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1 부 안식일과 쉼 제 6 장  안식일, 미리 와 있고 남아 있는 하나님의 숨
 물과 숨과 성령
 그리스도교는 놀라운 초청의 종교이다. 숨과 쉼으로, 생명으로 초청하는 종교이다. 위대한 초청의 말은 이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 초청의 평행절은 이사야 55장 1절이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63.1)
 위의 두 성경절이 하나의 문맥에 있음은 요한복음 7장 37-39절에 의해 밝혀진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 . .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그리고 우리는 앞서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63.2)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와서 마시라”고 한 물은 성령 곧, 예수님의 숨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물과 호흡으로, 즉 물과 성령으로 다시 호흡을 되찾고 살아나는 것이다. 목마름은 숨 마름이요, 물 마름이다. 물과 숨의 갈증, 곧 물과 성령의 갈증이다. (63.3)
 예수님이 “물로 나오라,” “숨으로 나오라” 하신다. 수고와 무거운 짐으로 말미암아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이던”(사 42:14) 사마리아의 한 여인은 “목마르지 않은 물”(요 4:15)을 구하여 그 물과 숨으로 새 삶을 얻었다. 오늘과 내일에 우리를 기다리는 숨이 이 숨, 이 쉼, 이 성령이다. 물과 숨과 같은 소망, 물과 숨 같은 성령의 안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늘과 내일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64.1)
 남아 있는 안식, 그리고 미리 와 있는 안식
 신약성경 히브리서 기자는 위의 안식의 소식을 색다른 필치로 전하고 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히 4:9-10). (64.2)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된 “그의 안식”(히 4:1) 혹은 “저 안식”(히4:3)은 출애굽의 반역한 세대들에게 “하나님이 맹세코. . . 들어오지 못하게” 한 안식일뿐만 아니라, 여호수아와 더불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세대도 “들어가지” 못한 안식이다. 그렇지만 이 안식은 또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 . 이루어진”(히 4:3) 안식이며, “이미 믿은 우리들이” 지금과 여기에서도 “들어간 안식”이다. 아직 오지 않거나 두고두고 오지 못하는 미래(未來)의 안식이 아니라, 확실히 앞으로 올, 장차 오는 장래의 안식이다. 장래일 뿐만 아니라 이미 여기 와 있고, 지금 미리 와 있는 안식이다. (64.3)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지금의 성소와 장차의 지성소가 하나로 터졌듯이 안식의 경험에 있어서도 현재와 장차가 하나로 뚫렸다. 앞에 있는 “지성소”의 시대를 위해 “남아 있는 안식”은 사실상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 . 이루어진” 안식이요, 지금의 “성소” 시대에 미리 앞당겨 와있는 안식이다. 미리 와서 “이미 믿는 우리들이 들어간” 안식,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 가운데서 우리가 지금 숨쉬고 살아가는 우리의 안식이며 지금의 안식이다. 그리므로 “너희 목마른 자들은 내게로 와서 마시면” 되는 것이다. (64.4)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안식”으로의 초청이 이와 같은데도 불구하고 “너희 중에 그의 안식에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두려워할지며”(히 4:1), 마땅히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라”고 말하고 있다(히 4:11). “그의 안식” 혹은 “저 안식”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지 못한 안식이다(히 4:6).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얻을 때 얻은 안식이 미치지 못하는 안식이다. (65.1)
 여호수아라는 이름의 희랍어 형태가 예수이다. 여호수아와 예수는 이렇게 같다. 그러나 두 이름의 주체는 서로 다르다. 여호수아의 안식과 예수의 안식은 서로 같아 보이면서도 서로 다르다. 두 번째 여호수아인 예수의 안식의 시대에 살면서 여호수아의 안식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이들은 예수와 더불어 교회 안으로는 들어갔지만 예수의 안식에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교회의 안식과 예수 안의 안식은 같아 보이면서 서로 다르다. (65.2)
 두 안식
 히브리서 기자는 이 두 안식을 구별하였다. 여호수아가 준 안식은 일반적 세속적 의미의 안식이다. 사람의 노력으로 얻는 안식, 쟁취로써 얻고 “지켜서” 얻는 안식이다. 땅으로 말미암고, 집으로 말미암고, 율법과 도덕으로 말미암는 안식이다. 이 안식은 사람이 주는 사람의 안식이며, 사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감으로써 얻는 땅의 안식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이 “자기 일”(히 4:10)을 함으로써 얻는 안식이다. 사람이 “자기 일”로써 획득하는 사람의 안식과 땅의 안식은 진정한 안식이 아니다. 목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안식이 아니고, 숨가쁘지 않는 안식이 아니다. (65.3)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는” 예수의 안식은 그렇지 않다. 