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를 통한 속량과 재회 제 5 장 속죄일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찌니라.”(히 9:22,23) (34.1)
 여기에 기록된 말씀은 그림자 같은 모형의 지상성소와 하늘의 실제 성소의 정결에 관하여 나타내고 있다. 지상 성막이 짐승의 피로서 정결케 되는데 반하여 하늘의 성전은 더 나은 희생 제물로서 정결되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서 정결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그것은 “필요한” 또는 필수적이라고 말한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즉 그것은 이루어 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전 성소의식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34.2)
 하지만 어떻게 하늘에 있는 것이 정결을 필요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모세의 성막의 유형들을 연구하므로 어떤 해답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지난 장에서 예수는 우려를 위하여 죽으신 어린양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살아 계시는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공부하였다.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 그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주었기 때문에,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 9:12) (34.3)
 표상적으로 제사장은 대속물의 피를 제단 뿔에 뿌렸다. 이와 같이 하여 회개자는 제사장이 상징적으로 그의 죄를 성소에 옮기므로 용서를 얻게 되었다. 그러한 뿌려진 피는 용서와 가리움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덮을 뿐만 아니라 죄를 도말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분은 죄를 다루시는 사역 가운데서 가장 절정인 속죄일에 그 일을 하시는 것이다.(레위기 16장 참고) (34.4)
 속죄일의 아침에 두마리의 염소를 취하여 회막 문 앞에 두고 제사장은 제비를 뽑는다. 하나는 여호와를 위하여 또 하나는 아사셀(사단)을 위하여 하게 된다. 예비의식이 끝난 후에 대제사장은 여호와를 위한 염소를 잡아서 그 피를 지성소로 가져 갔다. 향을 태워서 향연이 가득찬 후에 대제사장은 속죄소(시은소)에 다가가서 이스라엘이 범죄했던 율법위에 피를 직접 뿌렸다. 이와 같이 마지막 속죄는 회막과 성소에서 매일 매일 성소에 가져 왔던 죄를 위하여 수행하게 되었다. (35.1)
 속죄소에 피를 뿌린 후에 대제사장은 황금제단 뿔과 통제단 네 모퉁이 뿔에 손가락으로 피를 찍어 발랐다. 이렇게 하여 성소 전체를 완전히 정결케 했다. 화목의 목적을 달성한 후에 대제사장은 산 염소의 머리 위에 두손으로 안수하고 이스라엘의 죄들을 고했다.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염소의 머리에 두 어”(레 16:21) 미리 정한 사람에게 이 염소를 맡겨 광야로 끌고 가게 했다. 그리고 속죄일이 끝날때 하나님은 정결한 성소와 정결한 백성을 갖게 되었다. (35.2)
 하늘 성소 봉사에서 그리스도는 하늘성전에 우리를 위하여 나타나신다. 처음엔 성소에 마지막으로 지성소에서 봉사하신다. 고대 성막에서는 제사장들이 매년마다 반복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단번(單番)에 드리심”(히 10:10)이다. 그분이 십자가에 단번(Once for A11)에 죽으셨다. 이와같이 그리스도는 지성소에서 그분의 제사장의 일을 단번(單番)에 수행하신다. 그분은 단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셨다. 그곳에서 그분의 목적이 성취될때 까지 머물러 있을 것이다. 즉 “죄를 없게 하시려고” “죄를 제거 하시려고” “죄를 도말 하시려”는 것이 그 분의 목적이다.(히 9:26의 KJV, Weymouth, NEB 역) (35.3)
 이런 질문이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즉, 성소에 피를 뿌림과 지성소에 피를 뿌리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성소에 피를 뿌리는 것은 죄를 가리는(Covering) 것을 의미하고, 지성소에 피를 뿌리는 것은 죄를 도말하는 것을 의미한다.(B1otting Out) 그렇다면 가리움(Covering)과 도말함(Blotting Out)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가리움은 예비적, 용서를 의미한다. 궁극적 용서는 속죄일 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36.1)
 왜 하나님은 죄인들이 그들의 죄를 고백 할때 즉시 죄들을 도말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력을 주셨다. 그분 우리가 이 선택의 행사를 존중하신다. 만일 우리가 성소에 우리의 죄를 남기기를 선택한다면 예수는 심판의 마치는 사업에서 그것들을 도말하실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만일 우리가 죄악의 생활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하면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우리를 막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포기했던 죄라도 만일 우리가 다시 선택한다면 다시 가질 수 있다. (36.2)
 나의 부친은 그분이 아홉살이었을때 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부친께서 결혼하신 후에 그분은 그분의 마음을 구세주께 맡겼고, 담배 피우는 일도 포기했다. 그러나 부친께서는 혹독한 시험을 당하였다. 즉 자꾸만 결심을 포기했던 것이다. 아침 식사를 마친후에 그분의 주머니에서 담배곽을 꺼내어 그분이 할 수있는 대로 멀리 옥수수 밭으로 그것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고 어머님은 지금도 말씀하신다. 그러나 어떤 때 저녁식사 후에 아버님이 옥수수 밭을 헤쳐가며 무엇인가 찾고 있는 것을 보셨다고 어머님은 말씀하신다. 만일 그대가 하나님의 위치에 있다면 그대는 제 아버님이 그것을 찾도록 허락하시겠는가? (36.3)
