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성소 (재림교회 신학의 심장) 제 3 장 식양을 따라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출 25:9).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 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 느니라”(히 8:5). (50.1)
 우리는 이 성경구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이것이 바로 본 장에서 초점을 맞출 쟁점(爭點)이다. (50.2)
 많은 재림교인들은, 이 구절들이 지상 성소와 하늘 성소 사이에 일대일의 상응점이 있음을 지적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지상 성소의 조그마한 진설병상은 하늘 성소의 거대하고 더 웅장한 것을 가리키고, 작은 분향단은 하늘의 큰 분향단을 가리킨다. 같은 방식으로 떡, 향, 피, 등대,(금속으로 만든) 그룹, 법궤 등도 각각에 상응하는 것이 있다. (50.3)
 이러한 문자주의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이들은 하늘 성소를 이렇게 이해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성소 변증학, 곧 비(非)재림교인뿐 아니라 심지어 회의론자들에게 성소 교리를 제시하는 방법에 심각한 장애물이 되지는 않는가? 더욱 심각하게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우리로 하여금 각종 문화와 지성적 및 철학적 신념을 지닌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주신 기별을 실제로 왜곡시키지는 않는가? 극단적 문자주의는, 우리 모두가 성소 기별의 정수(精髓) 혹은 핵심이라고 여기는 것에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가 아니면 방해가 되는가? 나는 이것들이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식양”(式樣)이라는 개념의 의미와 중요성은 우리의 주의 깊은 연구를 요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50.4)
 이런 극단적 문자주의 접근 방식은 적어도 세 가지 문제에 맞닥뜨린다:

 (1) “식양”(pattern)이라는 단어의 모호성,

 (2) 지상 성막 성전에 비교될 만한 더 오래된(가나안인들의) 신전이 존재함,

 (3) 광야 성막과 그 후에 생긴 이스라엘의 성전 사이에 있는 차이점. (51.1)
 “식양” 이라는 단어의 모호성
 출애굽기 25:9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시내산 위에서 본 것의 “식양”(히브리어 타브니트[tabnit]1))을 따라 성소를 건축하라고 명했다. 언뜻 이것은 해석이 전혀 필요치 않은 다소 명확한 진술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하늘 성소의 모델을 보여 주시고, 그런 다음 그것의 본을 좇아 성소를 건축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51.2)
 1981년 성경적 표상학의 본질에 관한 논문에서, 리처드 M. 데이 빗슨(Richard M. Davidson)은 출애굽기 25:9, 40에 나온 타브니트(“식양”)의 의미를 정사(精査)했다.2) 그의 취지는 타브니트의 원래 의미에 “수직적[즉 땅 하늘] 상응”(vertical correspondence)이라는 뜻이 내포돼 있는지를 결정하는 데 있었지만, 본 연구에 관련된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에 관한 정보도 가르쳐 준다. 내가 여기서 우리의 목적을 위해 주목할 만하다고 여긴 관찰 가운데 하나는, 외견상 분명하게 보이는 출애굽기 25:9, 40의 진술이 매우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다. (51.3)
 데이빗슨은 타브니트의 가능한 여섯 가지(여기서 다섯 가지로 축약 함) 해석을 각각의 옹호자들과 함께 부각시켰다.

 1.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상 성소의 축소 모델을 축척 도면 혹은 건축자의 설계도 형태로 보여 주셨다.(각 경우에 모세는 반드시 하늘 성소 자체를 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2.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늘 성소의 축소 모델을 보여 주셨다.(이 경우에도 역시 반드시 그가 실제로 존재하는 그대로의 하늘 성소를 본 것은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3. 모세에게 하늘 성소 자체를 보여 준 다음, 그것의 축소 모델(축척 도면 혹은 건축자의 설계도)을 제공하여 지상 성소를 건축하도록 했을 것이다.