목마르지 않고,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안식이다. 사람의 “자기 일”로 말미암지 않고, 사람이 “자기 일”을 쉼으로써만 얻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얻는 안식이다. 이름하여 안식일 안식 곧 “사바티스모스”(히 4:11)이다.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야 한다면, 그것은 “자기 일”을 중지하고 “자기의 의”를 내려놓는 일에 힘써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안전과 안식을 확보하려는 자기 노력 곧 “자기 일”을 쉬지 않고는 결단코 하나님의 “저 안식”을 경험할 수 없다. (66.1)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안식을 마련하려는 “자기 일”은 범죄적이고 비도덕적인 자기 탐닉의 형태(갈 5:19 이하)로도, 감성적이고 인간적인 세상 염려(마 5, 6장)로도, 그리고 자기의 의를 내세우려는 율법주의적 노력으로도 나타난다(갈 3:3; 빌 3:6; 롬 5:26; 7:7-11). 그 어느 쪽이든 “자기 일”은 무상한 사람의 일에서 자신의 안식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인간의 안식을 무상한 인간의 차원에서 제한시키고 인간 자신을 무상한 세상일의 노예로, 쉼 없는 무상한 존재로 만들뿐이다. (66.2)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는 “저 안식”은 사람의 범죄적 자기 탐닉으로나 도덕적이고 율법적인 자기 확대의 노력으로 확보되는 안식이 아니다. 사람에게서 초월한 하늘의 안식이고 하나님의 안식이다. 이 안식에 “들어가면” 사람이 “자기 일”을 쉬어야 한다. 스스로 자신의 안녕과 안전을 기하려는 노력을 쉬어야 한다. (66.3)
 참 안식에 이르는 일 - 자기 일을 쉬는 일
 예수님은 참 안식을 위하여 “자기 일” 을 쉬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 걸친 산상수훈의 말씀이 그것이다. 그 말씀의 몇 줄을 필자의 말로 옮겨 보겠다. (66.4)
 “참된 안식에 이르려면 우선 헛맹세하는 일부터 쉬어라. 자신의 허약한 성실성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때마다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하나님이 알 것이다’ 하지 말라. 때마다 예루살렘을 팔고 종교를 팔지 말라. 자기 판단을 할 때는 투명한 원칙 위에 서서 옳다 아니다 하면 그만이다. 억지 설득과 억지 변명으로 말을 보태지 말라. 무엇보다도 악한 자가 문제이다. 그러나 사실은 악한 자가 문제가 아니라, 악한 자의 악행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문제이다. 그 태도의 여하에 따라 우리의 안식이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왼편 뺨까지를 돌려 대면 뺨까지야 치겠지만 그가 어찌 너의 존엄성까지, 그리고 그 존엄성에 깃든 너의 안식까지 해칠 수가 있겠느냐. 누가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부당한 손해를 당하지 않으려고 버둥대지 말고 겉옷까지 내줄 요량으로 살면 옷가지야 없어지겠지만 마음속의 안식까지 가져가고자 하겠느냐. 흔히 바르게 살려는 사람들이 악한 자의 악행을 잘 참으면서도 악한 자의 번영은 참지 못한다. 악인에게 비치는 태양과 악인에게 내리는 비를 가지고 시시비비하지 않으면 홀연히 네 속에 안식의 광명이 충만하리라. 그러니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하고 모든 판단을 선하신 하나님께 맡길 일이다. 항시 사람의 과실을 용서해야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의 과실을 용서하신다고 하지 않는가. 사람을 의식하고 의를 행하든지 나팔 불면서 구제하는 일을 많이 해 보았자 모두가 네 영혼의 참된 안식에 전혀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안식을 피폐케 할뿐이다. 차라리 은밀히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 이것이 내적 안식으로 가는 길이다.” (67.1)
 “보물을 땅에 쌓으면 가족 부양과 노후의 걱정을 크게 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재산이 좀먹을까 도적질 당하지 않을까 오히려 걱정만 는다. 보물을 차라리 하늘에 쌓아 두라. 하늘같이 높고 귀한 가치에 대한 투자만큼 영혼의 안식에 힘 되는 것이 따로 없다. 진정한 안식의 가치야말로 하늘같이 높고 귀한 가치이다. 거기에 보물을 쌓으라. 그러고 보니 무엇이니 해도 눈 밝은 것이 제일이다. 사물을 제대로 보는 것이 첫째이다. 눈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다. 눈은 마음이 보는 것을 본다. 눈 밝은 사람은 마음 밝은 사람이다. 마음 밝은 사람이 따로 없다. 하늘과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보기는커녕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만 해도 근심과 탄식의 열 중 아홉은 사라질 것이다. 정말 그렇다. 하나님 한 분 제대로 섬기면 끝날 걱정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 한 분으로 마음을 턱 놓으면 그만인 일을 가지고 이 귀신 저 귀신, 이 상전 저 상전, 이 걱정 저 근심을 섬기고 챙기느라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던 것이다. 제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들이 창고 걱정, 길쌈 걱정하던가. 그래도 너희 하나님 아버지가 그들을 돌보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너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러면 모든 염려가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다.” (6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