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쉬운 요한계시록 제3장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계시
 요한이 지금 들은 그 음성은 그의 귀에 익숙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요한이 일찍이 약 3년 반 동안 들었던 예수님의 음성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말씀하시는 분을 보기 위하여 뒤를 돌아보았을 때, 요한은 일곱 금촛대와 그 가운데 “인자 같은 이”가 서 계시는 것을 보았다(계 1:12-13). 이 촛대들은 각기 그 꼭대기에 등을 가진 서로 분리된 촛대들이었다. 요한은 후에 이 촛대들은 그가 기록한 계시록을 보낸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상징한다고 설명하였다(1:20; 참고 1:11). (48.2)
 이 이상은 고대 유대인의 성전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의 성전에서 촛대(등대)들은 빛으로 성전 안을 밝혔다(왕상 7:49). 성전의 등대들은 또한 이스라엘이 그 주위에 있는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빛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시는 것이다(사 42:6-7; 49:6; 60:1-3). 예수께서는 교회가 어둠에 휩싸여 있는 이 세상에 빛을 발하는 등대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5:14-16; 참고 빌 2:15). 등이 빛을 발산하려면 증인 위에 놓여 있어야 한다(참고 막 4:21; 눅 8:16). 만일 교회가 세상을 비추는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그 교회는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계 2:5). (48.3)
 하지만 이 장면의 초점은 교회들에게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계신 예수님에게 맞춰져 있다. 요한은 예수님이 끌리는 옷을 입고 허리에 띠를 매고 계신 것을 보았다(참고 계 1:13).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사하는 대제사장은 발까지 닿는 긴 예복을 입었고, 허리에는 띠를 둘러매었다고 기록했다.4 이사야는 메시아에 관하여 예언하기를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5)고 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의 일과(日課) 중의 하나는 성소(첫째 칸)에 있는 등들이 밝게 타도록 돌보는 것이었다. 제사장들은 등잔을 손질하고, 기름이 떨어지면 다시 채워 주며, 심지가 다 타면 갈아주고, 새 기름으로 등을 다시 밝혀주는 일을 하였다(출 30:7-8).5 (48.4)
 예수께서 제사장의 예복을 입으시고 촛대 사이로 걷고 계시는 모습은 예수께서 교회들을 위해 봉사하시며 그들의 필요와 형편 가운데서 그들을 도우시는 제사장으로 묘사한다. 이 장면은 고대 이스라엘이 언약의 땅(Promised Land)으로 향해 가는 길에서 주어진 다음과 같은 언약을 생각나게 한다.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2). 이제 예수께서는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상징적인 광경을 통하여 이 언약을 성취하셨다. 이 모든 것들은 요한과 일곱 교회에게 이 세상 끝날까지 그의 백성과 계속해서 함께하시겠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언약과 그의 임재를 확증하고자 의도된 것이었다. (49.1)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1:13-16)
 예수님은 높이 들리신 영광의 주님으로 요한에게 오셨지만 “인자 같은 이”(계 1:13) 다시 말해서, 한 인간으로 나타나셨다. “인자”는 예수님이 가장 즐겨 사용하시던 자기 칭호였다(마 26:46; 막 13:26; 눅 19:10). 요한은 일찍이 변화산(Mount of Transfiguration)에서 예수님의 영광의 편모를 본 적이 있다(막 9:2-3; 참고 벧후 1:16-17). 하지만 이 계시 가운데서 요한이 본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는 육신에 계실 때에 그가 본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사도는 예수님의 용모를 인간의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을 묘사하기 위해 애쓰면서 요한은 하나님에 관한 고대의 영상들과 구약의 기술들을 사용한다. (49.2)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묘사는 다니엘 10:5-12에 나오는 사람과 같은 하나님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이상의 분이시다. 그는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특성들을 지니고 계신다. “인자 같은 이”라는 표현은 다니엘 7:13-14에 묘사된 분과 동일한 분이시다. 예수님은 다니엘 7:9에 언급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의 흰 머리털을 가지고 계신다.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이 발은 빛난 주석과 같으며, 그의 얼굴은 다니엘의 이상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처럼 빛난다(참고 단 10:6; 참고 마 17:2). 많은 물소리와 같은 그의 목소리는 에스겔 43:2에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었다(참고 단 10:6). 이와 같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난 인물의 이미지들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특성들과 대권들을 지니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주님을 금방 인지하였다. (49.3)
