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성소 (재림교회 신학의 심장) 제 3 장 식양을 따라
 바로 이 경우에 표상과 원형 사이에 나타나는 상응점의 성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말하자면 우리 자신의 눈으로 원형적 성취를 목격 할 수 있는 특권을 받은 경우는 바로 이것 뿐이다. 따라서 이것은 지상 성소와 하늘 성소 그리고 그것들의 봉사에서 일대일 상응점을 찾으려는 우리의 경향을 교정하는 지침으로 기능해야 한다. 이것은 “식양” 개념을 주로 더 깊은 기능적 및 신학적 차원에서 이해하면 안 되는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55.3)
 이런 맥락에서, 히브리서가 “식양” 개념을 어떻게 다루며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무슨 용어를 끌어들이는지를 살펴보면 깨닫는 바가 있다. (56.1)
 히브리서 8:5에서 저자는 레위 제사장들이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휘포데이그마(hupodeigma)]과 그림자[스키아(skia)]를 섬겼다”고 설명 하는데, 이 구절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히브리서에서 튀포스(tupos)]대로”(참조 히 8:5) 성막과 그 기구들을 만들라고 명하신 출애굽기 25:40을 분명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56.2)
 그래서 여기에 세 가지 용어 휘포데이그마, 스키아, 튀포스를 소개 하였다. 우리가 이 용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56.3)
 휘포데이그마는 일반적으로 “본보기”, “모형”, “양식”(樣式)등을 의 미한다. 위에서 제시한 구절에서 그것은 “사본” 혹은 “모사”(模寫)라는 의미를 지닌다. 스키아는 “그림자”, 혹은 “전조”(前兆)를 뜻한다. 튀포스는 정확히 “양식” 혹은 “모형”으로 번역된다.7) (56.4)
 이 용어들의 의미에 관해 더 말할 수 있으나 수많은 사전적 의미가 우리 앞에 있는 문제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문맥이 더 중요한데, 저자 자신이 이런 표현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했는지를 문맥이 보여 주기 때문이다. 문맥을 연구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분명해진다. (56.5)
 1.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어 타브니트(출애굽기 25:40에서 사용 됨. 저자는 이 성경구절을 자신의 주장을 위한 전거(典) 구절로 언급한다)를 헬라어 튀포스(“양식”, “모형”)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는 번역할 때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참조 히 8:5). (56.6)
 2. 따라서, 저자가 휘포데이그마스키아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지상 성소와 하늘 성소 봉사의 관계를 설명하며 같은 절(히 8:5)에서 튀포스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사용한 점으로 보아, 튀포스의 의미는 앞의 두 용어와 관련지어 파악하는 것이 적절하다. 더욱이 내가 문맥을 읽어보면 휘포데이그마스키아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고 결론짓게 된다. (57.1)
 3. 이것은 휘포데이그마스키아가 함께 나오는 따로 나오는 튀포스에 상응하는 단어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히브리어 타브니트를 번역 할 때 히브리서 8:5에서 튀포스를 앞의 두 단어로 대체해도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57.2)
 지금까지의 논리가 옳다면,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히브리서 10:1에 표현된 매우 의미 있는 대조의 도움을 빌어 더 추론해 볼 것이다. 여기서 율법(제사)의 한계는,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스키아]요 참형상[에이콘(eikon)]이 아니”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처럼 히브리서의 저자는 스키아에이콘을 날카롭게 대조한다. (57.3)
 여기서 “형상” 혹은 “외양”을 의미하는 에이콘8)은 신약에서 히브리어 첼렘(selem)을 번역하는 데 사용된 단어로, 하나님과 인간 혹은 아버지와 아들의 육체적 및 영적 닮음9)을 묘사한다. 그것은 의미가 뚜렷한 단어로, 그리스도와 성부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10) 그러나 그 의미가 아무리 뚜렷하다 해도 사려 깊은 성경 연구자라면 예수의 인성 곧 이 땅에서의 예수의 모습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초상(肖像)을 그리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 것이다. 영적인 직관은 우리로 하여금 그토록 불확실한 유비(類比)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57.4)
