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쉬운 요한계시록 제3장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계시
 이 부분은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의 이상들(visions)을 받은 상황과, 그가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를 이상 속에서 만나는 장면을 묘사하는데,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에게 이상 가운데서 보는 것들을 기록하여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전하라고 명하셨다. (43.1)
 성경절 : 요한계시록 1:9-20 (43.2)
 밧모 섬의 요한(1:9)
 요한은 독자들에게 자신이 복음을 충실하게 중거한 까닭으로 밧모(Patmos) 섬에 와 있다는 말로써 그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밧모 섬은 에베소에서 약 50마일(약 8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에게해(Aegean Sea) 내에 바위가 많은 불모의 섬으로, 길이가 10마일(16킬로미터), 가장 넓은 부분의 너비가 6마일(9.6킬로미터) 정도 되는 섬이다. 로마인들이 밧모 섬을 스포라데스 군도(Sporades Islands)의 다른 섬들처럼 정치적 범법자들을 가둬두는 범죄자 수용소로 이용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1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때와 가까운 시대에 살았던 초기 그리스도인 저술가들은 요한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로마 당국이 그를 밧모 섬으로 추방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44.1)
 밧모 섬에 추방되어 있는 동안, 고령의 사도 요한은 많은 어려움을 감수해야 했다. 하나의 예로, 로마의 당국은 요한을 범죄자로 취급하였다. 초기 그리스도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요한은 채석장에서 강제 중노동을 당했다고 한다.2 요한이 당한 고난의 특징은 “항상 손발을 묶어둔 족쇄, 헐벗은 옷, 부족한 식량, 어두운 감방 맨 바닥에서의 수면, 군대 감독관의 채찍을 맞으면서 당한 중노동”3등이었다. (44.2)
 요한의 밧모 섬에서의 경험은 계시록에 사용된 언어와 영상에서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예를 들면, 복음의 충성된 증인이었기 때문에 요한이 겪은 환란은 역사를 통해 적대적인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충성된 백성들이 받을 환란의 전조가 되었으며,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지막 날에 당할 큰 환란의 예조가 되었다(참고 계 7:14). 또한 요한이 종말적 대단원(大團圓)에 산들과 섬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을 때(계 6:14; 16:20), 그는 필경 산으로 된 밧모 섬과 함께 그 주위에 있는 섬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44.3)
 특히 현저한 것은 바다와 물에 대한 영상이 빈번하게 사용된 것이다(계시록에 26번이나 나온다). 요한이 사용한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계 1:15; 참고 14:2; 19:6)라는 표현은 밧모 섬 주위에서 끊임없이 들리는 노랫가락과도 같은 파도 소리를 생각나게 하 며, 사도가 이상 가운데서 본 하나님의 보좌 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에게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계 4:6)처럼 나타났고, 밧모 섬의 바다의 일출과 일몰 광경은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같다”(계 15:2)는 은유의 기원이 되었다. (45.1)
 이 책에서 바다의 은유적 의미는 마침내 긍정적인 것에서 부정적인 것으로 옮아간다. 요한은 밧모 섬에 갇혀 있었으므로, 바다는 요한에게 격리와 고통을 의미하게 되었다. 밧모 섬 주위에서 일어나는 풍랑은 이 세상의 소란한 사회적 및 정치적 상황의 상징이 되었다. 바다는 사탄과 마귀들의 거처인 무저갱(無底坑, 바닥없는 구덩이)과도 분명히 관련이 있다(참고 계 13:1; 17:8). 이상 속에서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기 위해 짐승이 은유적인 바다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계 13:1). 큰 음녀 바벨론이 많은 물들 위에 앉아 있는 것이 그에게 보였다(계 17:1; 참고 15절). 그리고 또한 비유적 바벨론의 상인들이 바벨론의 부패한 교리와 정책들을 판매하여, 부와 사치를 얻는 것도 이 상징적 바다로부터였다(계 18:17-24). (45.2)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면, 요한이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마지막 이상에서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고 말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성경절은 그냥 아무 바다나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밧모 섬을 둘러싼 바로 바다(the sea)를 가리켰으며, 이리하여 이 연로한 사도의 가슴은 바다가 다시는 있지 아니할 때를 그리워하는 깊은 동경으로 충만했다. 새 땅에 “바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세에서 “밧모 섬”이라는 고난과 고통이 가져다주는 모든 악이 새 땅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45.3)
