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눈으로 본 요한계시록 제2부 하늘은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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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차 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 마지막 이상은 우리를 계시록의 중심으로 데려가는 동시에 그 책의 첫째 이상을 반향한다(계 1:1~10). 다니엘처럼 계시록의 구조에는 중심이 되는 이상이 있으며(계 12~14장), 그것은 마지막 때와 심판에 초점을 맞춘다(단 7).1 교회 역사의 폭풍우가 지나고 구름은 희망의 빛깔들을 흩뿌린다(마 16:2). 여인을 공격하고(첫째 이적, 계 12장) 바다와 땅의 세력들을 불러내는(둘째와 셋째 이적, 계 13장) 땅의 용에게, 아직도 희망의 찬미가 공명하는 이 하늘의 한가운데서(간주곡, 계 14:1~5), 세 천사가 희망의 기별을 전하는 것으로 응답한다(넷째, 다섯째, 여섯째 이적, 6~13절). (138.1)
 킵푸르
 이 새로운 시리즈에 들어가기 전에, 이상(異像)은 늘 그렇듯이 우리를 다시 성소로 인도한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계 11:19). 초점은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에 맞춰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1년 중 유일하게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날이었던 대속죄일(히브리어로 킵푸르)의 배경 안으로 들어간다. 대속죄일은 나팔절의 열흘 후에 뒤따라온다(레 23:26~32). 그 열흘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 큰 심판의 날(티쉬리 제7월 10일)을 위하여 준비하도록 하였다. 나팔절에 대한 암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위하여 준비하는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품은 사명을 명확하게 해주었다. 마찬가지로 이제 대속죄일의 이미지는 다가오는 심판을 선포하는 그들의 사명을 재정의(再定義)한다. (138.2)
 대속죄일이라는 상황에서 언약궤가 차지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생각할 때, 그 언약이 온통 그것으로 차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 날에 제사장은 희생의 피를 그 위에 뿌렸다(레 16:13~15). 두 그룹(cherubim)을 지니고 지성소에 위치한 법궤는 이스라엘 자손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하늘 보좌2를 대표하였으며, 그것은 야훼 그분 자신과 동일시되었다(민 10:35, 36). (138.3)
 궤에 피를 뿌리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피가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짐승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상기시킴으로)과 은혜(그분께서 책임을 떠맡으시고 용서하셨으므로)를 의미하였다. 여기서 은혜는 공의와 짝을 이루고 있다. 용서의 은혜는 율법의 공의를 기대하는 데에서만 환영을 받는다. 공의와 은혜는 언약궤의 두 지주이다.

  (138.4)
 의미심장하게도 궤 안에는 율법, 아론의 꽃핀 지팡이 그리고 만나의 표본이 들어 있었다.3 한편으로 율법은 공의를 상징하고 형벌의 기준이 되었다. 다른 한편, 꽃이 피었던 지팡이와 광야의 만나는 흙에서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표징이었다. 유대교의 신비주의에서는 언약궤의 두 그룹을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라는 속성의 화신(化身)으로 해석하고, 이러한 조합의 교훈을 기억한다.4 (141.1)
 그리스도 예수님의 피가 용서의 전제 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공의를 입증한다. 예수님이 죽으시기로 동의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한다. 그리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보인 비할 데 없는 사랑의 행위가 하나님의 심판을 필요로 하는 것은 구원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양쪽 모두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기별이 계시록의 후반부를 여는 이상의 초점이다(계 11:19). 언약궤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용서를 선포하는 열린 하늘은, 또한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으로 어두워지기도 한다. 그것은 달면서도 쓰게 땅의 거민들을 위한 심판과 희망의 이중적인 그 책의 기별을 기억나게 한다. (141.1)
 주(註)
 1) Doukhan, Daniel: The Vision of the End, pp.3~7, Secrets of Daniel, p. 100을 보라.

 2) 사 6:1~3; 겔 1:4~28.

 3) 히 9:4; 출 16:33, 34; 신 10:5.

 4) Babylonian Talmud, Baba Bathra 93a; Babylonian Talmud, Yoma 5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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