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1 부 안식일과 쉼 제 6 장  안식일, 미리 와 있고 남아 있는 하나님의 숨
 “자기 일”과 율법의 의
 스스로 자신의 안식을 구축하려는 “자기 일”에는 불법적인 자기 탐닉과 인간적인 세상 염려만이 포함된 것이 아니다. 스스로 자신을 의롭게 하여 안식을 획득하려는 도덕적이고 율법적인 자기 성실도 포함돼 있다. 어찌하여 율법적인 자기 노력으로는 “저 안식”에 이르지 못하는가. (68.2)
 사도 바울의 말을 풀어 써보자. 사람이 율법적으로 노력하다 보면 사람의 마음에 율법이 들어와서 범죄가 더 늘어난다(롬 5:20). 우리가 육신의 지배를 받을 때에는 율법에 의하여 죄의 욕망이 일어나고, 이 죄의 욕망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여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는다(롬 7:5). 오히려 죄가 계명으로 기회를 틈타고 죄가 계명을 이용하여 내 속에 온갖 탐심을 일으켜 놓는다(롬 7:8). 죄가 계명으로 기회를 틈타 죄를 지으면서도 의를 행하는 양, 무상에 빠져 있으면서도 영원을 추구하는 양 나를 속이고 그 계명으로 나를 죽인다(롬 7:11).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되려고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뒤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다(갈 2:16). 그 누구도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거나 진정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지금 내가 “저 안식에” 들어가 숨쉬고 살고 있는 것은 순전히 나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 아들을 믿는 믿음의 은혜 때문이다. 나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귀중하지(갈 2:20) 나의 업적 같은 것, 나의 의를 위한 나의 노력 같은 것은 차라리 쓰레기 같다(빌 3:8). (69.1)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호소야말로 문제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갈라디아 사람 여러분 왜 그리 어리석은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이 여러분의 눈앞에 생생한데, 누가 여러분을 유혹했는가? 여러분에게 한가지 알아볼 일이 있다. 여러분이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을 지켜서인가 아니면 기쁜 소식을 듣고 믿었기 때문인가?”(갈 3:2, NIV). 필자는 이 말을 이렇게 쓰고 싶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호흡과 그의 안식(성령)을 부여받은 것이 율법을 지켜서 입니까? 아니면 그가 흙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고 또 십자가에서 자신의 숨을 거두신 그가 우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하셨기 때문입니까?” (69.2)
 갈라디아인들에 대한 사도의 호소는 계속된다.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은가? 어떻게 여러분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여러분 자신의 노력으로 완전해 지려고 하는가?”(갈 3:3) 이 말을 히브리서 4장의 문맥에서 이렇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왜 그렇게 어리석습니까? 여러분은 성령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갔는데, 이제는 그 안식을 완전하게 한답시고 하나님 앞에 여러분 자신의 의를 주장하려는 율법주의에 빠진단 말입니까?” 사도의 경고는 단호하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은 저주 아래 있다”(갈 3:10). (70.1)
 그러나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제칠일 안식일에 “자기 일”을 쉬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어떤가. 이것은 다르다. 왜냐하면 이것은 구원과 안식을 얻는 수단으로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얻은 안식을 확인하는 제칠일 안식일의 준수이다. 내면적 안식의 외적 표현이 제칠일 안식일의 준수이다. 하나님의 값없이 주신 쉼 곧, 성령의 열매로써의 제칠일 안식일 준수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은혜로 안식에 이른]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간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갈 5:25, NIV; 비교, 롬 5:12-23; 고전 5:7, 6, 11).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신앙하기 이전에 “우리의 타락한 성품 때문에 율법이 연약하여 할 수 없었던 것을. . . [이제] 성령님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것이다”(롬 8:3-4). “육신을 좇는 사람은” 제 아무리 열심히 율법을 지킨다 하여도 “육신의 일을 생각하여” 지키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었다”(갈 8:5-7). (70.2)
 하나님이 쉬지 못하심과 우리의 저 안식
 하나님의 “저 안식”은 우리의 “자기 일”로 이루어지는 안식이 아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 인간의 “자기 일”로 얻어지는 “안식”들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의 안식을 넘어선 안식, 야곱의 우물물을 넘어선 물, 그리스도가 주는 물 같은 안식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사람의 안식을 하나님의 안식으로 착각하지 말고, 사람의 안식으로 하나님의 안식을 대신하지 말라는 말이다. 사람의 안식을 너머, 율법의 안식을 너머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오라는 말이다. (71.1)
 하나님의 “저 안식”은 인간의 모든 “자기 일”을 초월한다. 이 안식을 위해 우리는 두 손을 완전히 놓아야 한다. 오히려 “저 안식”“입술의 열매를 짓는 여호와”(사 57:19), “일을 행하고 그것을 성취하는 여호와”(렘 33:2), “그 오른손, 그 능력의 팔로 맹세하신”(사 62:8) 여호와로 하여금. . .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 . 쉬지 못하시게”(사 62:7) 함으로 우리에게 가능한 것이다. (71.2)
 하나님이 값없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 숨쉼의 선물이요, 성령의 선물이다. 성령의 선물 안에 안식의 선물이 있다. 우리의 안식을 위해 “쉬지 못”하시면서 “자기 일”을 하시는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가 온전히 그를 의지함으로써만이 가능하게 되는 숨과 쉼이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숨과 쉼이다.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숨쉼이다. 이 숨과 쉼이 오늘과 내일에 우리를 기다리는 그리스도의 숨쉼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남아 있는” 안식이다. (71.3)
 사람이 최초로 누린 안식일 안식은 사람이 빈손으로 누린 안식이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쉬지 못하시”면서 이룩하신 축복에 사람은 아무런 “자기 일”의 성취 없이 빈손으로 초청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이 안식은 우리의 공로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쉼이다. 단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목마른 자는 “자기 일”을 쉬고 물과 숨으로, 물과 성령으로 나와서 값없이 마시고 숨쉬라는 것이다. 제칠일 안식일은 이같은 안식의 증인이며 특별한 형태로 이 안식을 우리에게 체험시키는 시간이다. (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