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요한복음 서문 서론-요한복음
 개관
 요한복음을 가능하면 한 자리에서 통독하라. 그 읽은 감동이 아직도 남아 있는 동안 책을 덮고 다음과 같은 사항들에 대한 그대의 생각을 기록해 보라: (19.1)
 1. 내가 예수에 관해 전에 알지 못했던 무엇을 배우게 되었는가? (19.2)
 2. 이 복음서를 집중해서 읽은 것이 예수와의 개인적인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19.3)
 3. 나는 이 책의 어떤 측면들을 처음으로 발견했는가? (19.4)
 4. 요한복음 1:1-18 (이 복음서의 서언[Prologue])을 읽으라. 이 문단의 주요 용어들에 표하라(힌트: 생명, 빛, 영접하다, 믿다, 등). 이 복음서의 나머지 부분을 정독하면서 서언에서 발견한 주요 용어들이 다시 나타날 때마다 표하라. (19.5)
 첫눈에 요한복음은 단순성의 모델처럼 보인다. 그러나 첫 인상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폴 미니어(Paul Minear)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복음서는 연구하면 할수록 점진적으로 훨씬 더 복잡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각 절이 외형적으로는 꽤 단순해 보이지만, 쉽게 흡수할 수 없게 만드는, 고도로 복잡한 사상 체계를 감추고 있다. 독자가 하나의 난제를 의식하자마자, 그 한 난제는 여러 개의 다른 난제들로 이끌어 가는데, 그 중의 하나도 쉽게 풀리지 않는다”(Minear, 247). (19.6)
 요한복음은 하나의 단순한 이야기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심오한 신학적 걸작이다. 이 책을 연구하면 이 책뿐만 아니라 이 책 속에 묘사된 예수를 평생 사랑하게 되는 연애 관계로 이어질 것이다. (20.1)
 넷 중의 하나
 우리들 중의 대부분은, 사복음서의 세세한 내용들과 매우 유명한 전승과 문화가 혼합되어 삽입된 “할리우드”(“Hollywood”)판 예수의 생애를 가지고 꾸려가고 있다. 하지만 예수의 생애에 대한 해석은 하나가 아니라, 각기 다른 네 개영감된 해석들로 되어 있다. 예수의 생애의 충만한 의미는 한 개인, 즉 한 사람의 영감받은 개인이 진술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복음서 저자들 각자는 예수에 대한 자신의 독특한 개인적 및 신학적 관점을 강조하는 사건들과 가르침들을 선택했다. 원칙적으로 복음은 하나이지만, 성경은 그 복음에 대한 네 개의 다른 표현들을 포함하고 있다. 네 개의 이야기들을 한 데 섞기 위하여 “할리우드 스타일”이 그 자체의 형태를 취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들 각자의 고유한 관점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통찰들을 놓치게 해서는 안 된다. (20.2)
 성경에 나타나는 네 개의 서로 다른 복음서들의 존재는 우리로 영적인 쟁점을 보는 데는 오직 한 개의 타당한 방식만 있을 뿐이라든지, 올바른 사고 방식은 하나뿐이라는 생각을 거부하도록 해 준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신학을 논의할 때 사용하는 천박한 양자택일(兩者擇一)의 딜레머를 배격하도록 경고하고 있다. 인간의 한계로 인해 어떤 신학적인 진술도 그 자체로는 절대적으로 완벽하지 않다. 그리스도를 묘사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그것들이 그분을 참되게 드러내려고 한다면 얼마간의 조건과 균형이 필요하다. (20.3)
 그러므로 지역 교회에서 사람들의 신학적 관점이 서로 다를 때, 어느 쪽이 “맞은” 것이고 어느 쪽이 “틀린” 것인지 판정하는 것은 언제나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그러했듯이, 각자가 다 고유한 관점에서 진리의 한 측면을 보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단(異端)이라 부르는 것이 항상 오류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균형을 잃은 진리(truth out of balance)일 수도 있다. 사복음서의 예는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양면으로 확증하게 하고, 호전적인 사람들이 홀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함께함으로 더 풍요로운 균형을 추구하도록 돕고 있다(참고 Talbert, “The Gospels and the Gospel,” 25, 26; Paulien,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End-Time, 80). (21.1)
 예수에 관한 요한의 고유한 묘사
 요한복음을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과 함께 주의 깊게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요한복음의 고유한 요소들이 나타난다: (21.2)
 1. 제4 복음의 예수는 공관복음의 “비천하고 온유하고 유순한 예수”가 아니다. 그분은 자기 주장이 강하고(2:4; 4:17, 18, 48; 5:45-47; 7:6-9), 투쟁적이며(3:10-12; 5:39, 40, 42, 44; 8:44), 격렬한 논쟁에 가담하기도 하고(3:1-15; 8:31-47), 때로는 다소 풍자적이기도(9:41; 10:32) 하다. (21.3)
 이와 같은 예수의 모습은 나에게 있어서 새로이 발견된 귀중한 모습이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가 가졌다고 주장하는 온유하고 침착한 성품을 내가 가지지 못했다는 것에 죄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우레의 아들”(참고 막 3:17)이 제공한 예수를 바라보는 고유한 창은 나로 하여금 예수가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 생판 다른 방법으로-사실에 충실하기는 하지만-그분을 묘사할 수 있던 심오함을 지닌 복합적 인격체였음을 보게 해 주었다. (21.4)
 2. 요한복음에 나오는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다른 세 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두드러진 것은 예수와 복음서의 여러 인물들, 즉 니고데모(3:1-21), 사마리아 여인(4:4-42), 벳새다의 중풍병자(5:1-15), 소경(9:1-41), 빌라도(18:28-19:16), 그리고 베드로(21:15-23)와의 일대일(一對一)의 만남이 많은 점이다. (21.5)
 3.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비유들은 예수의 사역에 주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비유가 극히 드물고, 비유를 정의하기에 따라서는 전무(全無)하다고 할 수도 있다. 제4 복음에서 비유에 매우 가까운 것이 있다면 선한 목자(10:1-18)와 참 포도나무(15:1-8)의 풍유(諷諭, allegory)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다른 세 복음서에서 발견되는 양식에 따르면 진정한 비유가 아니다. (22.1)
 4. 비유가 없다는 것과 함께 요한의 복음서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예수의 이야기 중의 많은 것들을 생략하고 있다. 예수의 탄생, 그의 침례, 그가 받은 유혹, 최후의 만찬, 겟세마네, 그리고 승천의 이야기가 없다. 또한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고쳤다는 기사도 없다(Barclay, 1:1, 2). (22.2)
 5. 그런데 이와 같은 생략은 저자가 그것들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것들이 생략되는 것은 다른 것들을 첨가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요한은 다른 이들이 가지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특별한 지식을 나눠주기를 원하였다. 이 특별한 지식에는 이 복음서에 묘사된 사건을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