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우리의 구원 (구속론) 제 3 장 칭의(Justification)
 율법은 의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주어졌다. 율법의 정죄를 통해서 인간은 구세주와 그분의 의의 필요성을 더욱 분명히 볼 수 있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우리에게 보이기 위해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인데,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서 그분을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믿음으로 말미 암는 의 가운데서 그 거룩성이 지지(支持)를 받는다. (72.2)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셨다는 확신과 보증을 가져다준다. 그외의 아무것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죄인이 구원을 받고 평화를 찾는 계획은 달리 따로 없다. 신약과 구약은 모두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으로 가는 동일한 길을 가르쳐 주고 있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조상이라 불린다.(로마서 4장을 보라) (72.3)
 많은 사람들은 구약과 신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통일성을 이루고 있음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구약을 바리새주의와 동의어로 사용하므로 혼돈하고 있다. 그러나 합법적인 구약 신앙과 바리새적인 율법주의와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율법주의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롬 16:26)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구약과 다른 종교를 가르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되었다. 로마서 3장 21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모세와 선지자들의 가르침과 완전히 조화되고 있음을 분명히 비쳤다. 바울은 그의 복음이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롬 3:21 R. S. V)이라 하였는데, 그것은 율법의 행위로는 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갈 2:15, 16시 143:2을 비교하라)심판때 의에 대한 하나님의 표준과 비교해 볼 때 아무도 스스로 의로운 사람은 없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거짓되다고 하는 이 개념은 여러 귀절에서 반영된 것으로 구약 신앙의 요긴한 부분이다. 예를 들면 욥기 14:4; 15:14; 25:4; 열왕기상 8장 46절 그리고 전도서 7:20 등이다. (72.4)
 이스라엘은 그들의 성소 봉사 가운데서 칭의에 대한 것을 배웠다. 또 여기에서 그들은, 성소와 성전 봉사에서 상징된 것 같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말미 암아 회개한 모든 신자들에게 회복시키고 치유하는 향유를 하늘 의원께서 부어 주시려고 그들 가까이 계심을 배웠다. 결코 부분적인 것이 아니다. 용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완전한 의이다. 그것은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는 양심이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의 생애에 도달할 때까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행복과 확신을 위협하는 우리의 육욕적인 본성에 의해 새로운 죄가 발생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죄책감과 자책감으로 인하여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질병을 앓고 있다. 런던에서 가장 큰 심리학 연구소의 책임자가 한번은 말하기를 “만약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용서 받았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그들 가운데 반은 내일 집에 돌려 보낼 수 있다”고 했다. (73.1)
 예수께서는 용서하심으로써 치료하신다. 그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한 얘기를 통해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바리새인들은 그가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면서, 실제로는 그가 도덕적으로 잘 수련되어 있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그의 죄를 고백하기 조차 부끄러워했던 부도덕한 세리에 대해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눅 18:14)고 하였다. (74.1)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이중의 충격을 주었는데, 첫째는 경건하지 않으며 종교심이 없는 멸시받은 죄인을 받으셨다는 사실이고, 두번째는 세리가 최후의 심판 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현장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놀라운 소식인가! (74.2)
 칭의는 지금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의에 대한 깊은 갈증만이 양심을 깨끗하게 치유할 수 있다. 모든 영혼이 그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류를 자신에게로 이끌고 계신다.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고, 그의 의를 우리에게 입혀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 것은 그분의 특권이다. (74.3)
 영혼을 치유하는 칭의(Justification Heals the Soul)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는 향유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구세주를 그의 유일한 분으로 하나님께 제시하는 사람은 결코 거절당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고 약속하셨다. (75.1)
