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천사의 기별과 영원한 복음 제 5 장 세 천사의 기별과 성화와 완전(목회부)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sin which dwells in me)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 .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26.3)
 율법의 높고 넓고 깊은 영적 의미를 성령의 확신시키심을 통하여 깨달은 사람만이 인간의 죄된 본성에 대하여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는 말씀의 참 뜻을 경험한 것이다. 이러한 영적 경험을 가진 사람은 비로서 내 속에 거하는 죄(indwelling sin)의 교묘한 속성과 존재를 깨닫게 된다.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이러한 영적 식별력을 가지게 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일부가 된 내 속에 거하는 죄로부터 해방되는 일이 자신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도움을 구하며 부르짖는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람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126.4)
 그런데 사도 바울의 깊은 영적 경험으로 소개된 로마서 7장 18절의 고백은, 죄 아래 팔려버린 죄인의 경험이 아니라, 성화와 완전을 추구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회개가 깊어지고 성화가 깊어질 때마다 영혼 속에서 겪게 되는 심오한 영적 경험임을 깨닫게 된다. (126.5)
 “우리가 예수님께 가까이 이르면 이를수록, 우리는 그분의 품성의 순결을 더욱 분명히 분별하게 되고, 우리의 죄의 엄청난 죄됨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되면 될수록, 우리 자신들을 높이려는 느낌이 더 적어지게 될 것이다 ∙∙∙ . 우리의 그리스도인 경험에서 진보의 매 단계마다 우리의 회개는 깊어질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충분함이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며, 다음과 같은 사도의 고백이 우리 자신의 고백이 될 것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롬 7:18; 갈 6:14)(사도행적, 551, 552). (126.6)
 이러한 의미에서 진정한 성화는 깊어지는 칭의(稱義)의 경험을 반복하는 것이며, 그 결과가 품성의 변화로 드러나는 성화요 완전인 것이다. (127.1)
 “기록하는 천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한 싸움의 역사를 기록하게 하며, 그들의 기도와 눈물을 기록하게 하라. 그러나 인간의 입술에서 ‘나는 죄가 없다. 나는 거룩하다’는 선언을 발함으로 하나님께 욕을 돌리지 말라. 성화된 입술은 결코 그와 같은 주제넘은 말을 발하지 않을 것이다 ∙∙∙ . 거룩함에 대하여 크게 공언하고 싶어지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거울을 들여다 보라. 그들이 율법의 원대(遠大)한 요구를 보게 되고,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해내는 방편으로서 율법의 역할을 깨닫게 되면, 그들은 죄가 없다(sinlessness)는 자랑을 하지 않을 것이다”(사도행적 522, 553. 영문. 561. 562). (127.2)
 이러한 역설적인 사실은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요 15장)에서 잘 설명 되고 있다. 포도가 달리는 곳은 가지인 신자들이지만, 포도를 달리게 하는 것은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요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일이시다. 가지가 자기는 단 하나의 포도알도 스스로 맺을 수 없는 가지에 불과함을 자각하고 전적인 무력함을 느끼면서 수분과 양분을 포도나무로부터 받아야 할 필요를 더욱 많이 느끼면 느낄수록 더 많은 필요를 공급받게 되어, 결국 더 크고 더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127.3)
 그것이 바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는 말씀의 참 뜻이며, “그〔그리스도〕안에는 신성(神性)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골 2:9, 10)로 표현된 그리스도인 완전의 진정한 경험인 것이다. 그것이 팔복에 소개된 천국 시민의 자격인 “심령이 가난한 자”요, “애통하는 자”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인 것이다(마 5:2, 4, 6). (128.1)
 “우리가 예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 자신의 생애에서 더 많은 결점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죄된(sinful) 자아를 완전하신 구주와 비교할 때, 우리는 더욱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 . 우리가 죄됨을 알지 못하면, 예수님에 대한 깊은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거할 수 없다 ∙∙∙ .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됨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결코 볼 수 없다 ∙∙∙ . 우리가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죄된지를 알게 될 때 용서하실 수 있는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들의 죄됨을 보게 될때, 손을 뻗쳐 그리스도를 붙잡는다.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도우시는 능력을 가지고 임하신다. 필요를 느끼는 우리의 감성은 우리를 구주와 말씀으로 가게 만든다. 우리가 그분의 아름다운 품성을 더욱 많이 보게 되면, 더욱 더 그분과 같아질 것이다”(정로의 계단 • 영한대역. 149. 150). (128.2)
 이와 같이 높고, 넓고, 깊은 율법의 속성과 그 미치는 범위를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이 바로 온전히 의로우시고, 무한히 거룩하시며, 완전히 흠이 없으신 하나님의 속성과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된다. 동시에 율법에 일치하려는 우리의 최선을 다한 후에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입혀주시는 의가 필요한 이유도 깨닫게 된다. 나누어 주시는 의로 이루어지는 성화입혀 주시는 의인 칭의(稱義)에 의하여 완전해지는 것이다. (128.3)
 흠 없는 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입혀주시는 의를 통하여서만 얻게 된다”(리뷰 앤드 헤랄드, 1901년 9월 3일). (128.4)
 2. 율법의 요구와 인간의 제한된 의
 가. 바리새인의 의와 그리스도의 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129.1)
 이 말씀의 참 뜻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애 동안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심[지키심]으로 이루신 완전한 의와 같은 그러한 의를 우리는 왜 스스로 이룰 수가 없는가?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경험으로 답하고 있다. (129.2)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 하니 ∙∙∙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blameless) 자로라 ∙∙∙ .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129.3)
 로마서는 이 문제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1장은 하나님을 모르고 율법을 가지지 못한 이방인이 어떻게 정죄되었는지를 밝힌다(18~32절). 2장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율법을 지킨다고 자부한 유대인들을 이방인 못지 않은 죄인으로 고발한다. 3장에서는 결국 모두 죄인임을 확인하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롬 3:10)라고 선언한다. (129.4)
 이 세상의 법에서도 그렇듯이 이미 정죄 받은 죄인의 신분으로 율법[법률]을 성실히 지킨다 해도 율법을 지킨 그 행위 때문에 무죄(無罪)가 되는 법, 즉 의로워지는 길은 없다(19, 20절). 또한 죄에 감염된 죄인은 스스로 율법을 지킬 수도 없다. 이러한 궁지에서 마침내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이다(3:21, 22). 이것이 곧 복음의 진수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가 되는 길이다(24절). (1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