 하지만 계시자 요한이 밧모 섬에서 느낀 진정한 고통은 그의 육체적 고난보다도 더 컸다. 그에게 엄습한 염려는 지도자를 잃은 아시아 도에 있는 교회들(참고 계 1:11)의 상황에 관한 것이었다. 이 추방된 사도는 그 교회들에게 닥칠 잠재적 위협에 관하여 알고 있었다. 계속 증가하는 아시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로마제국의 적대적 압박 때문에 이 교회들은 서서히 불안정한 상태로 변하고 있었다. 또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이 교회들은 위급한 난국에 처해 있었고, 대부분의 교회들은 분열된 상태에 있었으며, 어떤 교회에서는 대부분의 교인들이 거짓 교리를 전하고 있었다. 또한 요한의 권위가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46.1)
 아시아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 이 같은 위급한 사정과 고뇌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진실로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는지, 또는 자기들의 교회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하여 의심하기도 하였다. 이 교회들은 시급한 지도와 격려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연로한 사도는 그들에게 갈 수가 없었다. 때때로 그들의 영적 안녕에 대한 그의 우려가 그를 사로잡았다. 요한 자신도 심한 곤경에 처해 있었고, 따라서 그 자신도 보증과 격려의 말씀이 필요했다. (46.2)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끝없이 휘몰아치는 “바다”로 둘러싸인 “밧모 섬”에 갇혀 있을 때마다—그 바다가 그들에게 무엇을 뜻하든지 간에—그들이 결코 혼자 내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밧모 섬”의 경험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보게되는 결과를 낳는다. 성경에 다니엘서가 있는 것은 다니엘이 바벨론 포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오늘날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갖기 위해서는 요한이 밧모 섬으로 가야만 했다. 그 불모의 섬에 있던 요한을 이상 중에 찾아오신 예수님은, 오늘도 그의 백성을 붙들어주시고 받들어주시기 위해 그들과 함께하시는 동일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과 항상, 즉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실 것이다(마 28:20). (46.3)
 요한이 그리스도를 대면함(1:10~20)
 주의 날에(1:10a)
 요한이 밧모 섬에 오고 나서 실제로 얼마 후에 예수께서 이상(vision) 중에 요한에게 나타나셨는지는 알 수가 없다. 요한이 간단히 말하는 것은 그가 고통 중에 있을 때에 “주의 날에”(계 1:10) 이상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의 날”은 그에게 특별한 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그 날이 어느 날이었는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제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날이 어느 날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47.1)
 성경에는 두 날이 “주의 날”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 첫 번째 “주의 날”은 제7일 안식일이다. 안식일은 “나의[하나님의] 안식일”(출 31:13; 겔 20:12, 20) 그리고 “여호와의 성일”(사 58:13)이라 일컬어졌다. 예수님은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마 12:8; 막 2:28)이라고 부르셨다. 이것은 “주의 날”인 제7일 안식일에 요한이 이상을 받았을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47.2)
 성경에서 “주의 날”로 일컬어진 다른 날은 종말론적 “주의 날”“여호와의 날”인 데, 이것은 구약(사 13:6-13; 욜 2:11, 13; 암 5:18-20, 습 1:14; 말 4:5)과 신약(살전 5:2; 벧후 3:10)에 모두 언급되어 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를 종결하시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실 때이다. 신약에서 주의 날은 전적으로 예수의 재림을 가리킨다. (47.3)
 성경에서 안식일은 종말론적 의미를 가졌고(사 58:13-14; 66:23), 구원의 표징이라는(신 5:15; 겔 20:10-12) 사실은 특별히 의미심장하다. 이리하여 요한이 두 개의 성경적 개념을 하나로 묶기 위해 “주의 날”이라는 말을 도입했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다시 말해서, 그가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 때에 일어날 사건들을 증거하기 위하여 종말론적 주의 날에 이상을 보게 되었다고 독자들에게 말하고(참고 계 1:7), 또한 그들에게 이 이상이 실제로 제7일 안식일에 주어졌다고 말하려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최후의 사건들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것이며, 여기서 안식일은 마지막 때의 드라마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아래의 주석에서 밝혀줄 것이다. (47.4)
 제사장이신 그리스도(1:10~12)
 이상 중에 있는 동안 요한은 자기 뒤에서 그에게 말하는 큰 음성을 들었다(계 1:10). 그 음성은 나팔소리 같았다. 성경에서 나팔소리 같은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의미한다. 그 소리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선포한 음성이며(출 19:16), 이 소리는 또한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발표할 때 들려올 음성이다(마 24:31; 고전 15:52; 살전 4:16). 그 음성이 지금 요한에게 그가 본 것들을 두루마리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명하신다(1:11). (4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