 당신은 죄를 덮는 것과 도말하는 것 사이에 차이점을 이해 하기 시작하는가? 나의 부친은 그분이 아침에 담배를 던졌을 때에는 진심이었다. 그러나 몇시간이 지난후 그분은 미친듯이 그것을 찾기 위하여 노력했다. 결국 제 부친은 담배를 끊게 되었고 거의 60년 동안 그분의 입에 부정한 물질을 대지 않으시고, 살았다. 얼마전에 나는 그분을 안장했는데 그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드셨다. 하나님께서 제 부친의 이름을 호명하실때 담배 피운 모든 죄를 예수님께서 도말하실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 부친은 다시는 담배를 요청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그분은 용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분은 또한 승리자가 되었다. (36.4)
 그리스도께서는 담배 말고 다른 것들에도 사람들에게 승리를 주실 수 있으신가? 그분은 우리의 악한 기질, 정욕, 탐심, 부절제한 식욕으로부터 건지실 수 있는가?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리스도의 성소에서의 봉사는 그것을 이룩할 것이다. “지상성소의 사역에서 표상적으로 했던 것은 하늘성소의 사역에서 실제로 하게 될 것이다.”(대쟁투 420) 실제적 속죄일이 마치는 때에 예수님은 하늘에 있는 성소를 정결케 하고 지상의 백성들을 깨끗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성소 봉사를 마치시고, 기쁨으로 그분을 환영하며 기다리는 백성들을 데리려 오실 것이다.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여기에서 다시 주의 해야 할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감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었다는 것이다. (37.1)
 전번 장에서 우리는 죄를 짊어진 어린 양으로서의 그리스도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성소에서 죄를 담당하신 제사장으로서의 그를 바라 보았다. 그분은 마지막으로, 죄를 도말할때 까지 이 짐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그분이 두번째 오실 때 더 이상 죄를 담당하시지 않으신다. 그는 죄없이 두번째 나타나실 것이다. 그분의 희생은 그 목적을 성취했다. 제사장으로서의 그분의 사역은 끝났다. 그분은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었다(히 9:26). (37.2)
 몇가지 실제적인 적용을 생각해 보자. 성소봉사는 영원히 계 속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끝이 올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은혜의 시기의 끝이라고 부른다. 성소에서의 죄의 용서를 얻고 도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들을 성소 안으로 가져 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도말할 수 있기 전에 그분은 먼저 그들을 용서하고 덮어야 한다. 첫번째 일은 죄를 성소 안으로 가져가는 것이요 둘째 일은 그것을 밖으로 내 오는 일이다. (38.1)
 이런 예를 들어 보자. (38.2)
 당신의 마을에 오직 한 세탁소만 있다고 하자. 매일 매일 그 일은 계속 된다. 옷을 받아서 세탁하여 그 옷을 꺼내고, 하는일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감히 이렇게 말한다. 성소는 하나님의 세탁소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한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홈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5-27) (38.3)
 자! 다시 상상하기를, 당신이 세탁물을 한아름 안고 마을 세탁소에 가 보니 큰 표지에 글이 적혀 있는 것을 본다 “이 세탁소는 12월 31일 폐업합니다.” 사람들은 그 표지의 글을 읽고는 이구동성으로 놀라며 말하기를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 우리는 항상 세탁물이 생기는데, 우리는 세탁하는 일을 모르는데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이 마을엔 다른 세탁소가 없는데.” (38.4)
 그런데 다른 팻말이 있다고 상상해 보자. 즉 “당신이 세탁소가 없어도 괜찮도록 하기 위하여 세탁하는 법을 가르칠 세탁 강습이 매일 개최되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곳에 참석 하시겠습니까? 만일 당신이 그 푯말을 믿는다면 당신이 더러운 옷을 가지고 있던지 또는 없던지 불구하고 그 강습회에 참석할 것이다. (38.5)
 그러나 슬프게도 어떤 사람들은 결코 씻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 관하여 하나님은 곧 선언할 것이다. 즉 “불의를 하는 자는—그대로 불의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라고 선언 할 것이다. 그렇다 세탁소는 닫히려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세탁강 습회가 하늘성소에서 진행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청결해 지는 법과 청결을 보전하는 법을 가르치고자 원하신다. 그것은 될 수 있고 또한 될 것이다. 우리의 복스런 주님께서 사람들이 보내는 죄를 취급하기 위하여 그곳에 영원히 서 계셔야만 한다는 생각을 나는 증오한다. 성소가 정결케 된다면 오염된 강물에 끝은 와야만 한다. (39.1)
 옛날 이스라엘의 성소의 식에서 대제사장 아론이 마지막. 속죄를 위하여 지성소에서 봉사하고 있었을 때엔 모든 백성이 성소 주위에 모여서 그들의 마음을 살피고 기도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것 처럼 오늘날 우리도 그렇게 하도록 부르심을 입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 그분의 마지막 중보사업을 수행하시는 동안 우리들은 죄의 종말을 이루시기를 열망하시는 그분 함께 마음과 마음을 묶어서 그분께 보내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믿음으로 성소에 가서 우리를 위하여 시은소에서 그분의 상처 난 손을 드신 모습을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응답은 그분의 마음을 기쁘시게 할것이다. (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