 요지는 이것이다. 영적인 직관이 분명한(에이콘) 상응을 찾을 수 있는 경우에도 교리화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면, 단지 스키아(혹은 튀포스 혹은 휘포데이그마) 관계만 나오는 경우에는 얼마나 더 강력하게 저지하겠는가? (58.1)
 사도 바울이 지상 성막의 봉사를, 그리스도가 현재까지 수행하는 대제사장 봉사를 가리키는 비유(파라볼레)로 언급한다(히 9:9)고 의아해 할 필요가 없다. 특히 히브리서가 주로 대비(對比)를 통해, 더러는 유비(類比)를 통해 추론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비유와 마찬가지로 표상적인 상징도 정확히 “딱 들어맞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 것은 비교가 옛것에서 새것으로 전이(轉)하는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새것에서 옛것으로도 전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서, 우리는 하늘에 있는 것들이 땅에 있는 것들과 얼마나 닮았는지를 보이려 하지 말고, 하늘의 실체 혹은 원형과 비교할 때 지상의 것들이 얼마나 열등하고 다른지를 밝히려고 힘써야 한다. 우리는 “참것은 지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다. 지상의 것은 단지 희미한 그림자 곧 참것을 가리키는 일시적인 도구에 불과하다∙∙∙참것이 그림자를 설명하지, 그림자가 참것을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11)라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58.2)
 “식양” 개념에서 어떤 것을 도출할 수 있고 어떤 것을 도출할 수 없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상식이 요구된다. 그런데 이것을 분별하는 일에 가장 좌절감을 안겨주는 것은 따라야 할 확정된 해석학적 규칙이 없다는 점이다. (58.3)
 그렇다고 놀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장 심오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 가운데 상당한 분량이 비유적 및 상징적 언어로 표현돼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에서 몇몇 중요한 진리들(예컨대, 속죄)이 지니는 계속적인 적실성(適實性)과 호소력은 대부분 그러한 진리들을 우리에게 전달할 때 사용된 상징적 언어에 있는데, 그 때문에 그것들은 시간적 및 문화적 장벽뿐 아니라 심지어는 개념적 장벽까지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러므로 과학적 정확성을 추구하는 그릇된 열망에서 생긴, 성경의 모든 상징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는 유혹을 뿌리치도록 하자. (59.1)
 따라서 지상의 표상과 하늘의 실체 사이에서 수학적인 일대일 대응 점을 찾으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식양”이라는 단어는 많은 이들이 그것에 실으려는 개념을 전달하지 않는다. (59.2)
 지상 성막에 비교될 만한 더 오래된(가나안인들의) 신전들이 존재함
 수년 전에 내 대학 동기 하나가 이스라엘 이전 시대에 속하는 이방 신전의 유적이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음을 입증하는 한 연구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유적이 이스라엘의 성막/성전의 전반적인 평면 구조와 매우 닮았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가 내린 깜짝 놀랄 결론을 기억하고 있다. “이것은 하늘에 성소가 없음을 입증한다”고 그는 말했다. (59.3)
 물론 그의 결론은 지지를 받지 못했고, 그는 남은 수업 시간 내내 그것 때문에 고역을 치렀다. 그렇지만 그가 발견한 증거의 일부가 어떤 이들에게는 하늘 성소의 “식양”개념에 대하여 문제 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60.1)
 실제로 고대 근동에서 나온 현대의 고고학적 발견으로, 기본적인 형태와 평면 구조가 광야 성막 및 그 후의 예루살렘 성전과 매우 유사한, 이스라엘 이전 시대 가나안 신전의 유적들이 빛을 보게 되었다. G. R. H. 라이트(G. R. H. Wright)는 이 중 몇 가지를 제시하였다. 중기 청동기 시대에 지어진 하솔(Hazor) 신전(B.C. 2000~B.C. 1600), 후기 청동기 시대에 지어진 라기스의 해자(亥子) 신전(약 B.C. 1550), 그리고 여리고에서 발견된 “도기(陶器) 이전 신석기 시대의 신전”(Pre-pottery Neolithic Temple, B.C. 3000년보다 조금 이른 시기로 추정됨).12) 무엇보다 두드러진 한 가지 특징은 신전들의 삼중 구조이다.13) 다른 것보다도 바로 이런 특징 때문에 존 브라이트(John Bright)는 이스라엘의 “국가 신전[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킴]은 가나안인들의 식양(式樣)에 따라 건립되었다”14)라고 확언하기에 이르렀다. (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