William G. Johnsson)의 표현을 빌려보자.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늘 성소와 그 의식(儀式)에 관한 묘사를 시도하지 않지만, 그의 언어는 몇 가지 중요한 결론을 시사한다. 첫째, 그는 그것들의 실재성∙∙∙실제적인 신성, 실제적인 인성, 실제적인 제사장 직분을 지지한다. 우리는 여기에 실제적인 성소에서 행하는 실제적인 봉사를 덧붙일 수 있다.”1) 내가 보기에 그 문제는 이제 해결되었다고 생각한다. (72.2)
 이 장에서 다루는 쟁점은, 우리가 마땅히 지상 성소와 하늘 성소 사이에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일치성이 어느 정도인지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불확실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일이며, 따라서 나는 여기에 개진된 개념과 결론들이 단지 이 시점에서 나의 최선의 판단을 나타낸다는 점을 독자에게 상기시켜야만 한다. 그것들은 영구적으로 고정된 교리적 결론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73.1)
 재림교인들이 하늘 성소의 본질에 관한 생각을 표현하는 것을 주의 깊게 들은 사람이라면, 두 성소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식양”“그림자”라는 단어를 매우 문자적으로 이해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 관계를 고정화시켜 하늘의 원본과 문자적으로 일치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물체가 물에 비치는 것이나 빛에 투영(投影)되는 물체의 윤곽처럼, 그림자는 적어도 그것을 드리우는 물체와 형체가 닮았음을 나타낸다는 개념을 지지한다. 따라서 우리는 지상 성소에 있는 진설병상을 보면 그 지상의 “그림자”가 하늘 성소에 있는 웅장한 실제 진설병상에 의해 드리워졌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등대, 분향단, 언약궤 등도 마찬가지로 이해하고 있다. (73.2)
 이미지(image), 비유, 상징 이해하기
 일반적으로 인정하듯이, 온전한 의미들을 언제나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시며, 더 자주 하늘의 실체들은 이미지와 비유 및 상징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납득될 수 있는 것이 된다. 에이버리 덜레스(Avery Dulles)는 교회에 관한 자기의 책 중 하나에서 이미지의 본질과 역학을 논하는데, 여기서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학자[와 아마도 성경학자]가 이미지를 사용할 때, 그는 믿음의 신비들에 관한 더 나은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그렇게 한다.” 따라서 신학자들과 대체로 성경 해석자들은 “그러한 이미지들이 어떤 지점까지는 유용하지만 그 지점을 넘어서면 속이는 것이 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74.1)
 덜레스는 계속하여 이렇게 말한다. 신학자는 “실체를 반영(反景)하고 식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사용한다. 신학자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양 무리라고 불리는 것을 들으면 거기에 어떤 것이 연관되고 어떤 것이 연관되지 않는지 알아챈다. 예컨대, 양(즉 신실한 자들이 그의 주인(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은 연관되지만, 교인들이 양털을 기른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다.2) 해석자는 항상 “이미지의 적절한 적용과 부적절한 적용을 확실하게 식별할 수 있도록 해주는 평가 원칙”3) 찾아야 한다고 덜레스는 주장한다. (74.2)
 이런 맥락에서 나는 예수님이 항상 자기의 비유를 간명하게 해석하는 데 흥미를 느낀다. 다시 말해 그분은 많은 세부사항과 잡다한 수식은 지나쳐버리고 핵심에 이른다. 예컨대, 마태복음 20:1~15은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를 제시하면서, 「새미국표준성경」(New American Standard Bible)으로 보면 약 320단어(헬라어 성경으로는 230단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해석(16절)은 영어 성경에서 단지 10단어(헬라어로는 9단어)만을 채택한다.4) 우리는 몇몇 성경 예언의 해석5)에서도 동일한 간결성을 발견한다. 이러한 현상이 성소 문제와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것이 성소와 그 의식(儀式)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해석에 의미를 준다고 주장하고 싶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나무를 보려다가 숲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모든 세세한 사항에서 시시 콜콜 의미를 찾으려는 경향이 너무나 강하다. (75.1)
 덜레스는 우리에게 다음을 상기시킨다. “물리학자는 그의 직접적인 경험에서 벗어나 있는 어떤 것을 연구할 때, 통상적으로 그에게 기준점을 제공해 주는 것 곧 좀 더 친숙하고 충분히 비슷한 사물을 버팀목으로 사용한다.” 예컨대, 그는 당구공을, 빛의 현상을 조사하는 데 모델로 활용할 수 있다.6) 그런 후에 덜레스는 의미 있는 관찰을 덧붙인다. “어떤 모델들 곧 건축학에서 사용되는 것과 같은 모델은 고려 중인 실체의 축척 재생이다. 하지만 다른 모델들 곧 성격상 더 개략적인 모델은 복사판일 수 없다. 그것들은 연구 중인 사물과 충분하게 기능적 일치성을 지닌 실체들이어서 개념적인 도구들과 어휘를 제공하며, 그렇지 않으면 서로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였을 사실들을 한데 결합시킨다.”7) (75.2)
 나는 이런 관점과 의견을 같이하여, 지상 성소를 하늘 실체의 축척 재생 혹은 복사판으로 생각하지 말기를 제안한다. 오히려 그 관계를 주로 “기능적 일치성”(functional correspondence)에 비추어 봄으로써, 그것이 우리에게 “개념적인 도구들과 어휘”를 제공하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지상의 형태는 우리 입에 할 말(“어휘”)을 넣어 주어, 아직은 희미하지만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파악할 수 없는 것을 파악하도록 해준다. (76.1)
