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그림자 제1편 성소 제 1 장 어둠 속의 빛
 폭풍에 흔들리는 생애의 바다 위에서 항해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은 하나의 나침반을 주셨는데, 바르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그 항해자를 영원한 안식의 포구로 안전하게 인도해줄 것이다. 그 나침반은 우리의 최초의 조상들이 그들 자신의 생애만이 아니라 이 아름다운 세계 속에 죄가 들어오도록 허용된 이후에, 에덴의 문어귀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 나침반은 주님께서 사탄에게 선고하셨던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창 3:15).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죄에 대한 적개심을 심어주셨는데, 주의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의와 영생의 길로 인도해줄 것이다. 그의 지위나 신분이 어떠하든지 간에 자신의 마음속에 놓인 하나님의 나침반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자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해 주시는 빛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을 것이다(요 1:9). (22.1)
 우리의 최초의 조상들이 금단의 과실을 따먹은 결과로 온 땅위에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하나님의 선고의 어두운 그림자가 덮이게 되었다. 사망과 부패의 흔적들은 떨어지는 나뭇잎과 시들어 가는 꽃잎에서 즉시 보이게 되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그 선고를 피할 길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다음과 같은 선고, 즉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고 선포하셨을 때, 한 줄기의 빛이 어둠 속을 뚫고 비치게 되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심어주신 죄에 대한 적개심을 간직하는 자들에겐 사망으로부터 피할 길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들은 살 것이며, 사탄은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죽음을 당하기 전에 그는 그 여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었다. 사탄의 멸망은 확실하게 되고, 인간의 사망은 영원히 피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일은 필수적이었다. (22.2)
 인간이 시험을 당하기 전에 인간에 대한 성부와 성자의 사랑은 너무나 컸으므로, 만일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굴복당할 때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바치기로 서약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 13:8)이 되셨다. 이 놀라운 진리는 주님께서 사탄에게 선고하신 말씀, 즉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최초의 조상들에게 알려졌던 것이다. (23.1)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취하게 한 그 죄의 흉악성을 인간으로 하여금 깨달아 알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흠 없는 어린양을 끌고 와서 그 머리 위에 자신의 죄를 고백한 다음, 자신의 손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의 표상인 그 어린양의 생명을 취하도록 요구되었다. 이 속죄제물은 불태워졌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모든 죄는 최종적으로 마지막 날의 불로 소멸될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말 4:1~3). (23.2)
 죄악의 어두움으로 둘러싸인 인간이 이 놀라운 하늘의 진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늘 성소로부터 단순한 희생제물 위에 비춰진 빛의 광선은 의심과 죄로 말미암아 너무나 가리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의 크신 사랑과 자비로 하늘의 모형을 따라 지상 성소를 건축하게 하시고, 제사장들을 임명하여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로 봉사하게 하셨다(히 8:5). 이것은 하늘에 한 성소가 있는데, 그곳에서 행하는 봉사는 곧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간으로 하여금 깨달아 알도록 하기 위하여 행해진 것이다. (24.1)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 위대한 진리를 깨닫고 나서, “영화로우신 보좌여, 원시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렘 17:12)라고 감탄하였다. 다윗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에 대하여 알고 있었으며, 후세대를 위하여 기록하면서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셨으니”(시 102:19)라고 말하였다. 신실한 자들이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았을 때,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상달하였”음(대하 30:27)을 그들은 항상 이해하고 있었다. (24.2)
 지상 성소에서의 모든 예배는 하늘 성소에 관한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었다. 지상 성소가 세워져 있는 동안 하늘 성소에 이르는 길은 명백하게 보이지 않았으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들어가셔서 인류를 위하여 그분 자신의 보혈을 제시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늘 성소에 관한 더 많은 빛을 보여주셨다. (24.3)
 그 영광스러운 하늘 성전에 대한 광경은 사랑받은 제자 요한에게 여러 번 계시되었다. 그는 금단(金壇)을 바라보았는데, 그 위로 지상에 있는 성도들의 기도가 향기와 함께 섞여서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것을 보았다. 이상 가운데서 그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타오르는 일곱 등잔을 가진 등대도 보았다. 또한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이 들려 있었는데, 그는 기록하기를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였다(계 11:19)고 했다. (25.1)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피를 가지고 아버지 앞에 탄원하시는 것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닌” 참 장막(히 8:2) 안에서 행하시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데, 그곳은 무수한 천군 천사들에 의해서 호위되어 있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다가(시 103:19~20), 그 보좌로부터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도를 응답해주기 위해 보내심을 받는다(단 9:21~23). (25.2)
