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1 부 안식일과 쉼 제 7 장  안식일,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숨
 안식일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에 관계되어 있다. 안식일은 하나님 앞에 과거의 우리가 무엇이었으며, 현재의 우리가 무엇인지를, 그리고 하나님이 과거에 우리에게 무엇이었으며, 현재에 우리에게 무엇인지를 일깨우는 신앙이다. 안식일이 선포하는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시고 또 지으신 창조주이시오 재창조주이시며, 우리를 숨쉼의 물가로 인도하여 기르시는 목자이시며, 날마다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는 우리의 보호자이시다. 그리고 젖먹이 자식을 잊지 못하는 어미의 심정보다 더한 우리의 어버이이다. (73.1)
 안식일이 선포하는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진흙과 하나님의 말씀과 호흡 그리고 그의 살과 피로 “지으심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 .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신” 자이다(엡 2:1-7). 안식일은 우리의 이같은 인식의 제공자이며 우리에게 이러한 경험을 재현시키는 시간이다. (73.2)
 그러나 이 모든 일깨움보다 더 직접적인 일깨움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호흡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호흡으로 창조되었고, 그의 호흡으로 재창조되었으며, 성령의 호흡을 통하여 “생령”(프쉬케)의 차원을 넘은 “성령”(프뉴마 하기온)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안식일은 이같은 경험이 재연되고 재현되는 시간이다. 안식일은 우리의 이러한 경험의 총칭이며 우리에게 생명의 새로운 호흡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다. (73.3)
 장래의 숨
 안식일은 우리의 앞날과도 관계되고 있다. 안식일은 하나님 앞에 미래의 우리가 무엇이며 미래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지를 일깨우고 있다. 안식일이 선포하는 하나님은 미래의 우리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우리의 생명의 호흡이시며 더 새롭고 더 크고 더 완전한 숨이시다. (74.1)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과거와 현재의 호흡만으로 하나님의 호흡을 소유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에 속해 있을 뿐이다. 창조로도, 재창조로도 그리고 성령의 침례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숨에 속하게 되었을 뿐 그 숨을 소유하게 되지 못한다. 천년을 살았다해도 가지는 여전히 가지일 뿐 나무는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의 생명의 숨은 언제나 우리를 초월해 계시며 언제나 은혜로써만 우리에게 허락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부여되는 하나님의 호흡에 자신을 개방하기 위하여 언제나 새롭게 결단하여야 하며 새롭게 하나님께 의지하여야 하는 것이다. (74.2)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의 숨은 과거와 현재로 모두 소진되었거나 그 모습과 차원이 다 드러난 숨이 아니다. 무진장의 숨이요 무량의 숨이다. 그리고 한없이 높고 깊고 큰 숨이다. 하나님의 숨이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요일 3:22). 하나님의 그 큰 호흡 안에서 우리의 어떻게 될 것도 아직 다 나타나지 않았다. 하나님의 숨이 만유 안에 충만으로 거하시는 “저 안식”은 이 땅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여전히 “남아있는 안식”인 것이다.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세대들만 “들어오지” 못한 안식일뿐만 아니라, 여호수아라는 이름의 희랍어 형태인 예수와 더불어 신앙 안에 들어간 세대들에게도 여전히 “남아있는” 안식이다. (74.3)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적으로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완전히 둘이 된 것처럼 옛 시대와 새 시대가 완전히 갈라선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두 질서가 서로 중첩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가는 세대와 오는 세대, 세상 질서와 그리스도의 질서가 서로 중첩하는 시대이다. 가나안 땅이면서 역시 남의 땅이고, 영이면서 육체이고, 은혜이면서 율법이고, 안식이면서 탄식이고, 이미 안식에 들어갔으면서도 여전히 안식할 때를 기다리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75.1)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누리는 안식은 미완의 안식이고 불완전한 안식이다. 아직도 육체로 쉬는 숨이며 쉼이다. 하늘의 하나님의 쉼이면서 세상에서 인간이 쉬는 때묻은 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야 새 하늘과 새 땅에서야 하나님의 숨과 쉼의 “어떠함”과 그 숨과 숨 안에서의 우리의 숨과 쉼의 “어떠함”이 완연히 드러날 것이다. 그날의 안식에 비하면 과거와 지금의 이 안식은 그 잔광이요 그림자에 불과할 것이다. (75.2)
 새 하늘과 새 땅의 안식
 요한계시록은 또 하나의 창조 사건을 전하고 있다. 곧 요한계시록 21장 1-7절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기사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 . 바다도 보이지 않더라. . . .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더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75.3)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 기록은 창세기의 창조기사와 신약성경의 재창조기사의 문맥에서 그리고 그 평행절로 기록된 또 하나의 창조기사이다. 빈번히 등장하는 “가라사대”에 의하여 “처음 하늘과 처음 땅” 대신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된 기사이다. “하나님께로부터. . . 내려온”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의 모습과 같다(계 21:2)는 신천지의 창조기사는 창세기 첫 창조 사건으로 창조되었던 옛 땅의 아름다웠을 때를 생각하게 하는 기사이다. “가라사대 만물을 새롭게”(계 21:5) 창조하노라 하신다. 가라사대 “만물을 새롭게 창조한” 창조사건을 “기록하라”고 했다. “또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계 21:6) 라고 하신다. 모두가 창조사건을 묘사하는 특이한 표현들이다. (76.1)
