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성소 (재림교회 신학의 심장) 제 2 장 구약 성소의 기구와 활동:그것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내가 이 책을 여기까지 썼을 때, 고대 성막의 봉사와 의식(儀式)들 중 몇 가지 면의 의미에 대해 무언가 좀 더 말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이 설명들은 앞장 내용의 흐름과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독자가 원하면 다음 장으로 그냥 넘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해도 내가 지금 세우고 있는 논증의 중요한 고리들이 손상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고대의 예식과 관련된 몇 가지 활동과 기구의 신학적 의미를 위해 여기서 몇 쪽을 할애해야겠다고 강하게 느낀다. 나는 몇몇 선별된 본보기에서 끌어낸 의미들이 성경의 자료에서 나온 합리적인 추론(extrapolations)1)으로 쾌히 여겨 지기를 바란다. (39.1)
 내가 앞장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 구약은 고대의 성소 제도와 관련 된 사실상 모든 면의 의미에 대해 거의 완전히 침묵한다. 예컨대, 구약은 동물 희생제물의 피가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야의 피를 가리킨다고 한번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제사 제도에서 가장 기본적인 이 요소에 대한 분명한 해석을 알려면 신약에 의존해야만 한다. (39.2)
 하지만 신약의 계시가 있는데도, 수많은 세부 사항들이 신비에 싸여 있어서 나올 때마다 우리의 타고난 호기심에 도전장을 낸다. (40.1)
 몇 안 되는 암시마저 없었더라면 완전한 침묵으로 남았을 것인데 그것들로 인해 침묵이 깨지며, 따라서 나는 그 영역들을 상세히 설명하려 한다. 그렇게 하면서 이따금씩 엘렌 G. 화잇의 저술들에 나타난 번득이는 몇몇 통찰에 의존할 것이다. (40.2)
 내 의도가 모든 자료를 총망라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초점을 맞출 대표적인 성소 관련 자료를 들어 설명하려는 것임이 곧 밝혀질 것인데, 우리의 해석은 도움을 주면서 시험적인 성격을 띠어야 한다. 주어지는 항목의 다수는 교리화하기에 상당히 모호한 면이 있음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40.3)
 성소 봉사와 의식(儀式)들
 나는 신학대학원의 교수로 가르치는 동안 성막 봉사와 의식들이라는 주제에 관해 강의할 때마다, 성소 및 그 봉사와 관련된 세부적인 사항에 대한 질문에 대처해야 했다. 어떤 학생들은 모든 기구, 치수, 색깔, 의식 등에 늘 매력을 느꼈다. 형편에 따라 그런 세부적인 면을 다룰 기회가 있지만, 특별히 고대 의식의 세세한 사항 모두에서 숨은 의미들을 찾으려는 갈증에 빠져 있는 이들을 기다리는 사변적인 함정을 목격할 여러 경우에 나는 자연스레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설명해 나가는 데로 기울고 있음을 알게 된다. (40.4)
 나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예컨대 매일의 봉사2)에 나타나는 의식에서 주요 국면들만의 의미에 주목하려고 한다. (41.1)
 매일의 봉사는 세 가지 주요 요소로 이뤄져 있다. 조석 번제, 성소에 위치한 금향단에 분향하는 것, 개인의 죄들을 위한 특별한 제사(참조 출 29:38~42; 민 25:3~8; 출 30:6~8, 34~38; 레 4장). (41.2)
 매일 조석으로 1년된 어린양 한 마리를 뜰에 있는 제단 위에서 불 살랐다. 이 기구를 번제의 단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적절하다. 이 의식(儀式)에 관한 설명을 구약에서는 찾을 수 없다. 이사야서에 나타나는 진술들(예컨대,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같이”[53:7])도 사실상 명백하지 않다. 우리는 신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 요한이 요단강에서 예수의 거룩한 거동을 바라보면서 영감에 찬 경이로써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라고 외쳤다. 따라서 이 하나의 진술이 우리를 위해 그 의미를 한데 집약한다. (41.3)
 그래서 엘렌 G. 화잇이, 매일 어린양을 번제로 드린 것은 “여호와께 속한 나라의 매일의 헌신이자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에 대한 끊임없는 의존”3)을 상징한다고 쓸 수 있었다. 이 해석에는 신뢰성이 베어있다. 그것은 멋대로 조작되거나 어떤 이의 풍부한 상상력에서 나온 해석이 아니다. 또한 개인의 죄를 위한 제사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분명히 비슷한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41.4)
 그녀는 또한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한 국면인 분향의 의미에 관해 설명한다. “이스라엘의 기도와 함께 올라가는 향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간구, 그리고 믿음을 통해 그분의 백성에게 입혀지며 죄된 존재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가납될 수 있도록 해 주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나타낸다.”4) (41.5)
 이것은 왜 성소 봉사에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한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서도 향 제조 방식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강력하게 금했는지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네가 만들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출 30:37, 38). 여기서 말하려는 요지는 그러한 방식을 일반적인 경우에는 결코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오늘날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의 의를 감히 복제(複製)하거나 혹은 하나님께 접근하기 위해 자신의 방법을 조작하려는 시도를 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42.1)
 진설병에 대해서도 구약은 또다시 침묵하지만, 신약은 몇 가지 의미있는 암시를 제공한다. 이것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구절이 요한복음 6장에 나온다. 얼마 전에 떡을 먹은 무리가 물질적인 동기에 이끌려 예수를 찾음으로써 성경에 나타난 떡의 상징에 관한 가장 긴 설교가 나오게 되었다. (42.2)
 그분을 좇는 백성들의 동기가 육신적인 것임을 숨김없이 드러낸 후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35절)라고 말씀하셨다. (42.3)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거듭거듭 오해했다. 그러나 그분은 거듭거듭 그 비유를 소상히 설명하셨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48~51절). (42.4)
 유대인들은 예수의 살을 먹는다는 개념에 대해 당혹스러워했다. 그들은 확실히 음식을 구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메뉴는 전혀 받아들이려고 하질 않았다. 우리의 주님 편에서 그들의 당혹감을 줄이려고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정말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면 오히려 그분이 혼란을 더 가중시키는 셈이 되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3~55절). (43.1)
 이렇게 그분은 중단 없이 이야기를 진행하여 결정적인 부분에 이르렀다.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58절). (43.2)
 후에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엄숙한 정적이 흐르는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그분은 동일한 상징을 최고조로 부각시켰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마 26:26). (43.3)
 사실, 방금 요한복음과 마태복음에서 인용한 구절 가운데 어떤 것도 성소의 진설병을 상기시키지 않는다. 예수께서 여기서 사용하는 것은 진설병 표상이 아니라 만나 표상이다. 그러나 나는 이 둘이 전혀 관련이 없진 않다는 이해를 갖고 있다. 엘렌 G. 화잇은 진설병을, “육신적 양식 및 영적 양식 모두를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것과 오직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만 그것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표”5)로 해석 했다. 그런 후에 그녀는 위에서 언급한 요한의 유명한 구절에 관해 해설하면서, “만나와 진설병은 둘 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항상 계시는 산 떡 곧 그리스도를 가리킨다”6)고 말했다. (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