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1 부 안식일과 쉼 제 5 장  안식일, 재창조의 새로운 숨
 더 좋은 두 번째의 창조사건
 그리스도의 수난 주간은 창세기 창조주간의 또 다른 깊이이며, 또 다른 국면이었다. 그리스도의 수난 주간으로 창조 사건의 한층 깊고 넓은 차원이 역사에 공개되었다. 하나님의 창조 사건은 하나님이 말씀을 선포하고 진흙에 연루하고 그 호흡을 나눔에서 끝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의 형상으로 낮아지심과 그의 겟세마네의 고뇌와 십자가의 피 흘림 같은 더 큰 행위의 영역이 감추어져 있었음이 드러났다. 그리스도의 수난으로써 만세 전부터 감추어져 있던 창조 사건의 비밀이 비로소 밝혀진 것이다. (55.1)
 같은 이야기를 십자가 사건으로 창조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첫 창조주간에 창조된 첫 인간의 감추어져 있던 모습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피땀어린 사랑의 작업 끝에 나타난 인간의 진정한 모습이 바로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수난의 재창조 사건은 창세기적 삶을 상실한 인간에게 창세기의 온전한 삶을 되돌려 주는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창세기 창조의 차원을 극복하고 넘어서는 더 나은 창조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창세기 창조가 “좋았다”면, 십자가 수난의 재창조는 “더 좋은 것”이다. (55.2)
 마태와 마가는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의 성격을 성소적 구조를 빌리어 규정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막 15:37, 38)었다. 어찌하여 거룩한 곳과 더 거룩한 곳의 구분인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진 것일까? 좋고 더 좋은 것의 벽을 완전히 무너뜨린 그 근본 취지가 어디에 있을까? 이제까지 좋음과 거룩의 차원에서 흐르던 우리의 삶과 구속 역사의 물결이 더 좋음과 더 거룩의 차원으로 지치고 들어가게 되었음을 나타내려 함이 아니었을까. 아니 그 반대로 좋음과 거룩의 차원인 지금 여기의 우리 삶과 역사에 더 좋음과 더 거룩의 능력과 은혜가 물밀 듯이 쳐들어오고 있음을 나타내려 함이 아니었을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이제와 여기” 곧 그들의 “성소적” 제한과 조건에도 불구하고 “지성소”적인 하나님 나라와 그 의, 그리고 그 자유와 은혜에 미리 참여하여 그 세계를 맛볼 수 있는 기회가 개방되어 있음을 나타내려 함이 아니었을까. (55.3)
 그런데 마가와 마태는 어찌하여 또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막 15:38; 마 27:51)고 강조하는가? 지금에서 미래로 가는 길은 뚫렸고, 지금과 미래가 하나로 열리게 되었지만, 어두운 옛 질서가 새 질서로 묻혀 들어오는 길은 차단되어 과거와 미래가 완전히 “둘이 되었음”을 강조하려 했을 것이다. 좋음과 거룩의 세계와 더 좋음과 더 거룩의 세계가 하나로 터져 있는 반면 나쁨과 거룩하지 못함의 어제와, 좋고 거룩하고 더 좋고 더 거룩한 이제는 완전히 두 세계로 갈라져 있음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56.1)
 안식일은 믿는 자의 삶에 발생한 더 좋고 더 거룩한 재창조의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수난의 창조에 참여하여 그 재창조로 인한 더 좋고 더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현존을 더욱 공고히 하는 날이다. 우리의 중심 주제인 창세기 호흡이라는 시각에서도 재창조 사건이 갖는 두 가지 성격은 분명해지고 있다. 일차적으로는 수난 주간에 이루어진 재창조 사건이 창세기 2장 7절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눠주신 호흡의 감추인 깊이를 들어내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거두신”“숨”(공동번역, 눅 23:46)이야말로 창세기 2장 27절에서 소개된 하나님의 호흡의 감춰진 비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심”으로써 우리에게 불어넣으신 재창조의 호흡은 창세기 창조주간에 받았던 숨을 되돌려주는 차원을 너머, 우리의 병들고 부패한 숨을 갈아준 두 번째의 더 좋고 더 거룩한 새 숨이었다. (56.2)
 생각해 보면 인간의 진정한 문제는 첫 번째 창조 때 부여받은 한 번의 호흡만으로 영원히 쉬며 살수 없게 되었다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할 것이다. 인간은 매순간마다 숨을 갈아 쉬어야 한다. 첫 창조의 호흡은 수고롭고 죄스러운 우리의 삶 안에서 병들고 부패됐다. 그래서 늘 쉴새없이 갈아 숨쉬어도 늘 피폐하고 가쁜 숨이다. 가래 낀 숨, 천식 같은 숨이다. 탄식 같은 숨이다. 그나마도 언젠가는 기한이 끝나는 숨이다. (57.1)