 “처음이요 나중”이신 분이 창세기 2장 7절“처음” 창조에서는 목[숨] 마른 흙 사람에게 생명의 호흡을 값없이 주었듯이, “나중” 창조인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에는 목마른 사람들에게 생명수를 값없이 주시리라고 하신다(계 21:6).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하신 그분의 말씀이셨다. (76.2)
 신천지 창조사건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사망과 애통과 아픈 것을 다 없이하고 “처음 것들”을 다 씻어내신 하나님은 처음 창조사건인 창세기 2장 7절에서 흙 사람의 눈에서 흙과 슬픔과 죽음 곧, 흙 사람의 “처음 것들”을 씻어내시고 생령으로 살아나게 하신 그 하나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기사는 안식일의 문맥을 따르고 있다.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 .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3)는 약속은 안식일 명령에 자주 부연되는 약속이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라”하는 약속도 안식일의 약속이다. (77.1)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의 약속은 일차적으로 약속의 땅과 연결되어 있었다. 여호수아의 영도를 받은 이스라엘은 가나안땅에 들어감으로써 그 안식으로 들어갔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면서 누리게 될 새 안식을 소개하고 있다. 안식일은 안식처를 그 짝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77.2)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으로 들어간 이후에 또 하나의 안식 개념을 발전시켜왔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의 거처인 “예루살렘에 영원히 거하심”으로써 백성들이 누리게 되는 안식의 개념이다(대상 23:25).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하며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시 132:13, 14)이라 하셨을 때 이스라엘이 누리게 된 안식이 이 안식이다. 이른 바 임마누엘의 안식이다. (77.3)
 이 임마누엘 안식 사상이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상에 반영되었고, 여기 요한계시록 21:3-4에 나타나 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이 친히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라.” 안식일은 사람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현존이며, 성육신은 제한적인 의미에 있어서 안식일의 실현이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안식일의 완전한 실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현존할 것이다. 끝없는, 제한 없는 충만한 안식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77.4)
 이 땅에 있는 안식일은 이러한 안식, 곧 새 하늘과 새 땅의 안식이 우리 앞에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전령이다. 우리의 최종적 안식처는 이 땅이 아니고 하나님의 장막이 우리와 함께 거하는 저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가 영원히 쉴 곳이라는 소식이 안식일이다. 지금 우리가 숨쉬는 이 호흡이 우리의 마지막 호흡이 아니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생명수 샘물로 하나님의 가슴에서 하나님의 숨으로 쉬게 될 호흡이 우리의 운명으로써의 호흡임을 알리는 소식이 안식일이다. (78.1)
 그 동안 세상의 임금인 악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 땅의 삶에 도취시키고 이 땅의 삶으로 삶을 체념하도록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켰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 깊이 잠들었다. 그들은 하늘의 본향을 망각하였다. 안식일은 그들을 본향에 대한 동경으로 일깨우는 나팔꾼이다. “시온아 깰지어다. 깰지어다. . . 너희는 티끌을 떨어버릴지어다. . . .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네 목의 줄을 풀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값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 . . . 내 백성이 기왕에 애굽에 내려가 우거하였고 앗수르인이 공연히 그들을 압박하였도다.”(사 52:1-4). (78.2)
 안식일을 지키는 재림교인은 이 땅에 미리 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민들이다. 여기에 미리 와서 애굽 땅에 우거하고 앗수르인에게 압박 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늘 본향의 소식과 그 본향의 임박한 도래를 일깨우는 전령이요, 세 천사 기별의 화신이라 할 것이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소식을 가져오며 시온을 향하여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사 52:7).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지어다”(사 52:10).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리라 하리라.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 .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 .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이니라”(사 49:9-10). (7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