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끝 없는 논쟁—사람이 당하는 고난과 불행의 까닭
 “욥이 어찌 까닭 없이 ∙∙∙ ” 아늑하고 평화스럽던 동방의 의인 욥의 가정은 졸지에 고난과 불행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었습니다. 이러한 고난과 불행의 까닭을 해명하기 위해 욥의 친구들이 몰려듭니다. 그러나 욥이 겪는 고난의 사연은 쉽사리 그 까닭을 찾지 못한 채 끝 없는 변론을 펼치며 장장 40여 장을 넘어갑니다. 마침내 마지막 42장에서 욥은 고백합니다. 그 동안 펼쳤던 모든 변론, 욥의 고난의 사연“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3절)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 자신도 깨닫기 어려웠던 욥기의 사연, 곧 인간이 까닭을 모르고 당하는 고난과 불행의 까닭은 무엇입니까? 이 논쟁의 주제는 인간이 깨닫기가 가장 어려운 신비입니다. 그리고 끝 없는 논쟁거리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고 제자들은 이 엄청난 고난과 불행의 이유를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요 9:2). 대답을 찾아야 할 심각한 질문입니다. 대답이 있습니까? (111.1)
 2. 끝 없는 논쟁—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까닭
 그것이 바로,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1:9)로 시작되는 욥기의 주제입니다. 사단은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까닭이 무엇이라고 고발합니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10절) (112.1)
 마침내 하나님과 사단은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까닭을 놓고 대논쟁(大論爭)을 고조시킵니다. 사단은 자신만만하게 욥이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까닭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각종 혜택, 말하자면 하나님 덕분에 자식이 잘 되고 재산이 불어나는 등 하나님과의 현실적인 거래(去來)를 통하여 얻는 유익이 있으니까 장삿속으로 그렇게 한다는 논증을 자신있게 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결과로 마땅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그러한 현실적인 혜택과 거래(去來)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논증으로 맞서심으로써 하나님과 사단의 하나님을 섬기는 “까닭” 논쟁은 욥을 가운데 두고 치열해집니다. (112.2)
 3. 까닭 모르는 인간의 고난과 하나님을 섬기는 까닭 논쟁
 이리하여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까닭이라고 사단이 고발한 하나님과의 모든 거래(去來)는 삽시간에 단절되고, 그가 누린 하나님의 모든 혜택은 졸지에 몰수당함으로써, 욥의 까닭 없는 고난은 시작됩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까닭을 밝히는, 까닭 모를 고통이 욥기에 메아리쳐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벌어진 이 대논쟁의 배후와 진상을 깨닫지 못한 욥의 친구들은, 욥이 겪는 그 극심한 고난이 그와 그의 자녀들이 저질러온 죄에 대해 하나님이 행하신 인과응보적인 심판의 결과라고 경건하게 단정하고 나섭니다. 이렇게 왜곡시킨 죄(罪)의 그릇된 논리를 통하여 사단은 모든 고난을 초래한 배후요 장본인인 자신의 실체를 숨기고 그 책임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해야 하는 까닭에 일대 혼란과 심각한 오해와 갈등마저 일으킵니다. 차라리 그런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2:9)는 것이 욥기에서 폭로된 사단의 감춰진 진심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순에 에워싸인 욥의 까닭 모를 고난은 깊어지고 까닭을 모르기 때문에 더욱 깊어져만 갑니다. (112.3)
 4. 오해된 인간의 고통 까닭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 까닭
 욥의 친구들을 통하여 대변된 죄와 벌에 관한 사단의 왜곡된 논증은 놀랍게도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바라보며 그들은 단정하는 논조로 묻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로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이니이까”(요 9:2).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대답을 하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3절). 욥기에 나타난 사단이 그 배후요 장본인인 죄의 교묘한 진상을 드러내고 죄와 벌의 실상을 밝혀 죄의 결과인 고난을 영원히 끝내시기 위하여 당신이 이 땅에 오셨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113.1)
 그러나 놀랍게도 욥의 고난을 왜곡시켜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일대 논쟁을 효과적으로 주도했던 사단은, 죄의 진상을 드러내고 그 결과인 고난을 끝내시기 위하여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 십자가의 의미와 효력을 파괴하는 일에도 똑 같은 논증을 적용합니다. (114.1)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 욥의 고난을 하나님의 심판 탓으로 돌린 사단의 시도가 효과적으로 적용되어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욥이 당하는 까닭 모를 고통을 욥이 저지른 죄의 탓으로 돌린 사단은 예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도 하나님의 인과응보적인 심판의 탓으로 돌린 것입니다. (114.2)
 5. 거래가 있어야 유지되는 세상 — 거래 없이도 유지되는 관계
 사단이 주장한대로 세상의 모든 관계는 오고가는 것, 즉 타산이 맞는 거래가 있어야 유지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심지어 가장 가깝다는 결혼관계도 그것을 통하여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유익을 염두에 두고 성립되는 일종의 거래관계라는 현실을 드러냅니다. 그것이 욥의 아내가 보여준 태도입니다. 몸인 튼튼한 부자집 아들이요 권세를 누리는 집 자식이라는 유리한 조건을 고려하여 남편으로 택한 욥이 이렇게 졸지에 몸이 병들고 자식이 죽고 재산이 없어지고 집안이 무너지자 인간의 본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평생 운명을 같이 한다는 결혼관계도 이처럼 거래관계로 변해버린 세태가 예전부터 있어 온 인간의 본심이라는 서글픈 현실입니다. 이처럼 거래가 있어야 유지되는 관계로 이루어진 세상에 사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언제나 피곤한 삶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거래할 만한 가치를 지닌 존재가 되어야 하는 존재의 부담과 함께 그런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불안이 언제나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114.3)