 구약에 사용된 이미지들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면서 요한은 “같은”(like) 또는 “처럼”(as)이라는 단어들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문자적 의미보다는 은유적 의미로 이해해야 함을 시사한다. 고대 세계에서 희거나 회색의 머리털은 지혜와 경험을 상징했다(욥 15:10; 잠 20:29). 그리스도의 불꽃 같은 눈은 인간의 마음속 깊이 숨겨 있는 비밀을 꿰뚫어보시는 능력을 의미했고(계 2:18, 23),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은 그의 발은 안정됨과 힘이 있음을 상징하였으며(겔 1:7), 나팔 소리와 많은 물소리 같은 그의 음성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고(겔 43:2), 해가 비취는 것 같은 그의 얼굴은 높이 오르신 예수님의 얼굴이었다(마 17:2-3). 더욱이 그의 입에서 나오는 좌우에 날선 검(히 4:12)이 나온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충만한 권능으로 나타나시고 행동하심을 뜻했다. (50.1)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표현으로 예수님의 형상을 그린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특히 호소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이런 묘사가 요한 시대의 서부 소아시아에서 인기리(人氣裡)에 숭배를 받던 그리스 여신 헤카테(Hekate, 천상과 지상 및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여신)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었다. 이교도들은 그 여신에게 우주적 권위를 돌렸다. 그들은 그 여신을 하늘, 땅, 그리고 하데스(Hades, 지하세계)의 근원이요 통치자, 그리고 자신들의 종말을 짓는 동인(動因)으로 여겼다. 그 여신은 우주의 각 부분에 상응하는 세 가지의 형태로 자신을 나타냈다. 그녀의 천상(天上)의 형태는 셀레네(Selene, 달) 또는 루나(Luna, 달)였고, 지상(地上)의 형태는 아르테미스(Artemis, 아데미) 또는 디아나(Diana, 다이애나)였으며, 지하(地下)의 형태는 페르세포네(Persephone, 지옥의 여왕)였다. 그 여신은 하늘과 하데스(지하세계)를 잠그고 여는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열쇠 소지자”(keybearer)라 불리었다. 그 여신은 다음과 같이 일컬어졌다. “당신은 시작과 끝이요, 당신 홀로 만물을 주관하나이다. 만물이 당신에게서 오고, 당신 안에 만물이 있나이다. 영원하신 분이시여, 오셔서 그들의 종말을 고하소서.”6 (50.2)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방인들에게 그들의 유일한 희망으로서의 자신을 어떻게 나타내는지를 본다. 이방 종교에서 그들이 희망하던 모든 것을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다. 그리스도의 권능은 헤카테의 권능을 초월하며, 하늘과 땅과 지하에 있는 다른 모든 권능을 초월한다(참고 빌 2:10).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셨고, 이것은 그로 하여금 “사망과 음부(하데스)의 열쇠”(계 1:18)를 갖게 하였다. 더욱이 그의 사망과 부활로 인하여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서 그의 백성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부양하신다. (51.1)
 요한에게 하신 격려의 말씀(1:17-20)
 예수님은 요한에게 격려의 말씀을 하려고 밧모 섬에 오셨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을 돌보는 목사였는데, 그들의 지도자로서 요한 자신도 격려가 필요했다. 일찍이 변화산 위에서 그랬듯이(마 16:6-7), 주님의 영광에 압도된 연로한 사도는 두려움 가운데 예수님의 발 앞에 쓰러졌다. 요한이 몸을 돌렸을 때, 그는 다시 한번 그리스도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계 1:17)는 확증의 말씀과 함께 그를 진정시키는 손길을 경험하였다.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자주 들었다(마 14:27; 17:7; 28:10; 눅 5:10; 요 6:20), 그렇지만 지금 밧모 섬에서 듣는 이 말씀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51.2)
 자신을 “처음이요 나중”(계 1:17)이라고 일컬음으로써 예수님은 요한에게 자신이 구약의 하나님(사 44:6; 48:12)이심을 드러내신다. “나중”이란 말의 그리스어는 에스카토스(eschatos)인데, 이 말에서 “종말론”(eschatology)이라는 단어가 유래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서 종말론의 초점이 말세의 사건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고 또한 그가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심에 있음을 보여 준다. 그는 최후의 사건들에 관하여 가장 권위 있는 말씀을 하시는 분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다(히 13:8). 예수님은 곧 “산자” 이시고,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분이시다(계 1:18), 열쇠는 권세와 권위의 상징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정복하셨다. 그를 따르는 자들이 죽음을 더 이상 두려 워한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사망과 죽은 자들의 처소가 그리스도의 주관 하에 있기 때문이다. 사망 즉 “맨 나중 원수”“멸망 받을”(고전 15:26)날이 다가오고 있다. (51.3)
 교회들을 위한 격려
 예수님은 요한에게 하신 것과 같이 교회들에게도 격려를 보내셨다. 예수님이 밧모 섬에 오신 두 번째 이유는 요한에게 일곱 가지의 특수한 기별들을 주시고 그것을 교회들에게 전달할 사명을 주기 위함이었다. 이 기별들에는 예수님이 각 교회의 영적 상태에 관하여 충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이 나타나 있다. 그는 에베소 교인들이 처음 사랑을 버리고 타락한 상태에 있음을 아셨고, 서머나 교인들이 환란을 당하고 있으며 장래 일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아셨다. 그는 버가모의 그리스도인들이 처해 사는 상황을 아셨고, 두아디라 교회는 분리된 상태임을 아셨다. 사데의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자만에 빠져 있는 것과 빌라델비아 사람들이 영적으로 허약한 것도 아셨다. 그리고 그는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자만하고 눈이 먼 것도 알고 계셨다. (52.1)
 예수님은 교회들의 특수한 사정과 필요를 잘 아셨기 때문에, 그 교회들의 상태와 필요에 대처할 수 있었다.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요한계시록 1장에 그려진 그의 복합적인 모습에서 특징들을 취하여 언급함으로써 각 교회에 자신을 소개하였다. (52.2)
 · 에베소 교회에게 그는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계 2:1; 참고 1:13. 16)로서 오신다.