 4. 모세는 하늘 성소 자체를 보았을 것이고, 어떤 종류의 축소 모델의 도움도 없이 직접 그 모양을 따라 지상 성소를 지으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5. 모세는 하늘 성소나 그것의 어떤 도면도 보지 않고 다만 주관적인 환상 혹은 돌발적인 영감을 받았고, 그것에 관한 기억을 떠올려 지상 성소를 건축했을 것이다. 이 마지막 견해는 하늘 성소의 존재를 전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지만 반드시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52.1)
 언뜻 보기와는 달리 상황이 그다지 간단하지 않음이 확실해진다. 접할 수 있는 증거에 비추어 다양한 견해들을 조사한 후에, 데이빗슨은 분명한 승자를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타브니트가] 일차적으로 하늘 성소의 축소 모델을 가리키는지, 하늘 성소 자체(가정된 축소 모델과 함께)를 가리키는지, 둘 모두를 가리키는지 확실하게 결정 하기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4) (52.2)
 하지만 그의 개인적인 견해(나도 그것에 동의한다)는 모세가 하늘 성소를 어렴풋이 본 다음, “지상 성소를 건축할 때 본으로 삼을 식양(式構)으로서,” 하늘 성소의 “축소 모델을 제공받았다”5)는 것이다. 나는(데이빗슨과 견해를 같이하여) 하늘 성소의 위용(威容)이 너무나도 압도적이어서 초라한 광야 성막을 건축하는 데는 모세에게 실제로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 것으로 본다. (53.1)
 이런 점들을 잘 파악했다면 이제 우리는 더욱 복잡한 문제, 곧 기타 물적(的) 세부 사항과 관련하여(지상 성막에서 실제적인 표현을 볼 수 있는) 이 “축소 모델”과 하늘 원본 자체의 관계에 대한 문제와 씨름해야 한다.(데이빗슨이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그의 연구가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형태와 언어에 관련된] 구조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는 이런 종류의 질문들을 다루지 않는다.)6) (53.2)
 “식양을 따라” 건축하라는 개념이 처음 발표되었던 출애굽기의 구절들을 간략하게 검토함으로써 논의를 진행하도록 하자, 학술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내가 “성화된 상식”이라고 부르는 것의 배경에 비추어 진행하면, 타브니트를 통해 전달할 의도가 없었던 개념이 무엇인지 간파하기 시작할 것이다. (53.3)
 타브니트출애굽기 25:9에서 처음 사용된 후, 언약궤, 진설병 상, 금등대 등에 관한 상세한 묘사를 마치고 40절에 다시 나타난다. 어떤 이들은 이 기구들이 어쩌면 외관상의 우아함 때문에, 말하자면 하늘 성소에서 실제로 볼 수 있을 정도의 기품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용례는 우리가 지금 세우려는 논증에 사실상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53.4)
 “식양” 개념의 세 번째 용례는 출애굽기 26:30에 나온다. 거기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산에서 보인 식양(미쉬파트[mišpat])대로 성막을 세우”라고 상기시켰다. 이 구절에서는 타브니트가 아니라 미쉬파트(“판단” 혹은 “규칙”)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지만, 문맥상 출애굽기 25:9, 40에 나온 것과 같은 개념을 다루고 있음이 매우 확실하다. 따라서 여기서 미쉬파트타브니트와 대등한 말이다. (54.1)
 이제 “식양” 개념이 염소털 앙장, 널판, 받침, 띠 등을 자세히 묘사한 후에 나온다는 점을 주목하라. 바로 이 시점부터 예민한 지성을 지닌 사람은 이런 속되고 완전히 자질구레한 품목들이 하늘 성소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한지 의구심을 품기 시작할 것이다. (54.2)
 그렇지만 “식양” 개념의 네 번째 용례가 우리의 성화된 상식에 처음으로 심각한 충격을 준다. 이번에는 이 개념이 특별한 용어(미쉬파트 혹은 타브니트 같은) 없이 번제단을 묘사하는 부분의 끝에 나온다. “너는 조각목으로 장이 오 규빗, 광이 오 규빗의 단을 만들되∙∙∙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단을 위하여 놋으로 그물을 만들고 그 위 네 모퉁이에 놋고리 넷을 만들고 그물은 단 사면 가장자리 아래 곧 단 절 반에 오르게 할지며 또 그 단을 위하여 채를 만들되∙∙∙단은 널판으로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 대로 그들이 만들지니라(출 27:1~8). (54.3)
 위에 묘사된 기구들은 산에서 모세에게 보인 식양을 따라 만들어졌지만, 번제단과 그것의 부속품들은 하늘에서 찾을 수 없다고 결론짓는 것이 합당한 것 같다. 이런 결론은 표상에 대한 원형의 실제적인 성취로 확인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처럼 갈바리는 원형적인 번제단을 대표한다. 우리 주님께서 제물로 드려진 곳이 바로 거기지만, 외형적 형태로 볼 때 그것의 표상의 짝과 얼마나 다른가! (54.4)
 표상에서는 세마포장으로 둘러싸인 신성한 뜰을 보지만, 원형에서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성별되지 않은 갈바리 언덕을 본다. 표상에서는 놋으로 만든 단을, 원형에서는 나무 십자가를 본다. 또한 표상에서는 날카로운 칼이 제물의 목을 따지만 원형에서는 제물의 목을 건들지 않고 다만 주님의 손과 발을 로마인의 못이 찔렀다. 표상은 불운한 짐승 제물이 제사장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모습을 보여 주지만, 원형은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 제사장이며 제물임을 보여 준다. 표상에서는 놋 제단 밑으로 피가 흐르고 제사장의 손가락으로 제단의 뾰족한 뿔들에 발라졌지만, 갈바리에서 흘러나온 진홍색 시내에서 아무도 피 한 그릇 퍼 올리지 않았다. (55.1)
 지면이 허락하면 이런 식으로 계속할 수 있다. 유사점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대조점 또한 똑같이 뚜렷하고 예리하다. 표상에서는, 우주적인 제물인 그리스도께서 그의 못 자국난 손에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꼭 쥔 채 무덤에서 승리하여 일어나 영원히 사신 그 부활의 아침의 영광을 전혀 묘사하지 않았다! (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