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를 통한 속량과 재회 제 7 장 다시 상처를 입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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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전도회를 열고 있던 미국의 중서부 어느 도시에서 한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왔다. 그녀는 나의 손을 붙잡고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내 아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세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픔니까? 다쳤습니까? 또는 병원에 입원 했습니까? 아니요. 그는 지금 교도소에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과 인간의 법을 범했기 때문에 지금 그 보응을 받고 있습니다. 그때 내가 그 여인에게 “기뻐 하세요. 당신은 교도소에 있지 않으니깐요”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누가 더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아들일까 감옥 밖에 있는 어머니 일까? (47.1)
 몇년이 지난 후 내가 캘리포니아에서 전도회를 개최하고 있는 동안 전에 만난 그 여인이 나에게 왔다. 그리고는 나의 손을 잡고는 다시 애원하였다. “프레이지 형제여 내 아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오” 도대체 이 여인은 왜 이럴까? 그녀는 다른 어떤 것도 생각 할 수 없단 말인가? 왜 이 여인은 몇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들 얘기를 하며 울먹거릴까? 그녀는 그녀의 아들을 사랑하고 있다. 그것이 전부다. 만일 당신이 그녀의 가슴에서 사랑을 꺼낼 수 있다면 그 여인은 울기를 중지할 것이며 그 무거운 짐이 사라질 것이다. 사랑때문에 그녀는 밤낮 울고 있고 사랑때문에 매일 그 아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47.2)
 그렇다면 어머니들을 만드신 분은 어떠하실까? 그분의 고통과 아픔은 어떨까? 그분은 약 2천년전, 여섯시간 동안 그분이 하셨던 것처럼 더 이상 나무 십자가에 달려 계시지는 않으시지만 거의 6천년 동안 죄는 그분에게 영원한 슬픔과 고통을 끼쳤던 것이다. 그것에 관하여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그것에 관하여 이해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 십자가는 우리의 우둔한 감감에 나타나서 죄가 끝나기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 아픔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47.3)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죄 짓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목을 보임이라”(히 6:6). 성소의식에 있어서 어느 사람이 율법을 범했으면 그는 양을 가져가서 그의 죄를 고백하고 그 대속물이 죽임을 당하고 그 피를 뿌렸을 때, 그 사람은 자유를 얻었으며 죄가 가리워졌고 용서함을 받았고 그래서 집으로 돌아 갔다. 그가 그 다음 주일에도 또 율법을 범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또 다른 어린 양을 가져가야 한다 왜냐하면 전번 양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시 죽일 수 없다. 그러나 하늘 참 성소에서 하나님은 어린 양을 공급하신다. 그런데 그분은 오직 한 마리의 어린양이 있을 뿐이다. “모든 죄 때문에 예수는 또다시 상처를 당하신다.”( DA 300). (47.4)
 “그대들이 갈바리의 십자가에 가까이 나아갈 때에 그곳에서 비할 데 없는 사랑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대들이 믿음을 가지고 희생의 의미를 깨닫게 될 때에 그대를 자신이 깨어진 바된 율법으로 정죄를 받은 죄인임을 알게 된다. 바로 이것이 회개이다. 그대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갈 때에 사유하심을 얻게 되는데 이는 예수 그리 스도께서 계속적으로 번제단에서 계셔서 간단없이 세상의 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을 바치는 자로 상징되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치지 않고 주님께서 치신 참 장막에서 봉사하시는 분이시다. 유대인의 성막의 상징적인 그림자는 지금에 와서 아무런 의미를 갖고 있지 못하다. 날마다 드리는 것과 해마다 드리는 상징적인 속죄는 이 이상 더 드릴 필요가 없으나 끊임없이 죄를 범하기 때문에 한 중보자를 통한 속죄 제물은 긴요한 것이다.”( 1SM 343) (47.5)
 이 설명 가운데 포함된 모든 의미를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나는 거대한 사실을 직면한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것을 포착할 수 없다. “그리스도 예수는 세상 죄를 위해 시시 각각으로 희생을 드리기 위해 제단에 항상 서 계심으로 표상 되었다.” 생명과 기쁨도 역시 거기에서 온다. 성소 봉사는 아프고, 고통스럽고, 죽음의 한 경험이다. (49.1)
 우리들이 아직도 죄를 범할 것인가? 그러면 그 밖에 어떤 일을 계속 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용서의 기회를 우리에게 주신다면 집행하는 제사장은 반드시 우리와 깨어진 율법 사이에 서 있어야 하며, 그의 속죄에 충분한 피를 제시해야 한다. “끊임없이 피를 범하기 때문에 한 중보자를 통한 속죄 제물은 긴요한 것이다”. (49.2)