 · 서머나 교회에게 그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계 2:8; 참고 1:17-18)로서 오신다.

 · 버가모 교회에게 그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이”(계 2:12; 참고 1:16)로 오신다.

 · 두아디라 교회에게 그는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계 2:18; 참고 1:14-15)로서 오신다.

 · 사데 교회에게 그는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계 3:1; 참고 1:4, 16)로서 오신다.

 ·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그는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계 3:7; 참고 1:18)로서 오신다.

 ·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그는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중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계 3:14; 참고 1:5a)로서 오신다. (52.3)
 각 경우를 보면, 예수님은 각 교회의 특수한 사정과 필요에 맞추어 자신의 특성을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거짓 교사들의 그릇된 가르침으로 위협을 받고 있으므로 예수님은 그들의 상태를 그의 손에 붙잡고 그들 가운데 다니시는 분으로 나타나신다(계 2:1). 또 심한 핍박을 당하고 있는 서머나 교회에게 예수님은 그들이 당하고 있는 것과 같은 환란과 고난을 이미 경험하신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은 매우 적절한 일이다(2:8). 그는 또한 그들에게 부활의 약속도 주신다(2:10-11). 이와 같이 예수님은 나머지 교회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자신을 소개하시고 약속도 하신다. (53.1)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은 각 교회에게 각기 특별 한 방법으로 자신을 소개하신다. 하지만 어느 한 교회도 예수님의 충만한 모습을 다 가지지는 못했다. 각 교회는 그분의 모습의 일부만 소개받았다. 하지만 모든 교회들 이 합치면 예수님의 충만한 모습을 가지게 된다. 예수님에 관한 충만한 계시는 신자들로 구성된 큰 몸에서 분리된 개인들이나 분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전체 교회를 통하여 온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 두 교회에게도 그리스도의 동일한 측면이 소개되지도 않았다. 그에 대한 확실한 이유는 각 교회가 그들의 고유한 상황에 처해 있고, 고유한 필요를 가지고 있으며, 예수님은 그 각 교회의 사정에 대응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53.2)
 이와 같은 개념은 사복음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복음서가 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나 상이한 각도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각 복음서는 이 복음서들이 처음 전달된 백성들의 상이하고 특이한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의 독특한 모습을 보여 준다. (5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