 언제면 우리도 숨 같은 숨을 쉬어 볼 것인가? 언제 쉼 같은 쉼을 쉬어볼 것인가? 언제 삶 같은 삶을 살아볼 것인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같이 영원히 숨 가쁘지 않는 숨, 영원히 피곤을 모르는 숨, 영원히 샘솟듯 하는 삶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뭇 살아 숨쉬는 것들, 재창조와 구속을 기다리는 만물의 비원이다(롬 8:22). (57.2)
 이 비원은 그리스도의 수난 주간을 통하여 일차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수난 주간을 통하여 인류와 만물은 하나님의 근원적인 호흡을 부여받고 피폐한 숨을 참 생명의 숨으로 갈아 쉴 수 있게 되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인생을 위하여 내주신 자기 희생적인 숨이야말로 숨 같은 숨, 거룩한 숨, 영원히 샘솟듯 하는 숨, 부활하여 다시 살아나는 숨이었다. 우리의 재창조는 이 숨으로 가능해진 사건이었다. 성경은 이 구속의 대 사건을 두 번째의 창조 기록으로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도 창세기 1장과 2장에 이루어진 첫 창조 사건의 평행절로서 기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20장 22절이다. 즉 이 성경절은 신약의 창조 기사인 셈이다. (57.3)
 창세기 2:7의 생기와 요한복음 20:22의 숨의 의미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이 말씀은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을 닫고” 있을 때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평강으로 축복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너희를 보내노라”는 이 말씀에 이어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다(요 20:19-21). (58.1)
 나는 신약 성경에 자주 인용된 희랍어역 구약 성경인 칠십인역의 창세기 2장 7절요한복음 20장 22절의 희랍어 텍스트를 대조해 읽어보았다. 요한복음 20장 22절“숨을 내쉬며”와, 창세기 2장 7절“생기를 불어넣으시니”가 동일한 희랍어 “에네푸세센”이었다. 창세기 2장 7절“생령이 된지라”가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을 받으라”로 표현되고 있다. 창세기 2장 7절에는 흙 사람이 하나님의 호흡으로 말미암아 “생령”(프쉬켄)으로 창조되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는 육신의 사람이 예수님의 호흡으로 말미암아 “성령”(프뉴마 하기온)의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다. 재창조가 창조의 반복이나 환원이라는 차원을 너머 더 좋은 새 창조라는 취지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58.2)
 어떻든 나는 요한복음 20장 22절창세기 2장 7절의 문맥에서, 그리고 그 대구(對句)로 기록된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때 이후로 요한복음 20장 22절출애굽기 23장 12절, 창세기 2장 7절, 열왕기하 4장 31-35절과 더불어 나의 소중한 기억절의 하나가 되었으며, 하나님과 창조, 하나님과 나의 재창조를 이해하는 기본 구조의 하나가 되었다. 즉 이 기억절로 말미암아 <안식일의 쉼—숨쉬는 것들의 숨돌림—하나님의 숨의 창조—그리스도의 숨의 재창조—성령의 재창조—믿는 자의 성령의 침례>라는 인식의 기본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58.3)
 그런데 요한복음 20장 22절을 좀더 세심히 읽어보면, 이 구절이 창세기 2장 7절의 문맥에 국한되고 그 평행절로만 끝나는 구절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한복음 20장 22절의 텍스트는 예수님의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 쉬셨다”“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하셨다는 두 문장의 한 묶음이다. 하나님의 “가라사대” 이신 예수님 곧,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과 그 예수님의 “가라사대”와 그리고 그 예수님의 “숨 내쉼”을 하나로 묶은 문장이다. 창세기 1장 26절의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가라사대”와, 창세기 2장 7절의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시니”를 하나로 묶는 창세기 창조 사건 기사의 평행절로 기술한 문장이 분명하다. 