 그렇다면 얼마나 오랫 동안 희생제물의 사역이 계속될 것인가? 죄가 계속되는 한 성소봉사는 계속될 것이다. 그대와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므로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한 성소는 결코 정결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이것을 이해할 때에 우리는 그분의 계명을 범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짐승의 표의 시험을 만날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지 않고는 매매를 할 수 없다는 선고가 내릴 때라도 성도들은 흔들리지 않고, 신앙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만일 그들이 계명을 범하면 또 다시 고난을 당해야만 하고 그들을 위해 돌아가신 그 분을 실망시키기 보다는 차라리 굶주리고 옥에 가고 죽음을 당 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충분히 사랑할때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49.3)
 성경의 마지막 책 계시록은 하늘 성전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업의 영광스러운 계시를 나타내고 있다. 4장5장에서 요한은 하늘에 열린 문을 본다. 요한이 자세히 보니 보좌앞에 불이 켜진 일곱 촛대를 본다. 또한 그는 많은 생물들과 12장로들 그리고 천천 만만의 천사를 바라 본다. (49.4)
 우주의 왕의 오른 손에 인봉된 책을 보는데 힘센 천사가 큰 소리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폐기에 합당하냐?”(계 5:2)라고 했다. 하늘이나 땅에 그 책을 펼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요한은 크게 울었다. 그때 장로중에 하나가 위로하며 말하기를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계 5:5) (50.1)
 여기에 사자가 오고 있다! 그는 그 책을 펼칠 것이다. 요한은 승리하는 사자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것 같더라”(계 5:6). 여기 밧모섬에서 요한은 예언적 망원경을 통하여 하늘에 하나님의 성전을 보고 있다. 그는 촛대를 보며 보좌 앞으로 올라가는 향단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본 모든 것의 중앙에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보는 것이다. (50.2)
 잘못 이해 하여 서는 안될 것이 있으니 즉, 그리스도의 손과 발에 찔린 못의 고통에 관하여 이미 오래 전에 잊었는가? 그러나 죄 때문에 받아야 할 그분의 개인적 고통은 그분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시작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십자가에서 그분을 내렸을 때도 끝나지도 않았다. “십자가는 우리들의 고통의 둔한 감각에 대한 계시이다. 모든 옳은 것에서 떠나는것, 모든 잔인한 행위, 그의 이상에 이르는데 실폐하는 모든것들을 그에게 슬픔을 가져다 준다”(Ed 263). (50.3)
 에덴에서의 최초의 범죄가 얼마나 그분의 가슴을 찔렀겠는지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입은 존재들, 모든 아름다움으로 그들의 환경을 꾸며 주었지만, 하나님께 충성을 저버리고 큰 반역자와 연합해 버렸던 것이다. 하늘은 얼마나 슬픔에 가득 찼을까? 사랑은 슬퍼하고 고통하였다. 사랑은 잃어버린 자를 속량하기 위하여 분리를 가져다 준 죄악을 제거하기 위하여 한 길을 찾아야만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3:16).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구원의 계획을 말씀하셨을때, 첫 번째 어린 양이 희생된 때는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그 일련의 희생제 사는 죄가 하나님의 가슴에 가져다 주는 아픔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50.4)
 우리의 반복될 범죄는 우리 주님의 지체를 반복해서 고통하게 한다는 것이 참으로 사실인가? 하나님께서 하늘 성소를 단번에 정결케 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늘이 죄 때문에 당하는 계속적인 고통을 끝내는 유일한 길은 죄짓기를 끝내는 것이라는 것이 참으로 사실인가? (50.5)
 만일 이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문제가 않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것이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지금이야 말로 십자가에 달린 그분을 바라보아야 할 시간이다. 그리고 지금이야 말로 성소에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는 그분의 엄숙히 마치고 있는 사업에 관하여 바라보아야 할 시간이다. 지금이야 말로 그분이 죄는 미워하고 의를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도 죄를 미워하게 될때까지 십자가와 성소를 바라 보아야 할 시간이다. 그렇게 할때 그분은 하나님의 백성의 죄악을 영원히 도말하기 위하여 속죄소 위에 피를 뿌릴 수 있다. 더 이상 죄의 장벽이 없는 영원한 재회(再会)를 가지게 될 것이다. (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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