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증 4. 칭의에 대한 그리스도의 확증
 예수께서는 어느 곳에서도 칭의의 변화시키는 특성을 그의 잃은 아들의 비유에서 보다 더 생생하게 가르치지 않으셨다(참조 눅 15:11-32). 이 감동적인 이야기에서 그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회복시키는 능력을 드러내셨다. 비유의 핵심은 자신의 고집불통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변함없는 사랑에 대한 확증이다. 엘렌 G. 화잇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63.2)
탕자는 비록 가련한 처지에 있었으나 자기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고 소망을 갖게 된다. 그를 집으로 이끌리게 한 것은 곧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이와 같이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강권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확증이다[롬 2:4이 인용됨].8)
(64.1)
 구원의 확증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어떤 정신적 결함이 그들로 하여금 누군가를 믿는 것을 방해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죄인을 위한 아버지의 사랑과 동정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하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에 대해 이스라엘에게 확증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증거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3). 이사야는 하나님의 확증을 이스라엘에게 전달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 43:25):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2). 그리고 미가는 이 불멸의 말로 하나님의 품성을 찬양했다: (64.2)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8, 19).
(64.3)
 “회개하는 죄인을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아 주신다니, 여기 얼마나 놀라운 확증이 있는가!”9) (65.1)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회개하는 아들의 죄를 들추지 않았다. “그 아들은 자기의 과거가 용서함을 받고 잊어버린 바 되었으며 영원히 도말되었다는 것을 느낀다.”10) 아버지는 그를 껴안고 입을 맞추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회복의 표로 그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고, 그가 종이 아니라 자유인임을 가리키기 위해 그의 발에 신을 신기도록 명한다(눅 15:20, 22). 잔치는 아버지가 탕자를 완전히 받아들인 것을 축하했다. 그는 재산을 소유한 주인 아들의 위치로 완전하고 무조건적으로 회복되었다. 그것이 용서, 곧 칭의의 완전한 의미이다. (65.2)
 확증의 열매: 감사가 넘치는 사랑
 베다니의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열린 잔치에서 예수께서는 죄의 용서가 감사로 충만한 사랑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중대한 교훈을 되풀이 하셨다. 식사 도중에 간음하다 잡힌 여자 마리아가 값비싼 향료를 예수께 부었다. 그녀는 예수의 구원의 기별과 죄악으로부터 그녀를 구원한데 대해 깊은 감사를 표현하고 있었다. 시몬은 그녀의 행동을 유발시킨 개심의 기쁨을 표현하려는 마리아의 바람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한 일에 당혹감을 느끼고 예수가 선지자인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65.3)
 그런 상황에서 예수는 두 빚진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같은 채권자에게 그 중 하나는 적은 액수를 다른 하나는 매우 큰 액수를 빚졌다. 둘 다 주인에게 갚을 수 없었을 때, 그는 그들의 빚을 탕감해 주었다. 예수는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눅 7:42)라고 시몬에게 촉구하셨다. 예수는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감사하고 은혜의 행위에 대해 사의(謝意)를 표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그 비유를 말씀하셨다. (65.4)
 시몬이 문등병으로부터 자신을 치유하신 예수의 행위에 대해 약간의 사의를 표한데 반해(마 26:6), 마리아의 감사의 마음은 그녀의 구속주에게 값비싼 향료를 아낌없이 바치도록 했다. 예수께서 자신의 비유에 관해 이렇게 적용하셨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비유의 의미는 분명하다. 마리아는 크나큰 사랑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그녀가 자기로서는 아무 것도 한 일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았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이 감사가 넘치는 죄인을 안심시키셨다.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 7:48, 50). 그녀를 구원한 것이 그녀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그녀의 믿음이었음을 주목하라! S. J. 키스트메이커(S. J. Kistemaker)는 이런 통찰력있는 결론을 제시한다: (66.1)
