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증 3. 그리스도의 사업: 우리의 확증
 인류를 위한 예수의 구속적 사업을 떠나서 우리는 그를 알 수 없다. 그리스도라는 이름 그 자체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의 그분의 호칭과 권위를 나타내는데,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하나님의 영의 충만하심으로 준비되었음을 의미한다. (43.1)
 히브리 선지자들의 메시야적 예언들은 이 거룩하신 사절의 오심을 예고하는데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음에 나타난 이사야의 예언은 그 명료성에 있어서 두드러진다. (43.2)
이새[다윗 왕의 아버지]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사 11:1, 2, 3a).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사 61:1, 2).
(44.1)
 예수께서 자신의 침례에서 하나님의 영의 충만하심으로 기름부음 받은(참조 마 3:16, 17; 행 10:38) 다음 안식일에, 그는 이사야 61장의 예언이 자신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셨다(참조 눅 4:16-21). 그분의 주된 사명은 설교하거나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과 인류를 지배하고 있는 그의 세력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통치—나라—에 대한 그분의 기별은 근본적인 악의 문제와의 투쟁을 포함했다. 그는 어떤 사람이 그분의 봉사로부터 어떤 유익을 얻기 전에 이 모든 악의 뿌리를 다루어야만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마귀의 유혹을 대면하도록 그를 광야로 이끌었던 것이다(눅 4:1-13). (44.2)
 죠지 E. 래드(George E. Ladd)는 악의 문제에 관한 분명한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44.3)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죄의 실상과 인간의 필요에 대한 예수의 해석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마귀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인간은 자신보다 강한 인격적 능력에게 사로잡혀 있다. 우리 주님의 사명의 정 중앙에는 사단의 왕국에 포로로 잡힌 인간을 구원하고 하나님 나라의 영역으로 그들을 이끌 필요가 놓여 있다.1)
(45.1)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세상으로 들어왔다. 그는 귀신들린 자를 구원함으로써 자신의 자유케 하는 능력을 보여주시며 이렇게 설명하셨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강조 첨가). 예수께서는 강한 자를 “결박”하였다고 선언하셨다(마 12:29). 사단을 “결박”했다는 이 비유를 통해, 그는 악의 권세를 억누르셨다는 사실을 지적하셨다. 사단이 무기력한 것으로 표현되진 않았지만 그의 강력한 능력은 깨어졌다. 비록 그의 멸망은 세상 끝에 있을 것이지만(눅 10:18; 계 20:10), 그는 인류에게 군림하는 자신의 위치에서부터 떨어졌다. 따라서 예수께서 계신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2) (45.2)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랑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 보았다.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는 그분의 사명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포함했다. 그 사명은 온 세상을 포함했다. 심지어 이스라엘, 곧 택하신 백성도 돌보는 목자 없이 방황하는 양 같았다. 그래서 에스겔의 메시야적인 예언은 참된 목자의 도래를 약속했다(겔 34:11-24). 예수께서 회개한 삭개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9, 10 강조 첨가). 이 진술에서 그가 에스겔의 약속을—성취하였음을 주장하고 계셨다. (45.3)
 기쁜 소식은 현재의 구원, 오늘의 구원이란 사실을 주목하라!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 잃은 은전, 잃은 아들에 관한 예수의 비유들 역시 이 현재의 구원을 묘사한다. 그리고 우리는 질병을 고치고 죽음 자체로부터의 부활이라는 예수의 기적들에서 특별히 메시야적 구원의 임재를 본다(눅 4:38-41; 5:12-26; 8:53-56; 요 11장). 그는 이런 구원들이 메시야와 그분의 구원의 임재를 입증한다고가르치셨다(참조 마 11:4, 5). (46.1)
 그러나 틀림없이 메시야의 가장 큰 선물은 죄의 용서였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선물을 주실 수 있다(사 43:25; 시 32:5). 그래서 바로 여기서 지금 그들의 죄가 사함 받았다는 예수의 선언은 유대인들을 소스라치게 했다(참조 마 9:2; 눅 7:48; 18:14). 그는 사람들이 선지자들이 약속한 하나님의 이 행위를 지금 경험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셨다. (46.2)
 고난당하는 종 예수
 그리스도는 이사야 42-53장의 네 “종”의 예언들3)을 보면서 자신의 전생애와 죽음을 보셨다(참조 눅 22:37). 자신의 침례에서 그는 아버지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고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시는 것을 들으셨다.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사야의 택함 받은 종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예수는 자신의 말씀 가운데 이 확신을 생생하게 요약하셨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뤼트론 안티 폴론 lutron anti pollōn—문자적으로 ‘많은 사람을 대신한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강조 첨가). 이 주제는 이사야의 종의 노래들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46.3)
 “대속물”(뤼트론 lutron)을 언급함에 있어서 예수는 이사야 53:10의 속죄제를 암시하고 계셨다. 그리고 “많은 사람의(for many)”라는 그분의 표현은 이사야 53:11, 12에서 반복된 “많은 사람”을 반향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자신의 죽음의 특별한 목적을 설명하실 때, 이사야 53:12을 인용하기도 하셨다: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눅 22:37). (47.1)
 예수의 죽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최고의 중요성을 띤다. 그것은 단순히 한 순교자의 죽음 이상이었다. 그것은 다른 어떤 죽음으로도 할 수 없는 것을 이루었다. 예수께서는 온 세상을 위하여 대속적인 죽음을 당하셨다. 잃어버린 바 된 사람들이 구속받을 것인데, 이는 그가 자신의 생명을 그들 대신 주셨기 때문이다.4) (47.2)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속죄제물로 자신의 생명을 주셨다(사 53:10). 이것은 자신의 죽음을 하나님 면전의 희생적 죽음, 곧 죄의 용서를 위한 죽음으로 만들었다(참조 마 26:28).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6)라는 그분의 질문은 그가 인류를 위해 고난 당해야 할 것을 아셨음을 보여준다. (47.3)
 예수의 삼중 직무
 루터와 칼뱅은 예수의 메시야 사명의 세 측면, 즉 선지자, 제자장, 그리고 왕으로서의 그분의 역할을 구별했다. 칼뱅은 자신의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에서 예수의 삼중 직무를 광범위하게 발전시켰다. 거기서 그는 아버지가 예수를 보내신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그분의 “예언적 직무, 왕권, 그리고 제사장직”을 알아야 한다고 분명히 진술했다.5) (48.1)
 예수: 가장 위대한 선지자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그를 참된 선지자로 인정했다(마 21:11, 46; 눅 24:19). 그러나 예수는 단순히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을 전한 선지자가 아니셨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화신이셨다. 요한은 그를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이라 불렀으며, 예수에 관한 이 진리를 아버지에 대해 “설명하는”(요 1:18, NASB) 예수의 사업과 연결시켰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구현하셨다는 사실은 그가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는 것을 나타낸다. (48.2)
 모세는 예수께서 선지자로 오실 것을 예언하였다(참조 신 18:15, 18, 19). 이스라엘의 첫 지도자 이래 모든 선지자들은 단순히 메시야의 표상이나 혹은 예언적 예시로서 임무를 다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3:22, 23에서 모세의 옛 예언을 예수에게 적용시켰다. 그리고 예수 스스로도 자신의 예언적 기능을 인식하시고, “요나 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마 12:41)고 언급하심으로 그것을 선언하셨다. (4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