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우리의 구원 (구속론) 제 3 장 칭의(Justification)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란 무엇인가(What is Justification by Faith?)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의 성서적인 정의는 신자들 개개인의 이름에 그리스도의 의를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대속물이시요 보증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인해 법적으로 하나님과 “바른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에 있는 성소 봉사의 가르침과 이사야 선지자(사 53)의 가르침으로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고 설명했다. (68.2)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롬 4:25)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믿는 자로 여기신다. 즉 우리의 죄를 친히 짊어지시고 그대신 그분의 완전하신 의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범한 죄를 더 이상 계수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분 자신의 완전한 순종을 우리의 것으로 여기신다. (68.3)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사람들을 우주앞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또한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서 대우하신다. (68.4)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의롭다고 하시는 것에 대한 극적인 예증이 스가랴 선지자의 이상(異像) 중에 나타났다. 그는 자기와 동시대의 사람으로서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하나님 면전에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서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표했다. 여호수아의 죄를 참소하는 사단도 있었다. 그러나 주의 천사는 여호수아의 의를 선언하면서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고 말하고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다고 덧붙여 설명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벌거 벗은채로 그냥 버려 두시지 않으셨다. 천사는 즉시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고 덧붙였다.(슥 3:4) (69.1)
 여기에 있는 사상은 우리가 자백하여 용서받은 죄가, 마치 하나님께서 갑자기 죄의 전반적인 문제를 간과해 버리시기나 한것처럼 파괴되거나 폐기되는 것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 성경의 여러 문맥들로부터(특히 이사야 53 장에서) 우리는 믿는 사람들의 죄가 흠없고 순결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에게 옮겨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후 5:21) 그러나 무가치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입혀주시는 의로 옷 입게 된다. 옷을 바꿔입는 이 행위, 곧 거룩한 구원의 이 계약이 성서적 칭의이다. (69.2)
 그러므로 칭의는 단순한 율법적인 계약 이상의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의는 변화시키는 능력으로서 “품성을 변화시키고 행동을 제어시키는 생애의 원칙”이다.(시대의 소망 2권 363 페이지) 많은 사람들이 용서와 칭의에 관하여 너무 추상적이며 편협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엘렌. 지. 화잇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하여 주심은 다만 죄의 선고를 제하여 주는 사법적 행동뿐만 아니라 죄를 용서하시고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이다.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구원하시는 사랑이 표면에 나타난 것이다”(산상보훈 165페이지) (69.3)
 칭의에 있어서 사람의 역할은 무엇인가? 믿음(Faith)과 회개(Repentance)는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를 바라보는 자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선물인 것이다.(요 12:32; 행 5:31) (70.1)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화목의 복음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신 그의 공로를 우리의 것으로 주장해야 한다. (70.2)
 엘렌. 지. 화잇은 멸망해 가는 죄인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이 이상 더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 주님께서는 나의 의롭다 하심을 위해서 죽으셨고 다시 부활하셨으며 그리고 지금 저를 구원하실 것이다. 나는 그가 약속하신 그 용서를 받아 드린다.”(가려뽑은 기별 1권 494페이지) (70.3)
 바울이 말했듯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우리의 개인적인 칭의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갈 2:16). 비록 믿음이 우리의 구주나 공로는 아니지만 구원의 도구와 조건이 되는 것이다. 믿음은 유일하게 거룩하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개인의 구주로 삼고 받아들인다.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순결과 그분의 동정심을 바라봄으로써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자복하게 된다. (70.4)
 우리가 진정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하신 대표자로 영접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의 행위로서, 그것은 의롭다고 하는 행위가 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70.5)
 다윗은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고 고백했다. (70.6)
 역시 같은 내용으로 누가는 그들의 죄를 회개한 후 침례 요한에게 침례 받은 자들을 “하나님을 의롭다”(눅 7:29 R.S.V)하는 자들이라고 말했다. (71.1)
 침례로서 인친 우리의 죄의 고백은 하나님을 의롭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으로 말미 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의롭다고 선언하며 흠없는 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모든 무릎을 하나님의 의와 능력을 시인하여 그의 거룩한 보좌앞에 꿇게 될 것이다.(사 45:23, 24; 빌 2:10) (71.2)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의 어떤 방도로도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순종하므로 어떤 공로를 찾으려는 모든 생각과 노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는 자비의 측면을 즉시 파괴시킨다. 이점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절대적이다. 그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고선언했다. (71.3)
 그는 더 나아가서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갈 3:10)으며,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갈 5:4)라고 친술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 11:6)고 덧붙이고 있다. (71.4)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 앞에서의 생존의 두 다른 원칙, 혹은 방법을 취급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나 율법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71.5)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하나님의 은혜를 대적하는 위치에 놓치 않는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는가! 하나님은 분리되시는 분이 아니다. 그것은 바울과 하나님께 있어서 치명적인 오해가 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율법과 대조하지 않고 율법을 통해 의(義)와 대조하고 있지 않는가!(갈 2:21) 그것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대항하여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문제이다. (71.6)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이 유대 주의자들에 의해 슬프게도 오용(誤用)되고 있는 것을 벗기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이스라엘의 의를 측정하는 온도계로 이용되도록 한번도 계획하지 않으셨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거룩하심에 대한 계시로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는데, 그것은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이 그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죄를 발견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