우리는 예수를 향한 최고의 존경심을 가질 수 있고, 또 심지어 그를 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를 향한 진정한 사랑은 오직 예수 안에서 우리가 죄의 사함과 용서의 보증을 경험했을 때에만 이르러 온다. 그제야 우리는 그를 구세주로 알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은 그에게 감사의 행위들로 표현된다.11)
(66.2)
 은혜의 보상
 예수께서는 포도원 일군들의 비유에서 지고한 은혜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 비유는 은혜로운 주인의 비유로 더 잘 표현될 수 있다(마 20:1-16). 이 비유는 베드로가 던진 질문때문에 주어졌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 19:27). [필립스역]은 “우리에게 가치 있게 될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표현한다. 엘렌 화잇은 베드로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그들은(제자들은) 바리새인적 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아직도 저희의 수고에 합당한 보수를 받으리라는 생각으로 일했다.”12) (67.1)
 이런 삯군정신으로부터 그의 제자들을 구하고 당신의 나라의 원칙을 설명하기 위하여 예수는 한 이야기를 하셨다. 그는 하루 중 각기 다른 시간대에 여러 일군들을 고용한 농부 이야기를 하셨다. 그는 심지어 제11시—오후 5시 —에도 일단의 일군들을 고용했는데, 이들은 한 시간 밖에 일할 수 없었다. 주인은 자신이 고용한 최초의 일군들과 하루 노동에 대한 정가—한 데나리온—를 결정했다. 나중에 고용된 이들은 자신들의 품삯을 그의 판단에 맡겼다. (67.2)
 저녁에 농부는 모든 일군들에게 똑 같이 한 데나리온을 지불했다. 물론 하루 온종일 일한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한 사람보다는 많이 받을 것으로 기대했으며, 또 그의 공정성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했다. 농부의 대답은 비유의 핵심을 집는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3, 15, 강조 첨가). 예수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정이 상한다고 말씀하고 계셨다. (67.3)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섬기는 기쁨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를 돌보는 정신, 자기 의의 정신에 의해 자극 받는다. 그 정신은 그들이 “천국의 한 자리를 얻기 위하여 저희의 힘으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13)는 생각을 하도록 사람들을 속인다. 예수는 하나님의 은혜가 당연히 받을 몫들로 나누일 수 없다고 가르치셨다. 그것은 인간의 정의를 초월한다. 하나님이 참된 신자들에게 주시는 보상은 그들이 받을만한 가치가 있어서 받는 뭔가가 아니라 은혜의 보상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호의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특권을 가진 것이 아니며 또한 어느 누구도 보상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14) 예수께서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라고 말씀하실 때 이것을 가르치셨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보상은 하나님의 자발적인 의지에 달려있다. 그는 우리가 한 일의 양이 아니라 풍족한 관대함으로 우리에게 보상하신다. (68.1)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구속받은 자들이 동등함을 단정짓고 있다. 비유의 결론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 그는 성도들의 영원한 안전은 그들의 성취가 아니라, 그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됨에 달려 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 강조 첨가). (68.2)
 하나님의 성품: 우리의 확증
 하나님의 품성은 마치 그것이 당신의 일(job)인 것처럼 죄의 용서를 당연시하지 않는다. 용서 역시, 마치 하나님의 공의가 가혹하고 모진 것처럼 그의 공의의 중단이 아니다. 우리의 영원한 안전에 대한 의심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출애굽기 34:6, 7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그의 공의와 자비의 놀라운 조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의 실패—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가 실패한 것이 그 원인이다. 요엘 2:13; 느헤미야 9:31; 요나 4:2; 시편 85:10; 86:15; 103:8; 145:8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선지자들과 시편 기자들이 찬양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품성의 이런 조화였다. 하나님은 공의와 자비를 동등한 용어로 취급하심으로써 언약 백성의 무리가 그의 신성한 품성을 반영하도록 하셨다(참조 22:25-27). (69.1)
 어떤 시편도 시편 130편처럼 회개한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것만큼 긴장감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지 않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깊은데서” 부르짖는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다음과 같은 확증을 얻는다: (6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