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4 부 안식일 신앙의 한 작은 주장 제 14 장  안식일, 생명을 돌보는 사랑의 날
 안식일의 세계: 하나님이 낳고 기르는 세계
 안식일 신앙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던 태초의 질서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다. 창조의 질서는 어떤 것인가. 하나님이 만물을 향하여 “너 있으라”(창 1:3) 하는 질서이다. “너 살라”(겔 16:6) 하는 질서이다. 그리고 허물 많은 우리의 생명을 향하여 “너 좋다”(창 1:4) 하는 질서이다. 불의한 우리의 생명을 향하여 “너 의롭다”(롬 8:30) 하는 질서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는”(롬 8:1) 질서이다. 하나님이 “있으라” 하여 만물을 창조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신”(롬 8:30) 질서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로 “있으라” 하여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그들을 “좋고 선하게” 하시고 좋고 선하게 하신 그들을 “심히 좋고 심히 선하게 하시고” 심히 좋고 선하게 하신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창 1:3-2:3) 질서가 안식일 신앙이 되돌아가고자 하는 생명의 질서이다. (550.1)
 만물을 택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그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는가. 누가 우리에게 딴말을 할 수가 있는가.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사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어 우리를 위해 간구하는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를 향하여 “있으라,” “살라,” “좋다,” “의롭다”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향하여 “너 없다,” “너 없어져라,” “너 나쁘다,” “너 불의하라” 할 수 있는가. 그 누가 있어 우리를 착하고 의롭다하고 우리를 살라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가.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내가 확신하노니 사랑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8-39). 이것이 안식일 신앙이다. (550.2)
 안식일의 삶: 자비를 베풀어 이웃이 되는 삶
 안식일 신앙이 의도하는 창조의 질서는 하나님이 그 지으신 만물의 삶을 축복하는 삶이다.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바다에 충만하라 공중에 충만하라”(창 1:21-22, 26-28) 하는 질서이다. (551.1)
 뿐만 아니라 피조물이 피조물을 축복하여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는” 질서였다. “물들이 생물로 번성케 하고”(창 1:20), “창공이 새들을 축복하고”(창 1:20) 땅이 그 생물을 축복하여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고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내어(창 1:24) 번성케 하는 질서였다. 안식일은 이러한 질서로 돌아가는 신앙이다. 생물을 축복하는 삶, 만물에게 자비를 베푸는 삶이 안식일 신앙의 삶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안식일에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이다(마 12:7). 하나님이 안식일 신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이다.”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지극히 작은 것 하나에게까지 자비를 나타내는 삶이 안식일 신앙의 삶이다. 안식일 신앙의 삶에서는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가 상을 잃지 않는다”(마 10:42). 소자 중 하나도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마 18:10) 삶이다. 안식일의 하나님은 일 백 마리 양 가운데 한 마리 양도 잃어지는 것을 방치하지 않으신다(마 18:12-13).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이 안식일의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마 18:14). (551.2)
 안식일 신앙의 삶은 “어린 아이 같이 자기를 낮추어”(마 18:4) 형제를 나보다 낫게 여기고 그의 생명에 이바지하는 삶이다. 물들이 생물을 축복하고 공중과 땅이 생명을 축복하고 생명으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듯이 이웃의 생명을 북돋는 삶이 안식일 나라의 삶이다. 이웃의 생명을 북돋기 위하여 우리는 용서하고 먹이고 입히고 치료하는 것이다. 사귀는 것이다. 형제의 생명의 발을 씻는 삶이 안식일 신앙의 삶이다. 생명을 북돋는 안식일 신앙의 삶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음도 가리지 않고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피조물을 영접하는 삶이다.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모두에게 구별 없이 햇빛을 주시고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모두에게 구별 없이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마 5:45)처럼 차별 없이 생명을 지원하는 삶이다. 안식일 신앙의 삶에서는 “지극히 작은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함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이고 하나님을 영접함이다”(마 18:5).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마 18:6). 그러므로 “안식일에는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마 12:13). 불쌍히 여기고 선을 베푸는 것이 안식일 신앙의 삶이다. (552.1)
 안식일 교인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 같은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옷을 벗기고 매맞아 반쯤 죽게되어 피투성이인 채로 버린바 되었는데 제사를 중요시하고 제사로 의로움을 나타내고 그 의로움을 내세워 밥 먹고사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았으나 피하여 지나갔다. 그런데 그때 어떤 사마리아 사람도 여행을 하다가 같은 길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 참혹한 현장을 보고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풀었다.”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다(눅 10:37). (552.2)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안식일의 기별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눅 10:27)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쉬게 하라는 것이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 멍에를 쉽게 하고 그 짐을 가볍게 하라는 것이다(마 11:28, 29). (553.1)
