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요한복음 서문 서론-요한복음
 요한은 야곱의 우물(4:4-6)과 솔로몬의 행각(10:23)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그는 다락방에서 한 베드로의 몸짓(13:24)과 가나의 혼인 잔치(2:6)에서의 물 항아리의 수와 크기, 그리고 무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예수께서 많은 군중을 먹이신 떡은 보리로 만든 것이며(6:9), 십자가 옆의 로마 군인들이 예수의 옷을 가지고 제비를 뽑은 것(19:23, 24)도 알고 있었다. 그는 마리아의 옥합의 향(12:3)과 베데스다 연못의 모습(5:2—요한이 자신의 복음을 기록하기 25여 년 전에 파괴되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예루살렘과 그 주변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이 점에 관하여는 Barclay, 1:6을 보라).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직접 목격한 사람이 기록한 매혹적인 세부 사항들로 가득 차 있다. (22.4)
 6.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는 예수의 사역이 주로 갈릴리에 집중되어 있어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이 한 번만 나타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예루살렘을 여러 번 방문하여 그의 사역의 비중을 갈릴리보다 예루살렘에 더 크게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루살렘을 방문한 일들이 다른 세 복음서에 분명하게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예수께서 하신 두어 마디 진술 속에 암시되어 있다(마 23:37; 눅 13:34). (22.5)
 저자와 연대
 이 복음서의 저자가 의도적으로 익명(匿名)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성령을 참 저자로 간주했기 때문일 것이다(요 16:13“요한”이란 제목은 후에 첨가된 것이다). 그러나 이 복음서를 저술한(21:24)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13:23, 24; 19:26, 35; 20:2; 21:2, 7, 20)라는 신비한 명칭이 반복해서 언급되어 있다. 초기 교회의 전승은 이 사랑받던 제자를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 전승은, 그 익명의 제자가 이 복음서(1:35-42; 13:23-25; 20:1-9; 21:7, 15-23)와 신약의 다른 곳(막 5:37; 9:2; 14:33; 눅 22:8; 행 3:1, 11; 4:13; 갈 2:9)에서 자주 베드로와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하여 지지를 받고 있다. (23.1)
 이 복음서의 기록 시기는 제1세기말인 것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 요한복음은 신약 중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책일 것이다(A.D. 95—100). 사랑받던 제자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이 이 책을 저술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21:20-24). (23.2)
 요한복음의 구조
 이 복음서는 서언(Prologue, 1:1-18)으로 시작하여 결언(Epilogue, 21장)으로 끝난다. 요한복음 1:19에서 12:50까지는 예수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에, 13:1에서 20:31까지는 그의 죽음, 장사, 부활, 그리고 이를 둘러싼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3.3)
 이 복음서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예수께서 봉사를 행하신 여러 날들[日程]을 살펴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1:19-28에 기록된 사건들은 같은 날에 일어난 듯이 보인다. 새 날로 바뀌는 것은 “이튿날”(1:29, 35, 43), “사흘 되던 날”(2:1), 그리고 “이틀이 지나매”(4:43)와 같은 구절로 표시되고 있다. 이 복음서에 나타난 이 “날들”을 계산해 보면, 예수의 침례로부터 그의 승천에 이르는 1,000일 이상의 봉사 중에서 단지 29개의 정선된 사건들만이 이 복음서에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24.1)
 그러므로 예수의 이야기의 일부분만이 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저자 자신도 인정한 것처럼(21:25), 빠짐없이 다 서술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저자로 하여금 그 많은 자료들 중에서 이와 같이 일부만 엄선하게 하였는가? 저자가 이 책을 기록한 목적, 그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24.2)
 이 복음서의 목적
 제4 복음의 목적은 요한복음 20:30, 31에 공개적으로 진술되어 있다. 이 복음서에 사용된 자료들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선별된 것이다. 그러나 폴 미니어는 보다 깊은 논제가 이 말씀 표면 아래 놓여 있다고 믿고 있다. 그는 제4 복음이 예수를 개인적으로 알던 세대와 다른 사람의 증거를 통해서만 그분을 알던 제2 세대 사이의 전환기에 출현했다고 믿고 있다(Minear, 251-256). (24.3)
 그와 같은 논증을 지지하는 풍부한 증거들이 제4 복음 안에 있다. 21:20-23에는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가 예수께서 다시 돌아오실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난 것에 대한 언급이 있다. 23절은 그 소문의 기초가 된 예수의 말씀을 분석함으로써 그 소문을 진정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제4 복음은 육체 가운데 계실 때의 예수를 알던 자들과 마지막 산 연결 고리였던 그 사랑받던 제자의 임박한 죽음의 상황 속에서 기록되었다. 그의 죽음이 제2 세대를 혼란과 불확실성에 빠지게 할 위험이 있었다. 예수를 개인적으로 알고 대화를 나눈 이들의 인도가 없다면 그들은 어찌 될 것인가? 이 복음서의 목적은 제2 세대에게 살아있는 사도의 부재가 그들의 그리스도인 경험에 어떤 장애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하려는 데 있다. 이 복음서의 사역은 요한 없이도 계속될 것이었다. (24.4)