이처럼 요한복음 20장 22절창세기 1장2장의 전체 창조 사건의 문맥에서, 그리고 그 전체 사건의 평행절로 기록된 것이다. 창세기 창조주간에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흙 사람이 빚어지고, 하나님의 말씀과 호흡에 의하여 역사상 최초로 숨쉬는 사람이 출현하였다. 재창조 주간에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은” 재창조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눈물의 희생과, 그 “가라사대”와 그 호흡에 의하여 역사상 최초로 성령의 사람이 출현하였다. 그리고 안식일은 요 20:22에서 말하는 성령의 사람이 믿는 사람들에게 재현되는 날이다.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침례가 재현되는 날이요, 믿는 자들이 성령을 받는 날이다. (59.1)
 요한복음 20장 22절의 풀어쓰기
 창세기 2장 7절의 평행절로 기록된 요한복음 20장 22절은 그리스도 수난의 재창조 사건 전체를 요약하고 압축하는 사건 기사이다. 즉 예수님이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하심의 풀어쓰기가 겟세마네의 몸부림치는 해산의 고통에서부터 십자가의 “다 이루심”에 이르는 재창조의 스토리인 것이다. 주님의 고뇌와 간절한 간구와 피 같은 땀방울과, 그리고 물같이 흘리신 피의 이야기인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주님의 그 같은 고통스러운 경험들이 두 번씩, 세 번씩 반복되는 이야기이다. (60.1)
 이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먼저 눈앞에 전개되는 그 끔찍스러운 장면들에 의하여 압도당한다. 그러다가 그 끔찍스러운 고통들이 두 번씩 세 번씩 거듭되고 있는 그 이야기의 반복 구조에 신음하고 탄식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 하나를 창조하는 데에 하나님의 눈물겨운 수고는 몇 차례나 반복되어야 하며, 사람 하나를 다시 살리는데 하나님의 간구와 희생은 얼마나 거듭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탄식은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의심도, 일회적인 십자가 사건에 대한 부정도 아니다. 사람 하나를 위해 거듭되는 하나님의 정성과 희생에 대한 탄복이요 망연자실함인 것이다. (60.2)
 위의 사실을 직접 확인하기 위하여, 요한복음 20장 22절의 풀어쓰기, 곧 겟세마네에서부터 골고다에 이르는 이야기, 주님의 고뇌와 굴욕이 반복되는 이야기를 잠깐 살피고 가자. 마가복음 14장 32-37절: “예수께서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 .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 제 심히 놀라고 슬퍼하사. . .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 . .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 .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 .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 . . 그러나. . .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 . .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60.3)
 마태복음 26장 42-45절: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 . 또 저희를 두시고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 .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 우느니라.” (61.1)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에 이르는 동안에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옷 벗김의 수모도 세 번씩 반복된다. 이 사실 역시 성경에서 확인해보자. 마태복음 27장 28-35절: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 .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 . 끌고 나가니라. . . . 골고다 즉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러. . .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호흡으로 재창조되는 사건은 무릇 이와 같았다. 인간의 창조와 재창조 사건은 하나님의 고난의 사건이며, 그 고난의 수고가 반복되었던 사건이었다. (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