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증 4. 칭의에 대한 그리스도의 확증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절대적인 구원의 확증을 주실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예수께 와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아버지께서 받아주신다는 위로의 기별을 가져오셨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57.1)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 6:37-40).
(57.2)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은 죄악과 사망 그리고 심지어 자기 자신들로부터 신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뜻과 행동에 있어서 완벽하게 일치하신다. 위안을 주는 소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먼저 행동을 시작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는 우리가 도움을 요청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셨다. 아버지께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무궁한 사랑과 인자로 인도하셨던 것처럼(참조 렘 31:3) 지금도 모든 백성을 이끌어 그들로 하여금 예수께로 오게 하신다(참조 요 6:44, 65). 또한 예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구주의 복음이 선포될 때마다 그는 그들을 이끄신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과 영예는 거룩하신 아버지와 아들에게 속한 구원을 제공하는 자들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개인적 성취나 공로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한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58.1)
 엘렌 G. 화잇은 우리의 구원의 은혜적 특성을 이런 식으로 강조했다: (58.2)
우리는 모든 것이 은혜, 거저 주시는 은혜, 최고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을 안다. 언약 속의 은혜는 우리를 양자로 삼았다. 구주의 은혜는 우리의 구속을 낳았고, 우리로 거듭나고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을 이을 아들로 만들었다. 이 은혜가 남들에게 나타날 수 있도록 하자.1)
(58.3)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서의 구원
 구원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의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심판에 관해 1세기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믿었던 것을 알아야 한다. 1세기에서 2세기 사이에 기록된 유대인의 경외서인 아브라함의 유언(Testament of Abraham)은 당시 유대교에 대한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것은 미래의 심판장면과 무엇을 근거로 각자가 생명이나 형벌을 받게 될 것인지를 묘사한다. E. P. 샌더스(E. P. Sanders)는 그것을 이렇게 요약했다: (59.1)
만일 회개하지 않은 죄들이 있거나, 혹은 심판 전 때 이른 죽음에 의해 심판 받거나 또는 죄가 의로운 행동보다 무겁거나 수적으로 우세하면 영혼은 형벌에 처해진다. 만약 의로운 행위가 우세하면 영혼은 소생하게 된다.2)
(59.2)
 본문은 문자적으로 이렇게 진술한다: “그러나 불이 어떤 이의 행위를 시험하여 그것을 사르지 않으면 이 사람은 의롭다함을 받고 의의 천사가 그를 데리고 의인들의 유업이 있는 구원받은 자들이 있는 곳으로 이끈다.”3) 한 유대인 학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유대교는 선한 행위의 공로를 인정하는 것이나 혹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얻고 내세를 위한 공로를 비축하도록 강권하는데 있어서 주저함이 없었다.”4) 간단히 말해서, 만약 하늘의 회계장부에 예금과 빚이 기록되는 난이 매일 균형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어떤 유대인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로운지 불의한지 알 수 없다. (59.3)
 랍비 요하난 벤 작카이(Jochanan ben Zakkai) 의 이야기는 하나님 앞에서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던 사람들의 곤경을 예증한다. 이 늙은 랍비가 죽어갈 때, 그는 계속해서 울었다. 한 제자가 그에게 왜 우는지를 물었을 때, 랍비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내가 왕의 왕이시요, 거룩하신 이의 면전으로 인도되고 있을 때, ∙∙∙ 나에게 두 길, 곧 간 에덴(Gan Eden)의 길과 게힌놈(Gehinnom)의 다른 길이 놓여 있을 때, 어떤 길로 내가 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내 어찌 울지 않을수 있겠는가?”5) (60.1)
 어떤 유대인들은 심판이 그들을 위해 어떤 운명을 선고할 것인지에 대해 불안함을 느끼는 반면 다른 이들은 자신들의 철저한 율법 준수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의롭게 만들었다고 확신했다. 예를들어, 바울은 열심당 바리새인으로서 자신이 율법의 의에 관한 한 “흠이 없는” 사람임을 느꼈다고 고백했다(참조 빌 3:6).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눅 18:9)에게 두 예배자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의로 가득한 바리새인의 기도를 가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지적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내어 맡긴 회개한 세리에 대해 메시야적 권위를 가지고 이렇게 선언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눅 18:14).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신약의 교리를 창시한 이는 예수였지, 바울이 아니었다. 그는 구원을 용서나 혹은 칭의—중대한 신학적 기별—와 동일시하셨다. (60.2)