 안식일의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이시다. 안식일의 하나님은 사마리아인과 같은 하나님이시다. 구약성경 에스겔 16장에는 구약의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라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하나님이 사마리아 사람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근본이 가나안이요 아모리 사람을 아비로 하고 헷 여자를 어미로 하여 태어난 비천하고 가련한 생명이 있었는데 천한 핏덩이를 불쌍히 여겨 배꼽 줄을 잘라주거나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해 주거나 소금을 뿌려 소독을 해 주거나 강보로 싸 춥지 않게 해주는 이 하나 없었다. 태어나던 날에 핏덩어리를 빈들에 버렸다. 누구 하나 그 핏덩어리 생명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이 그 곁으로 지나가다가 그 핏덩어리가 발짓하는 것을 보고 이르기를 핏덩어리야 “살아라” 하였다. 그리고 겉옷자락을 펴서 그 벌거벗은 몸을 덮어주고 하나님께 혼약한 사이로 삼아주셨다(겔 16:1-18). 사마리아 사람 같은 이 하나님이 안식일의 하나님이시다. 안식일의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는 하나님이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선을 행하고 자비를 베푸시느라고 안식일에 쉬지 못하는 하나님이시다. 안식일에 일하는 하나님이시다(요 5:17). (553.2)
 안식일: 사랑의 계명 먼저
 안식일의 계명은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계명이다. “네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신 6:5; 마 22:37; 막 12:30),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눅 30:38; 레 19:18)는 계명이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같은 사랑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이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요일 4:20). 우리가 안식일의 “이 계명을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1). (554.1)
 진실로 안식일 신앙은 만물을 “내신 이를 사랑하는” 신앙이다. 그리고 만물을 “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서 낸 자들을 사랑한다”(요일 5:1). 그렇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자녀들과 만물을 사랑하는 계명이 안식일 계명이다. 이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남들이 알 것이다. 사랑의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면 저희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554.2)
 안식일은 사랑의 하나님의 사랑의 계명이다. 안식일 안에 있는 것은 사랑 안에 있는 것이다. 사랑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안식일 안에 거하는 자는 사랑 안에 거한다. “하나님은 사랑 안에 거하고”(요일 4:16) 또 하나님은 안식일 안에 거한다(창 2:3). 안식일을 안다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자는 안식일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사랑이기 때문이다(요일 4:8 참고).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지”(요일 3:1). 이것이 안식일에 나타났다. 안식일을 자세히 알면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느낄 수 있다. (554.3)
 그리고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세상이 안식일을 알지 못함이다. 그리고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은 세상이 안식일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요일 3:14) 우리가 또한 안식일의 사랑으로 들어감으로써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것을 안다. 우리가 예수 안에 들어감으로써 안식일 안식 안으로 제대로 들어간 것을 안다. (555.1)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안식일 신앙은 어떤 것인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서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다(약 1:27). 깨끗하고 순수한 안식일 신앙은 어떤 것인가. 그리스도께서는 가정과 교회와 세상에서 동정과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 하셨다.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와 고통 당하는 자에게 친절한 말과 자비로운 행동과 따뜻한 관심과 같은 선행을 베푸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을 지키는 자녀들에게 기대하시는 열매이다(구호봉사, 35 참고). 실망과 슬픔에 눌려있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동정하고 궁핍한 자들을 향하여 손을 내밀고 벗은 자들을 입히고 나그네들을 따뜻이 영접하여 그대의 집과 마음에 영접하는 것이다(구호봉사, 35 참고). 이때에 우리는 안식일의 나라 곧 태초의 생명의 세계로 가까이 가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노래로 화답하는 에덴의 질서에 멀지 않게 될 것이다. (555.2)
 안식을 누리는 자의 책임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요단 저편 모압땅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명령을 다 고하였다(신 1:3). 이때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 중 요단 저편에서 기업을 먼저 받아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게 된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지파 자손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셨은즉 너희 군인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선봉이 되어 건너가라. . . .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같이 너희 형제에게도 안식을 주시리니 그들도 요단 저편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주시는 땅을 얻어 기업을 삼기에 이르거든 너희는 각기 내가 준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신 3:18, 20) (556.1)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도 요단강을 건너기에 앞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지파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너희 처자와 가족은 너희에게 준 요단 이편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고 여호와께서 너희로 안식하게 하신 것같이 너희 형제도 안식하게 되며 그들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얻게 되거든 너희는 너희 소유지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편 해돋는 편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차지할지니라”(수 1:12-15). (556.2)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지파는 이 분부를 지켰다. 그들은 가나안 정복사업이 다 끝날 때까지 “날이 오래도록” 그 형제 지파들을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책임을 지켰다”(수 22:3). 하나님 여호와께서 형제 지파들에게 “안식을 주신” 후에야 비로소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편에서 준 소유지로 돌아가”(수 1:4) 안식을 누렸다. (556.3)