 교훈을 적용함
 그렇다면 우리는 하늘 성소를 어떻게 묘사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학술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가 성소 주제를 다른 이들에게 제시하는 방법과 그렇게 할 때 나타나는 확신의 정도에 영향을 끼친다. (76.2)
 앞장에서 우리는 “식양”이라는 단어에 함축된 의미를 연구했다. 우리는 특별히 고대 성소 봉사의 한 측면 곧 뜰에서 이뤄지는 의식을 선별하여 언급했는데,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이 땅 우리의 목전에서 원형적 성취를 만났다. 그리고 많은 세부 사항에서 유사점이 있지만 또한 현저한 차이점도 있다는 것이 우리가 내린 결론이다. (76.3)
 이 차이점들 중 가장 의미 있는 것은, 원형적 뜰이 하늘에 있는 울타리는 고사하고 지상 성전의 뜰처럼 성별되지도 않은 갈바리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이 땅이 바로 하늘 성소의 바깥뜰이라는 것이 엘렌 G. 화잇의 지지를 얻는 결론이다. 그녀는 원형적 대속죄일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 죄를 위해 죽임을 당한 어린양 곧 그 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표상이 원형을 만났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구원에 절대적 가치를 지닌 유일무이한 희생을 치르셨다. 그분이 십자가 위에 자신을 드렸을 때 백성의 죄를 위한 완전한 속죄가 이루어졌다. 우리는 이제 바깥뜰에 서서, 복스러운 소망 곧 우리의 주님이자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고대한다.”8) (76.4)
 만일 우리가 세마포 장으로 둘러싸인 고대의 표상적인 뜰로부터 그것의 원형적 성취로 화살표를 그으면 골고다의 넓은 공간을 보게 된다. 우리가 고대 성막의 뜰에 있는 놋단과 거기에 딸린 화덕으로부터 그것의 원형적 성취로 화살표를 그으면 로마의 사형대 곧 높이 들린 십자가를 보게 된다. 우리가 번제단 위에서 불살라진 표상적 희생제물로부터 그것의 원형적 성취로 화살표를 그으면 인간 존재 곧 두 팔을 벌린 채 피 흘리며 죽어간, 뼈가 부러지거나 불살라지지 않고 무덤에 장사된 하나님의 아들을 보게 된다. 멋진 일치점들이 도처에 깔려 있지만 그것들은 외형적이거나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신학적인 것들이다. (77.1)
 이것을 가장 중요한 본보기로 염두에 둔다면 하늘 성소의 나머지 부분도 개념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우리는 거기에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뜰과 관련하여 살펴본 성취의 성격이 우리에게 단서를 제공해 준다. 우리가 하늘 성소에서 번제단을 찾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로마인의 십자가가 그것의 원형적 제단이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서 우리 주님은 친히 제사장이자 희생제물로서 죽임을 당하셨다. (77.2)
 우리는 또한 하늘 제과점에서 하늘 성소의 진설병을 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지상 성소의 진설병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항상 계시는 그리스도 곧 산 떡을 가리켰다.”9)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오늘날 하늘 성소를 살짝 들여다본다면, 진설병상이 아니라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보리라고 기대해야 한다. (78.1)
 또한 거기서 등대를 찾으려 하지말고 세상의 빛이신 분을 찾으려 해야 한다. 우리는 제단 위에서 타고 있는 향을 찾으려 하지말고 그것이 나타낸 그리스도의 공로와 간구와 완전한 의를 찾으려 해야 한다.10) 우리는 내전에 있는 궤를 덮고 있는 금속의 그룹을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말고, 공의와 자비에 기초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보좌 곧 그분을 수종하는 빛나는 천사들의 무리로 둘러싸인 보좌를 찾으려 해야 한다. (78.2)
 어떤 이들은 왜 요한계시록에서 하늘 성소를 언급하면서 자주 지상 성소와 결부된 기구들을 언급하는지 의아해 할 수 있다. 예컨대 요한은 하늘의 열린 성전에 있는 언약궤를 보았고(계 11:19), 다른 장면 에서는 향을 담은 대접들(계 5:8)을 보았다. 나는 이것이 이런 특정 기구와 부속물을 하늘에서 찾을 수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고 제안한다. 오히려 선지자는 특정 사건들의 현장인 하늘 성소 원형으로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이런 친숙한 물건을 신호 곧 지시자로 이용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우리에게 “이봐, 우리가 지금 하늘 성소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야”라고 말하는 셈이다. (78.3)
 예컨대 법궤의 존재는 고대에 표상적 성소의 궤 안에 간수되었던 십계명의 중요성과 그것의 계속적인 적실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에게 고대의 성소 제도에서 속죄소로 대표된 은혜의 보좌를 상기시키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거기에 거대하고 영광스러운 궤가 실제로 있다고 주장하면 우리는 문제에 휘말리게 된다. 우리는 실제로 먹이 따진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양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할 순 없는데, 그렇지 않았으면 요한계시록 5:6에 비추어 그렇게 추정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하늘의 제단 아래 실제로 “영혼들”이 있다(계 6:9)고 생각할 수 없다. (7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