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우리의 구원 (구속론) 제 3 장 칭의(Justification)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 암아 살리라”(롬 1:17)
 바로 이 성경절은 구원을 갈급하는 루터의 영혼에 해방의 감격을 안겨준 귀절이다. 또한 그것은 16세기의 대 종교 개혁의 함성이 되었다. 이귀절은 “영원한 복음”의 핵심이 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모든 참 개신교를 인도하는 별의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계 14:6을 보라) (59.1)
 사도 바울은 그 의미를 더욱 자세히 설명하기를 “이제 율법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 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 22)고 했다. (59.2)
 이 귀절을 통하여 우리는 율법복음이 요구와 선물, 또는 정죄와 칭의의 상호 보충적 기능면에서 서로 구별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59.3)
 여기에서 율법과 복음은 하나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의 죄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란 사실을 시인하고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를 오직 믿음으로 구해야 한다는 동일한 목적속에 결부되어 있다. (60.1)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두 다 긴요한 것이다. 타락후 하나님의 율법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이는 지속할 수 없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폐하지 않고 오히려 은혜의 복음이 절실히 필요됨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말미 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율법에 조화되게 하는 것이다. (60.2)
 바울은 반문하기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 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고 했다. (60.3)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에 있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인간과 그들의 죄에 있는 것이다.(요일 3:4) (60.4)
 우리는 율법과 복음이 한결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분리되시거나 스스로 모순된 분이 아니시다. 그러나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충돌하고 있다. 화목의 복음은 충돌을 제거하고 하나님과 조화된 원래의 상태로 사람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60.5)
 그러면 루터가 그 복음을 발견하게 된 경위를 간추려 보기로하자. 그는 신학자들이 성경 연구를 최우선으로 하지 않았던 중세 시대에 살았다. 성경을 가르치도록 임명을 받은 그는 진리를 갈급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으로 돌아갔다. (60.6)
 루터가 위대한 개혁자가 되기 전에 성경에서 그를 가장 떨게하고 놀라게 한 것은 “의(義)”라는 말이었다. 심지어 그가 로마서 1장 17절(“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을 읽을 때에도 하나님의 거룩한 의와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그의 민감한 영혼은 갈대처럼 떨었다. 이것에 대한 반응으로 그는 교회가 규정하고 있는 고행과 기타의 선행을 행함으로써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 그는 하나님의 지배적 특성은 공의라고 생각했다. 그 공의에는 지극히 적은 이기적 욕망 까지라도 용납되지 않을 것이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보복적 공의(retributive justice) 또는 징치적(懲治的)의 등 사법적 의미만 지니고 있는 라틴어적 의의 개념(justitia)에 국한시켜 생각했다. 따라서 중세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의를 단지 하나님은 재판장이라는 개념에서 이해했다. (61.1)
 그러므로 시편 31편“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기도는 루터에게 납득이 가지않는 수수께기였다. 루터의 좌절감은 그가 시편 143편“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 주의 의로 응답하소서”라는 귀절을 읽었을 때 다시 일어났다. 그 이유는 “의”라는 단어가 루터의 귀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두려운 심판의 뇌성으로만 들렸기 때문이다. (61.2)
 절망 가운데서 그는 위로를 얻기 위해서 신약 성경으로 돌아갔다. 복음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로마서를 열었다. 첫 장 16절에서 그는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는 말씀을 읽었다. (61.3)
 구원! 바로 그것은 루터가 수 년 동안 찾아 헤매었으나 찾을수 없었던 것이었다. 바울은 여기에서 루터에게 복음이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루터는 놀랐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17 절)기 때문에 그는 복음의 비밀을 갈급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바울은 일격으로 루터의 마음으로부터 마지막 소망을 앗아 버린다. 사도는 루터에게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의에 대한 계시임을 말하고 있다. (61.4)
 그러면 어떻게 바울이 복음 자체를 “의”라고 부를 수 있었는가? 복음은 율법의 또 다른 하나의 표현인가?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복음은 정죄만 하게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서는 항상 모든 사람을 그가 응당 치뤄야 할 댓가에 따라 처리하신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 아닌가? (62.1)
 루터는 문맥을 연구하므로 그 본문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는 “이제는 율법 이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말한 로마서 3장 21절에 이르렀다. 갑자기 그의 시각(視覺)은 명료해졌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 암아 이제 바울이 의미하고 있는 “하나님의 한 의”는 인간에게 요구하는 의가 아니고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 제공된 의, 곧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심장하게 표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도 그리스도의 의를 그분 자신의 거룩한 의처럼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다. 그것이 곧 복음이 주는 구원인 것이다. 그분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 죄인을 의롭다고 하신다. 복음의 의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고 그분의 선물로서, 그것에 의하여 우리를 옳다고 하시고 의롭다고 하신다. 루터가 구원을 받은 것은 그가 이 사실을 깨달은 바로 그 순간이 있다. 그는 노래할 수 있었다. 그는 이제 시편의 단맛을 맛보았다. 그는 증거하기를 “그것은 마치 내가 다시 태어난 것과 같았으며, 또 새로이 열린 문들을 통해서 낙원에 들어간것 같았다. 별안간 성경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내가 그토록 미워했던 ”하나님의 의“라는 바로 그 귀절이 지금은 내가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사랑하는 귀절이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말한 그 귀절은 나에게 낙원의 문이 되었다. 즉시 모든 성경은 나에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Luther ’s works:Concordia Publishing House, vol. 34, PP. 336 f. (62.2)
 로마서 1장 17절에 대한 옳바른 해석으로 말미 암아 점차 루터의 마음은 더욱 뜨겁게 불타올라 마침내 그것은 복음이 되어 그의 괴로웠던 양심을 가득 채웠다. (63.1)
 루터가 발견하게 된 것은 성경의 의미를 결정하기 위해 선입관을 갖지 않고 조심스럽게 성경에 귀를 기울인 결과였으며,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루터에게 알려진 것은 그 주석적 발견(exegetical discovery)의 결과였다.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갖게해준 하나님에 대한 이 새로운 이해는 루터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공로나 애정에 의했거나 도덕주의나 합리주의 또는 신비주의에 기초를 둔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복음 기별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한데서 비롯 되었다. 바로 여기에 구원에 대한 난공불락의 확신이 있었다! 그는 사도 바울 이후 교회가 알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신학, 즉 “인간의 능력과 성공을 찬양하는 신학을 대항하는 십자가의 신학(Theology of the cross)을 발전시켰다. 루터의 신학은 십자가에서 출발하여 십자가로 끝났다. 즉 하나님은 십자가와 고난 중에서만 발견된다”— Luther’s works, vol. 31, p. 53.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감각적 지각(知覺)이나 신비로운 명상에 의해서 이해될 수 없고 오로지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63.2)
 우리의 칭의의 근간(根幹)(The Root of Our Justification)
 루터는 바울의 기별의 핵심적인 결론인 로마서 3장 28절“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니”에 더욱 집중하였다. (6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