 그렇다면 이러한 거래가 없이도 유지되는 그런 관계는 없습니까? 그것이 바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낳은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부모는 자식에게 유익한 것이면 모든 것을 조건 없이 아낌 없이 제공합니다. 사랑을 낭비(浪費)하는 것입니다. 필요하면 생명까지도 내어놓습니다. 부모의 이러한 사랑을 이해한 철난 자식은 그러한 부모에게 최고의 존경, 최선의 사랑, 최대의 감사를 표현합니다. 병약하거나 불구된 자식, 못사는 자식을 더 사랑하고 정성을 쏟는 것이 부모입니다. 손해보면 볼수록 더욱 투자하는 부모와 오히려 어렵고 가난한 현실에서 자신들을 양육하신 부모에 대해 더 큰 감사와 사랑을 효도로 표현하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타산적인 거래 없이도 유지될 수 있는 최고의 관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115.1)
 이처럼 거래 없이도 유지될 수 있는 관계를 통해서만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찾게되기 때문에 자신을 스스로 가치있게 만들려는 삶의 부담에서 벗어나 존재의 자유를 누림으로써 진정한 안식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행복인 것입니다. 친정 어머니 앞에서 해산의 부담을 내려 놓을 수 있음 같이 인간에게 생명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진정한 안식을 주실 수 있습니다(마 11:28). 그것이 창조의 기념일만이 안식일일 수 있는 까닭입니다(히 4:3, 9~11). 이처럼 거래 없이도 유지될 수 있는 관계는 생명을 주신 부모와 그 생명을 받은 자식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신비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모든 생명은 이러한 사랑의 결과로 태어난다는 생물학적인 진리는 이 신비한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유지시키는 생명의 법칙인 것입니다. (115.2)
 6. 진정한 관계, 진정한 예배
 그렇다면 이처럼 신비한 관계의 근원은 어디입니까? 인간에게 생명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과 그 생명을 받아 누리는 인간 사이의 관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해야 하는 까닭, 곧 예배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창조주라는 사실과 함께 그분의 사랑 때문에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창조의 사랑을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 때문에 창조하신 인간이 죄지어 죽게 되었을 때, 사형수 자식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을 수 있는 어머니의 본능으로 대속(代贖)의 죽음을 죽으신 구속의 사랑을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116.1)
 사단의 고발처럼 자식이 잘 되고 재산이 불어나는 혜택을 받기 때문에, 현실적인 축복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기복(祈福)신앙은 일종의 상업적인 거래(去來)이지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는 아닙니다. 이러한 거래(去來)의 원리는 사단이 세상을 다스려나가는 이기적이고 파멸적인 자기 중심의 법칙이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생명을 주고 받은 하나님과 인간의 끈끈한 관계는 하나님이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늘의 질서요 법칙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 즉 생명을 주고 받은 사이에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관계에서 자식이 그러한 부모에게 나타내야 할 사랑과 존경으로 가득찬 효도 관계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에서 인간이 그러한 하나님께 마땅히 나타내야 할 사랑과 경외로 가득찬 예배관계입니다(사 43:7).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는 엘리야의 사명이요,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으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예배]하라”세 천사의 기별의 핵심인 것이다. 하늘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관계를 경험한 사람들만이 사는 곳입니다. 욥이 경험한 하나님은 창조와 구속의 사랑을 지닌 하나님이었습니다. 그것이 욥기가 창조와 창조주 하나님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계시록과 세 천사의 기별이 창조와 구속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입니다(계 14:7; 4:11, 12). (116.2)
 7. 거래로 유지되는 질서, 바벨론의 붕괴
 계시록에 기록된 바벨론은 “상고”(商賈), 곧 장사꾼의 나라입니다(18:3, 11~19). 그것은 거래로 유지되는 관계로 구성된 사단의 통치입니다. 욥의 생존을 위해 필요했던 모든 혜택과 거래를 일시에 끊어버림으로써 하나님과의 거래 없이도 유지되는 하늘의 질서인 예배 관계를 파괴하려 했던 사단은 꼭 같은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표(짐승의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 ”(13:17). 매매 곧 거래를 끊어버림으로 창조주 하나님께 마땅한 예배 관계를 단절시키려는 것, 그것이 짐승의 표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하늘에서 시작된 대쟁부의 대쟁점입니다. 살기 위하여 사단의 통치방법인 거래의 법칙에 굴복한 사람은 짐승의 형상으로 남을 것이며, 그것이 “짐승의 표”의 내용입니다(계 13:16, 17). 그러나 창조의 목적인 예배 관계를 욥처럼 끝까지 고수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의 핵심입니다. (1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