 이 복음서의 목적 진술(20:30, 31)이 20:24-29“의심하는 도마” 이야기 다음에 나오는 것에 유의하라. 29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다. 여기서 도마는 예수를 보고 만져본 모든 제자들을 대표한다. 반면에 예수의 말씀은 그 특권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에게 발하여질 것이다. 분명한 것은 보는 것과 개인적인 접촉이 믿음의 계발에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25.1)
 30절은, 이 복음서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제자들 앞에서” 행한 많은 표적들이 있다고 진술한다. 31절은 이 복음서에 기록된 것들은 제자들에게 일어났던 것과 똑같은 믿음이 생기게 하는 능력을 가졌기에 선별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제자들과 이 복음서의 최초의 독자들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제자들의 믿음은 그들이 본 것에 기초한 것인 데 반해 독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25.2)
 그러므로 20:30, 31의 목적 진술은 도마 이야기에 비추어 이해되어야만 한다. 도마는 부활한 그리스도를 보고 믿었다. 19-25절에 의하면, 30절의 제자들은 이미 부활한 예수를 믿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29절에서 축복이 발하여진 대상은 제자들이 아니다. 축복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지 않았음에도 믿게 된 자들에게 제3 인칭으로 발하여졌다. 제2 세대에게 있어서(31절) 믿음의 반응은 기록된 복음서 그 자체에 대한 반응으로 온다. 그러므로 이 복음서의 독자들은 30절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29절의 도마와도 대조를 이룬다. (25.3)
 무덤의 초기 장면(20:1-18)도 같은 목적에 이바지하고 있다. 사랑받던 제자는 20장에서 제2 세대의 이상적 대표자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그가 베드로, 마리아, 그리고 도마와는 달리 보지 않고 믿었기 때문이다(8, 9절). (25.4)
 그러므로 제4 복음의 직접적인 목적은, 제2 세대가 살아있는 사도가 없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고 그들을 설득하려는 데 있다. 기록된 복음서만을 가진 세대가 예수를 개인적으로 접촉한 사람들이나 그의 제자들 중의 한 사람과 비교해서 조금도 불리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26.1)
 이 복음서의 목적은 시종 여러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17:2에서 예수께서는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실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신다. 같은 장 후반부에서 그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그룹들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한 그룹은 제자들로서, 유다를 제외하고는 그분이 신실하도록 잘 보존해 온 사람들이다(12절). 또 다른 그룹은 저들의 기별,” 즉 제자들의 기별을 통하여 “나를 믿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20절). 다시 한번 예수와 육신적인 접촉에 기초하여 믿는 자들과 보지는 못하였으나 단지 제자들의 말 때문에 믿는 자들 사이에 구분이 나타나고 있다. (26.2)
 제2 세대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상징에서도 암시되어 있다(15:1-7). 예수는 포도나무요, 그의 제자들은 가지이며, 그들이 맺는 열매는 제2 세대인데, 이들은 제자들을 통해서만 예수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 중의 7명에게 나타나신 예수의 이야기에서도 제2 세대를 볼 수 있다(21:1-14). 예수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약간의 고기를 잡으려는 제자들의 시도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지시를 따랐을 때 수확은 엄청났다. 이 이야기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은유와 똑같은 양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 복음서를 처음 읽던 독자들은 제자들에게 잡힌 고기와 자신을 동일시했을 것이다. 미니어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가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친히 그들을 회심시키려 하시고, 그들의 공동체에 계속적으로 임재하실 것임을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Minear, 256). (26.3)
 제2 세대에 관한 또 다른 암시는 10:16“다른 양”과 제4 복음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개인적으로 예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개는 중개인에 의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Minear, 256-258). 침례자 요한은 두 제자를 예수께 보내었고(1:35-37), 안드레는 자신의 형 베드로를 찾아갔고(40-42절), 빌립은 나다나엘을 불렀고(45-47절), 사마리아 여인은 그녀의 도성 전체를 데리고 나왔다(4:28-30). 이와 같이 반복된 수단들을 통해서 저자는 예수의 개인적인 초청이 온전한 제자가 되는 일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