 예수께서는 당시 사람들에게 새로운 두 가지 개념을 가르치기 위하여 이 중요한 비유를 사용하셨다. 첫째, 우리가 이미 살핀 것처럼 하나님의 칭의를 얻은 사람은 자기 의로 충만한 바리새인이 아니라 회개한 죄인이었다. 그리고 둘째, 칭의는 미래에 있게 될 의심스런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현재의 구원의 확증이다! (60.3)
 아브라함의 경험 역시 칭의에 관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친다. 창세기 15:6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경험에서 칭의는 하나의 진부한 율법적 개념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곧 하나님께서 죄인을 자신과 바르게 세우시는 관계의 토대를 만들었다. 참된 회개를 통해 죄인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의로, 무엇을 악으로 간주하시는 지를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의로우시다”고 했다(참조 시 51:4). 이것은 세리가 한 고백의 본질이기도 했다. 그는 다윗 왕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참조 시 51:1). 그의 태도는 참된 자기인식과 겸손을 드러냈다. 예수께서는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14)고 설명을 덧붙이셨다.. 따라서 예수는 언제, 그리고 어떤 문화나 사회에서라도 회개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칭의를 확증하신다. (61.1)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걸음의 시작에서 뿐 만 아니라 그 이후엔 계속되는 모든 단계에서도 칭의를 필요로 한다. 엘렌 G. 화잇은 심오한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이것을 설명했다: (61.2)
그리스도인의 경험 가운데서 전진하는 매 발걸음마다 우리의 회개는 더욱 깊어지게 될 것이다. ∙∙∙ 우리는 ∙∙∙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 7:18) ∙∙∙ 라는 사도의 고백을 우리 자신의 고백으로 삼을 것이다.6)
(61.3)
 그러한 자기 인식은 베드로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막 14:29)라고 호언장담했을 때, 그를 특징지었던 자만(自慢)으로 믿는 자가 떨어지는 것을 막는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바울이 경고한 것처럼, 어느 누구도 유혹에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는 심지어 지금 우리 구주이신 예수께서 주시는 쉼을 누릴 수 있다. 예수께서 마음속에 거하실 때, 그분은 “완전한 평화와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확신(확증)의 빛”을 가져다 주신다.7) (62.1)
 우리는 복된 확증과 추정, 곧 거짓 확실성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확증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의 열매이다. 추정은 불순종 가운데서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한다. (62.2)
 칭의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회복함
 예수께서는 칭의를 순수하게 율법적인 거래 이상의 것으로 간주하셨다. 그는 모든 용서의 행위를 하나님과 그분의 봉사를 위한 죄인의 개심으로 보셨다. 그는 모든 용서받은 죄인이 죄와 사단에 대한 그분의 메시야적 통치권을 증거하는 사람임을 주장하셨다. 귀신들린 자에게 그는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막 5:19)고 말씀하셨다. 그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고 확증하셨다. 그는 나면서 눈먼 자에게 자신이 세상의 창조적 빛이심을 보여주시고, 그에게 “네가 인자를 믿느냐”(요 9:35)라고 물으셨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마르다를 위로하셨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1:40). (62.3)
 예수의 용서는 아버지와 자신과의 변화시키는 친교 속으로 모든 죄인이 들어오도록 초청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산상설교에서 구원 얻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서 그 기쁨에 지금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확증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강조 첨가). “복이 있”는 자는 바로 심오한 메시야적 구원의 행복을 경험하기 시작한 바로 그 사람이다. 예수가 회당에서 자신의 메시야직을 선언하셨을 때, 그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을 말씀하셨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 이사야 61:1, 2을 인용한 다음에 나옴). 회개한 세리 삭개오가 자신의 개심과 다른 이들을 위한 동정을 선언했을 때, 예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눅 19:9, 강조 첨가)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모든 구속받은 죄인이 받은 바 자비에 대해 감사하고 이 자비를 다른 이들에게 베풀어야 할 것으로 기대하셨다. (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