 예수께서는 개인적으로 신앙 경험을 가지고 그에게 오는 자를 알고 계신다. 군중이 주님을 에워싸 밀치고 있을 때 12년 동안 혈루병으로 고생을 했으며 의사에 의해서 불치의 병으로 선고를 받은 한 여인이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막 5:28)고 스스로 말하면서 앞으로 밀치며 나왔다. (75.2)
 그 여인이 그를 만지는 순간 그녀의 병이 나았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그 한번의 만짐에 예수에 대한 그 여인의 믿음이 집중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으로 만진 손과 부주의한 군중들의 우연히 만진 손을 구별하셨다. 그 여인이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고 그를 만졌기 때문에 그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막 5:34)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녀를 치유하였다. (75.3)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어떻게 역사하는 지를 배우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개인적인 믿음을 가지고 만질 때 “능력이 자기 몸에서 나간 줄”(막 5:30)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물에 있어서도, 예수님에 대한 어떤 견해를 우연히 받아들이는 것과 그분을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드리는 믿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엘렌 지 화잇은 이 역동적이며 자기 위탁의 성격을 가진 믿음을 강조하기를 “구원하는 믿음은 일종의 거래이다. 그것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에 언약 관계를 맺는 것이다.(치료봉사 56페이지) 라고 했다. (75.4)
 이것은 산 믿음으로서 의롭게 하는 믿음이며, 치료하는 믿음이며, 일하는 믿음이며, 또 세상을 정복하는 믿음이다. 예수님은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그에게 나아갈 것 같으면 죄로 병든 우리의 영혼을 치료하실 것이다. 가버나움에 있는 한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뵙고 또 예수님의 입술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을 얻기를 갈망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집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그의 친구들은 그를 주님께로 데려 갔다. 집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친구들은 예수님이 계신 지붕을 부수고 그들의 불쌍한 친구를 예수의 발 앞에 내려 놓았다. 마가는 기록하기를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고 하셨다. (76.1)
 이 용서를 받았다는 선고가 중풍병자에게 무슨 영향을 미쳤는가? (76.2)
 “죄의 짐이 그 병자의 심령에서 떠나간다. ∙∙∙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그분의 능력을 누가 부인할 것인가? 희망이 절망을 대신하고, 즐거움이 우울한 심령을 대신한다. 육쳬적 고통은 사라지고 온 몸은 변화된다.”(치료봉사 67, 68페이지) (76.3)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부인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의 치료를 부정할 수 없도록 보여 주셨다. 엘렌. 지. 화잇은 주석하기를 “그 썩어가는 육체의 건강을 회복시키는데는 바로 창조의 능력이 요구되었다. ∙∙∙ 그리고 육체의 치료는 마음을 새롭게 한 능력에 대한 증거였다(치료봉사 68페이지)라고 했다. (76.4)
 그리스도께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 가라고 명령하신 것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막 2:10)하심이었다. (76.5)
 그리스도께서는 남녀들에게 그들의 많은 필요 가운데서 마땅히 우선권을 부여해야 할 곳을 보여주셨다. 우리는 육체의 건강을 평가할 수 있기 전에 영혼의 건강이 필요하다. 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죄는 그들의 불행의 원인이 된다. 그런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의 위대하신 의원께로 올 때에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들의 육체적 질병이 치료되기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용서의 향유로서 그들을 치료하셔야만 했다. 세상과 교회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라는 기별을 갈망하고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매 설교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설교를 할 필요가 있다. (77.1)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칭의는 단순한 법적 거래 이상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 가운데서 특별히 예증되어 있다. 잃었던 아들이 수치와 회개 가운데서 마침내 돌아왔을 때, 음식을 얻기 위해서 그의 아버지의 종들 가운데서도 지극히 작은 자의 자리라도 요청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동정심에 넘치는 그의 아버지는 달려가 입을 마추고 그 아들이 그의 모든 죄들을 되 뇌이는 것 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에 아버지는 그의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눅 15:22-24). (77.2)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의미하시는 용서가 무엇인가를 보게 되는데, 그것은 아버지와의 교제와, 완전한 아들 관계로의 회복과 화목을 의미한다. 우리가 상한 심령으로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요구할 때마다 하늘에는 기쁨이 있다. 하늘의 기쁨은 영혼속의 노래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7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