 하늘 성소는 여호와의 위대한 능력의 저장소이므로, 믿음으로 이곳과 연결된 모든 사람은 사탄의 온갖 시험을 물리치는 데 필요한 모든 도움을 이곳으로부터 제공받는다. (25.3)
 무거운 짐을 실은 전차가 그 가느다란 연결선으로써 위에 설치된 전선과 접속됨으로 수 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발전소로부터 전력을 공급받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에 대한 하나의 적절한 예증이 된다. 그 접속이 계속 유지되는 한, 그 전차는 캄캄한 밤중에라도 앞에 놓인 진로를 환하게 조명해줄 뿐만 아니라 원근에 둘러싸인 어둠 속에 환한 빛줄기를 비춰주면서 언덕길을 한결같이 오르내리며 순조롭게 달려간다. 그러나 접속이 끊어지는 순간, 일어나는 변화는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그 전차는 어둠 속에 그냥 멈춘 채 더 이상 앞으로 움직일 수가 없게 된다. (25.4)
 하늘 성소에 계신 우리의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채 위에서 아래로 손을 내뻗치셔서, 믿음으로 손을 들어 그 허락된 도움의 손길을 붙잡고자 원하는 모든 이들의 손목을 붙드시는 것도 이와 같다. 믿음으로 그 도움을 붙잡는 사람은 가장 험준한 곤경의 언덕이라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으며, 그의 영혼은 다른 사람들에게 빛과 축복을 나누어주면서 빛으로 충만하게 된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굳게 붙잡는 ‘한’ 그는 하늘 성소로부터 빛과 능력을 얻게 되지만, 만일 그가 그 연결을 단절하는 의심과 불신을 용납한다면, 그는 어둠 속에 놓이게 되고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진로에 장애물이 되고 말 것이다. (26.1)
 하늘과의 연결을 깨뜨리는 그 어떤 것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가장 높으신 분의 지상 처소가 되는 것이다. 이는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사 57:15), 죄에서 떠나 죄를 멀리하는 자는 성령의 전이 되는 것이다(고전 6:19~20).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의 마음에 거하시기를 원하시지만(엡 3:17~20), 마음속에 간직된 죄로 말미암아 그분의 영은 그곳에 거하실 수가 없다(요일 3:15). 그리스도께서 그들 속에 들어와 함께 거하시기 위하여 그는 각자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면서 죄를 의와 바꾸도록 모든 사람에게 호소하고 계신다(계 3:20). (26.2)
 성경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는 성전들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가 있는데, 즉 가장 높으신 분의 처소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하늘의 성전, 하나님의 성령께서 다스리시며 통치하시는 인간 육체의 성전, 그리고 표상적인 봉사를 수행하던 지상 성전 등이다. 이 지상 성전은 하늘에 있는 큰 보고(寶庫)로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방법을 인류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그들과 함께 거하시므로 그들을 영화롭게 하실 수가 있었다. (27.1)
 표상과 상징들을 지니고 있는 지상 성전은 다른 방법으로는 관찰할 수 없는 천체(天體)들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망원경의 고성능 렌즈들과도 같다. 이 놀라운 렌즈들이 무식한 자에게는 평범한 유리알에 불과하겠지만, 천체의 불가사의를 알고자 열망하는 천문학자가 그것들을 통해 바라볼 때는 황홀함으로 가득 차게 된다. (27.2)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말라버리고 생명 없는 예배의 유물들의 집합체로서가 아니라 대예술가의 손에 의해서 놀라운 구속의 경륜의 각기 다른 부분들이 묘사된 하나의 놀라운 예술품 진열장으로서의 지상 성소의 표상적인 봉사를 연구하는 그리스도인은 거기에 계시된 그 아름다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말하자면 그 화폭에 나타난 표상들은 그분에 대하여 적절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그 표상들은 구주의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에 그것들을 바라볼 때에 바로 그 영혼은 황홀함으로 넘쳐흐르게 된다. 그는 눈처럼 흰 예복을 입은 제사장이 붉은 수송아지를 거칠고 험한 골짜기로 끌고 가서 그곳에서 죄를 위한 제물로 바치는 그 생생한 모습을 보게 된다. 또한 그는 그 제사장이 그 계곡의 거친 돌 위에 그 송아지의 피를 뿌리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가장 보잘것없는 자, 참으로 버림받은 자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그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함이었다. 그 누가 그처럼 자비로우신 구주에 대한 사랑을 마음에 간직함이 없이 그 장면을 바라볼 수가 있겠는가? (27.3)
 다시금 그는 죄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는 한 가난한 죄인에 대한 장면을 보게 되는데, 그의 부유한 동료들이 속죄제를 위하여 그들의 어린양을 끌고 가며 또 가난한 자들조차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가지고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가난한 죄인은 바칠 만한 아무런 산 제물이 없으므로 그만 좌절감에 빠져버리고 만다. 그런데 “한 움큼의 가루만 드려도 응답될 것이니라”는 음성이 들려왔을 때, 그의 얼굴에서는 희망의 빛이 감돌게 된다. 또한 그 죄인은 자신을 위하여 찢긴 그 거룩한 몸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 제사장이 빻은 밀을 바치는 것을 목격하면서 “너희 죄가 용서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들을 때, 마치 자기를 도와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베데스다 연못가의 그 불쌍한 사람에게 복되신 주님께서 그의 침상을 가지고 걸으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의 마음이 기쁨으로 넘쳐흘렀던 것처럼(요 5:2~9), 이제 그 죄인의 마음은 기뻐 뛰게 된다. (28.1)
 그리스도와 그의 무한하신 사랑에 대하여 더욱 알기를 갈망하는 자가 그 영광스러운 실체(Antitype)와 각각 연결해서 지상 성소의 표상들(types)과 상징들(symbols)을 연구한다면, 그의 영혼은 황홀함으로 도취되고 말 것이다. 그것들은 마치 망원경의 렌즈처럼 복되신 우리 구주의 성품의 기이하신 아름다움, 즉 그 어떤 다른 방법으로는 도무지 나타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여줄 것이다. (28.2)
 지상 성소의 각양한 표상들과 상징들의 하나하나가 가르쳐 주는 독특하고도 뚜렷한 하늘의 교훈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을 다 함께 관찰할 때, 그것들은 하늘의 미술가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묘사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품에 대한 놀라운 모자이크를 형성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28.3)
 여러 다른 성경 기자들이 붙인 하늘 성소에 대한 명칭들 (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